일상의 그물이 코 앞에 버티고 있는데도 쾌락의 연못에서 고통의 핏물을 마시는 자의 삶은 어떻게 변모하게 되는 것일까. 사디즘의 대명사로
유명한 사드 후작은 프랑스혁명기가 태동한 최고의 스캔들 메이커였다. 1740년 6월2일 프랑스 역사상 프로방스의 최고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마르키스 드 사드는 어린 시절 황제의 아들과 친구를 했을 만큼 온갖 권력과 영화를 누리는 어린 시절을 보낸다. 젊은 날의 사드는 당시 많은
귀족 청년이 그러했듯 귀족 가문의 후계자의 수순을 착실히 밞아 나갔다. 군인이 되어 7년전쟁에 참가했고, 귀향 뒤 사법관의 딸과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었던 것.
그러나 시대의 거센 풍랑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혁명 직전의 프랑스는 그야말로 아노미 그 자체였고 왕과 귀족, 사제들의 도덕적
타락은 수녀의 임신과 사생아들의 출산을 비일비재하게 만들었다. 귀족사회의 위선과 인간성이 거세된 비참한 전쟁의 면면을 목격한 그는 서서히
인간의 성악설을 마음속에 품게 된다. 인간의 본성을 시궁창 같은 악에서 찾게 된 사드 역시 인간의 악덕을 실험할 수 있는 삶의 시궁창을
헤매었던 것. 이후 그는 때로 창녀들에게 최음제가 섞인 사탕을 먹이거나 구걸하는 여성을 구타하는 잔혹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절대 자유 인가 절대 악인가
나이 32살에 아르퀴에의 거지여자 구타사건(1768)과 마르세유의 봉봉사건(1772) 등의 스캔들을 일으켜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사드는
생애의 3분의 1 이상을 옥중에서 보냈다. 27년의 옥중 생활 동안 그는 정력적으로 집필 활동을 하였으며, 프랑스혁명으로 석방된 뒤로는
정치운동에 열중하기도 한다. <저스틴> <줄리엣> <소돔에서의 120일> 등 사드의 작품들은 출판되자마자 극도의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성묘사로
금기의 책이 되었으며, 그뒤 수백년 동안 그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스스로 도착이라는 단어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사회적 파문을 자청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나폴레옹 정부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수감, 재수감을 되풀이했던 이 말썽꾸러기 귀족은 생애 최후의 10년간을 샤렝턴의
정신병자 수용소에서 보내다 영면한다.
시인 아폴리네르가 “이전에 존재하였던 가장 자유로운 정신”이라 찬양하였고, 철학자 사르트르에 의해서는 “단 한점도 비열하게 되지 않은 때가
없었던 고깃덩이 시체”로 격하되었던 사람. 절대 자유가 절대 악과 통한다는 사드의 신념은 단 한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사드를 둘러싸고
의구심과 찬동의 변덕을 부렸던 실체는 바로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는 시대정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드의 삶에서 그 누구도 단 한 가지만은
빗겨나갈 수 없었으니, 그것이 바로 사드와 사디즘에 대한 호기심은 아니던가.
사드는 가도 사디즘은 남았다
필립 카우프만 감독 역시 <퀼스>에서 이 점을 놓치지 않는다. 비슷한 해 나온 다니엘 오테유 주연의 프랑스영화<사드>가 호방한 귀족 사드에 대한 풍물기행 같다면, 할리우드영화 <퀼스>는 일반인들의 사드에 대한 호기심을 적당히 만족시키면서, 월드
스타 사드를 관리하려 든다. 카우프만은 <프라하의 봄>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등에서 극단적 관능과 이를 목 조르는 사회의 불행한 동거를
즐겨 다룬 인물. 그가 관심을 갖는 인물은 여전히 헨리 밀러나 밀란 쿤데라 같은 작가 취향이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에서 사드는 아내를 때리는
치졸한 이기주의자에서 끝내 십자가를 목구멍에 삼키고 죽어가는 순교자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퀼스>는 깃털 펜을 지칭하는 말이고,
제목이 암시하듯, 감독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온갖 시대의 압력하에서도 ‘쓴다’는 신념을 실행하는 인간 ‘의지’에 대해 이야기했는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퀼스>의 일등 공신은 당연히 제프리 러시와 와퀸 피닉스의 광기어린 열연. 선과 악, 관습과 반항, 신과 인간의 코드로 대립되는
이들의 연기 대결은 <퀼스>에 불꽃 같은 에네르기를 실어 나른다. 신에게 회개하라는 쿨미어 신부의 권유에 성경에 침을 뱉음으로써 자신의
세계관을 피력하는 사드. 그는 펜촉이 없자 닭뼈에 포도주를 묻혀 쓰고, 그것마저 금지되자 입던 옷에 문신 같은 혈서를 새겨넣는다.
결국 <퀼스>는 <아마데우스>나 <까미유 끌로델> <샤인>류의 전기영화, 광인의 영역에 다가서서 삶을 짧고 굵게 소모해버린 천재들의 부박한
삶에 대한 증언 역할에 너무 쉽게 타협해버린다. 전형적으로 이들 영화에서 배우들은 생애 최고의 연기를 이끌어내고, 광기와 악마성에 시달리는
천재의 그늘은 정신병원의 엽기적 분위기로 더욱더 깊은 수렁을 이룬다. 사드의 엽기적 분위기에 감흥을 받기에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아마데우스>들을
스크린에서 만난 터였다.
그래도 결국 사드는 끝내 자신의 꿈을 이룬 것은 아닐까? 사드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이 ‘극단적 상상의 순간에 덮쳐오는 끔찍한 진실’이라면,
영화라는 매체는 사드의 이상을 가장 잘 구현하는, 타인의 존재를 모두 몰아낸 악몽의 판타지는 아닐까? 사드는 죽었지만 사디즘은 죽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나를 포함한 개소마발이 떠드는 사디즘이란 훨씬 낯간지럽고 도식화된 모습으로 영화 속에 파고들지만 말이다. 여전히 사디즘은
선정성의 꼬리를 흔들며 시대의 저항이라는 페르조나(그리스어로 가면이라는 뜻)를 쓰기는 하지만 말이다.
당연히 사회적 코드로서의 사디즘은 체제의 그물망에 대한 완벽한 일탈의 꿈이다. 일본의 오시마 나기사의 문제작 <감각의 제국>은 사도 마조히즘을
통해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흔히 회자되듯 일장기로 늙은 거지의 성기를 건드리는 장면이나 일장기 흔들며 출정 군인을
환송하는 장면과 성에 탐닉하는 주인공을 대비시킨 장면 등은 전공투 세대인 나기사의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조롱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또한 사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요정의 주인 키치조우는 30년대의 일본의 상황에서 전쟁의 상처를 외면할 수 있는 상위 계층에 속하는 반면,
게이샤 사다는 삶 때문에 몸을 파는 전형적인 하위계층에 속해 있다. 그런데 두 남녀의 만남은 회를 더할수록 서로의 계급을 무시하기에 이르른다.
키치조우의 성기를 부여잡고 그를 때리는 사다의 사디즘에는 완벽한 계급의 역전현상, 사회적 배경의 무시가 일어나게 된다. <감각의 제국>에서
가학과 피학은 남성이라는 우월계층의 상징인 남근을 잘라내는 상징적인 행위로 끝나버리고 만다.
사디즘, 전복과 배반의 힘
<감각의 제국>에서 사디즘은 고통과 허기가 범벅이 된 제의식이며 극단까지 치닫는 밀폐된 운명성이자 머리를 박박 민 저항의 밀교였다. <감각의
제국>이나 <로망스>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금색과 붉은색의 사디즘의 코드는 결국 중세에서는 연금술의 코드. <로망스>에서 교사였던 마리는
이 연금술의 방에서 욕망을 전수받고 욕망의 대상화가 되는 법을 배운다. 그것은 철저하게 상대방의 욕망에 녹아서 죽음과도 같은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변화하려는 인간의 원초적인 금속물로서의 본능, 혹은 극단으로 통하는 구원이기도 하다. 이렇듯 완벽한 사도-마조히즘은 유한한 존재인
우리의 질서정연한 모습을 해체하고 죽음이라는 무한으로 밀어넣는다. 이미 프로이트가 지적했듯 사디즘은 성과 죽음을 하나로 통합시켜, 무감각한
죽음의 상태, 모든 도덕과 문명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원시의 상태를 만든다.
이러한 측면에서 <감각의 제국>과 <샤만카> <로망스> 같은 영화들이 어떤 이유에서든 여성주인공이 남성주인공을 살해하는 결말로 치닫는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닌 듯싶다. 흥미롭게도 실제 사드 역시 아버지에 대한 극심한 증오와 미움에 시달렸다 한다. 사드 문학의 부유하고 세도
높은 남자주인공들은 거대한 지하참호에서, 호화로운 시설 속에서 독재자처럼 행동하며 방탕을 일삼다 파멸한다. 대한민국에서 본격적으로 시도된
사디즘의 원조 작가 장정일의 <개인기록>이라는 은 자서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아버지의 완력을 ‘유리상자 속의 뱀과 생쥐의 전투’로
비유하면서 자신의 지독한 결벽증이 아버지의 도피와 미움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사디즘을 표방하는 악당문학이란 엄격한 가부장제도에서 발생하는 친부살해의 욕구와 일맥상통하는 소망의 고백록이기도 하다. 원시적이며 무정부적인
어머니와 잔혹한 체제의 법인 아버지가 야만의 결혼을 하는 한, 완벽한 복종을 요구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적극적인 부정을 이루는 사디즘 역시
가족과 개인의 틀을 벗어나기 힘든 것이다. 외면상 이야기에 집착하기는 하지만 <퀼스> 역시 이러한 사디즘의 전복성을 마들렌과 미셀이라는
두 여성을 통해 표상화하려 든다. 세탁부인 마들렌은 정신병원의 감시를 피해 사드의 출판을 도와주며, 겉표지에는 프랑스 여류시인의 껍데기를
씌운 채 <저스틴>을 탐독하던 원장의 젊은 아내는 위선적인 늙은 남편 로이 콜라를 배반할 힘을 사드의 문학에서 찾는다.
사드의 고독을 아는가
실제로 1800년 당시 프랑스는 사드의 글뿐 아니라 프랑스혁명 자체가 광기의 칼을 휘두르는 시대였다. 바스티유와 픽푸스 감옥에서는 하루에도
수천명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사드는 감방창문을 통해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연히 사드는 서구적 합리주의와 기독교 사상에 의문을
품게 된다. 사드는 실제로 절대적 고독만이 가득한 감옥에서 ‘자연은 우리를 홀로 태어나게 한다. 어떤 사람과 다른 사람 사이에는 결코 아무런
관계도 있을 수 없다’고 믿게 된다. 텅 빈 존재의 심연과 마주하자 프랑스 혁명에 현혹된 군중보다 완전한 개인, 완전한 욕망의 극단을 꿈꾸었던
것이다.
아마도 영화 <퀼스>가 놓친 것이 바로 이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퀼스>는 광기를 통해 사드라는 인물의 이야기에 집착하며 현대적인 관점에서
사디즘을 윤색하려 든다. <퀼스>에서 사드를 교화하려던 쿨미어 신부는 마음으로만 사모하던 세탁부 마들렌의 죽음 앞에서 신을 버리고 사드의
모습과 닮아간다. 궁극적으로 카우프만은 인간은 양면이라든가, 사회에 저항하는 예술의 힘 같은 종래의 고정관념을 사드의 전기에 슬쩍 밀어넣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퀼스>는 서로의 존재 밀도에 빚을 진 배타적인 쾌락과 고독을 다루기에는 너무 순진한 측면이 있어보인다. 사실 사드의
가학성은 <퀼스>나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열정과 광기, 악마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차가운 지성과 모반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드의 글들은 선정적인 에로티시즘이라기보다 완벽하게 금기를 위반한 성이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잔인한 후렴구 같은
것이다.
예술로 승화된 사디즘이란 조르주 바타이유가 이미 선언했듯 거대한 하나의 의문부호인 것이다. 소극적으로 삶을 보존할 것인가. 적극적으로 삶의
강렬함을 더할 것인가? 사드도 외롭고 사드의 주인공들도 외롭고 <감각의 제국>의 사다 역시 외로웠다. 현실의 부정이 아니라 현실을 환상으로
전이시키는 과정에서 나오는 완벽한 밀폐감. 결국 진정한 사디즘이란 다른 사람을 쇠줄에 매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독에 묶여 자신의 부정을
이룬 인간 존재의 심연에서 나오는 마지막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