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을 통해 성장하는 어른의 영화는 많다. 굳이 멀리가지 않더라도 <어바웃 어 보이>도 그런 유의 영화 중 하나이다. <기쿠지로의 여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기쿠지로의 여름>은 할리우드의 성장영화들보다 훨씬 허허실실하다. 뚜렷한 기승전결도 없고 어른들과 아이는 신나게 놀다가 그냥 헤어진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체성과 인간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로드무비는 많다.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부터 <아이다호>까지 주인공들은 모두 길의 감식가를 자처하고 나선다. <기쿠지로의 여름> 역시 로드무비다. 그런데 이 어른은 경마장에 가서 돈을 탕진하고 남의 도시락이나 빼앗아먹는다. <기쿠지로의 여름>은 다케시 스스로 토니 레인즈와의 인터뷰에서 인정했듯이 <파리 텍시스>보다 <오즈의 마법사>에 가까운 영화이다.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했다 사라지고,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들은 겉으로 별다른 변화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저 도쿄에 사는 꼬마 도로시와 함께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주러, 다케시는 길을 떠날 뿐이다.
모두가 외로운 사람들
다케시의 주인공들은 늘 속으로 외롭다. 그들은 주류사회에 섞이지 못하는 야쿠자이거나 불량학생이거나 가족이나 동료가 죽은 과거를 떠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잔인하고 끔찍한 폭력의 기억에 고생하고 눈 깜짝하지 않고 살인을 저지르다가도 텅 빈 운동장, 텅 빈 바닷가, 텅 빈 공터에서 자전거를 타고 총을 쏘고 불꽃놀이를 한다. 심지어 크레인숏으로 카메라가 올라가면서 주인공들을 잡으면, 빈 도화지 같은 공간에 그들은 한점처럼 까마득하게 보인다. 그때 다케시의 주인공들은 이 세상에서 오롯이 혼자이다.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마사오 역시 늘 혼자다. 마사오의 집은 몇평 안 되는 공간인데도 매우 커 보이고, 마사오는 방학이 되었는데도 친구 하나 없이 도쿄의 빈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이때의 비어 있음은 실제하는 공간이라기보다 마사오가 느끼는 지극히 주관적인 공간으로써의 적막한 여름이다. 다케시는 철저히 프레임 안을 비워냄으로써 늘어지는 태양 속에서 혼자 있는 아이를 잡아낸다.
이 빈 공간에 기쿠지로 역시 떡 하니 혼자 들어앉아 있다. 너무 정면 숏이라 관객으로서는 어찌보면 부담스럽기까지 한데 기쿠지로는 이런 모양새로 걸핏하면 방을 내놓으라 돈 내놓라고 떼를 쓴다. 기쿠지로의 이런 앞모습을 롱숏으로 잡은 뒷모습과 섞어놓으면 분위기가 아주 묘해진다. 마치 다케시는 할 테면 해봐라 하는 태도의 기쿠지로가 우리에게 주는 불안감과 으름장이 종이 호랑이의 그것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게다가 어린 마사오와 다 큰 기쿠지로의 앞모습은 천양지차지만 뒷모습은 아주 비슷하게 비쳐진다. 마사오와 기쿠지로 모두는 어린 시절 엄마를 잃어버렸다. 어쩌면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다케시 영화에서 수직의 크레인으로 올라가는 카메라는 주인공들을 외롭게 놔두지만 수평의 팬은 그들을 함께 묶어준다. 그들의 뒷모습을 다케시의 카메라가 그러하듯 한번이라도 보았다면 누군가는 그들 곁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없는 엄마와 엄마없는 아이를, 한집에서 정답게 살게 해줘요’라는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시구처럼, 이제 아빠없는 아이와 아이없는 아빠가 한 화면에서 나란하다.
한여름 바다, 어머니의 자궁
프레임을 비워낼 뿐 아니라 다케시 영화에서 여자들은 부재하는 대상으로 그 행간이 비워져 있다. 간혹 여성들이 등장하더라도 그들은 대개 여성이란 원래의 역할을 상실한 채 세상에서 증발해버릴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하나비>의 주인공, 니시 형사의 아내는 백혈병이고, <그 남자 흉포하다>의 아즈마 형사의 여동생은 마약에 절어 몸을 판다.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기쿠지로와 마사오의 어머니는 재혼하여 아들을 버렸다. 다케시는 여성들을 소극적으로 그린다고 비판받고, 폭력과 비열함이 넘쳐나는 도쿄의 거리에 이들의 따뜻한 손길이 비집고 들어설 공간은 손바닥만큼도 없어 보인다. 그렇기에 다케시의 주인공들이 마지막으로 찾아가고자 하는 공간 역시 드넓은 바다와 아름다운 천사로 형상화된 어머니이다.
영화 <하나비>에서 그림 속의 천사는 자살로 막을 내린 니시 형사와 그의 아내, 일찍 병사한 그의 딸을 한 가족으로 다시 묶어준다. <키즈 리턴>에서 길모퉁이 찻집의 아가씨에게 마음을 준 소년이 수줍게 내미는 선물도 천사 인형이다. 외롭고 풀이 죽어 있는 이들에게 내미는 천사 인형은 다케시가 자신의 주인공들에게 주는 일종의 부적과도 같다.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엄마가 재혼했다는 것을 알고 울고 있는 마사오에게 기쿠지로는 오토바이 폭주족에게서 빼앗은 천사상을 내밀며 힘들 때 천사상을 흔들면 천사가 내려와 도와줄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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