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잘 알려진 대로 다케시의 모든 영화에서는 바다가 등장한다. 그리고 바닷가로 간 다케시들의 주인공들은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닷가에서 놀다 바닷가에서 죽어갈 팔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기타노 다케시의 인터뷰에서 매번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질문이 바다에 관한 것인데, 이에 대해 다케시는 한결같이 바다는 시원의 장소이고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평화의 원점이라고 모범 답안을 들려준다.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상심한 마사오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바닷가의 기쿠지로는 유난히 긴 롱테이크로 잡혀 있다. 이때만큼은 다케시의 카메라도 그지없이 참을성 있고 따뜻하게 기쿠지로를 바라본다.
그렇다면 왜 기타노 영화에 그토록 일관되게 현실로서의 여성이 부재하는가? 바다같이 넓고 깊은 마음을 지닌 수호천사 같은 여자, 이것이야말로 다케시가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완전한 결핍이자 그러기에 유일한 판타지는 아닐까. 기타노 영화에서 바닷가와 천사는 완전무결한 깨끗함으로 주인공들을 감싸안는다. 이 둘 모두는 세상의 때를 타서는 안 되는 존재이고 일종의 원형적인 이미지이다. 다케시의 폭력은 그 격렬함으로 인해 세상의 불완전함을 일거에 휩쓸어버리는 정화적 장치이고, 이 종교적 행위에 조금이라도 금이 간 현실의 여성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는 것이다. 뻔한 구원의 여성상 타령일 수 있지만, 그 기원과 희구가 이토록 간절하기에 기타노 영화에서 바다와 천사는 소모되는 배경이 아니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핵이 된다.
보자. 심지어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바다는 기쿠지로를 쑥쑥 키워내기까지 하지 않는가. 바닷가라는 자연에 품에 안긴 기쿠지로는 수영장이라는 인공적인 장소에서 허풍선이처럼 팔을 휘저어대던 예전의 기쿠지로가 아니다. 허풍선이 기쿠지로, 만화적인 기쿠지로가 이제는 유사-아버지로 마사오와 놀아준다. 경마장에서 돈이나 탕진하던 백수 기쿠지로에게 한여름의 바닷가는 거대한 어머니의 자궁이었던 것이다.
다케시, 논다
영화 <소나티네>에는 울긋불긋한 하와이식 남방을 입은 동료 야쿠자에게 다케시가 ‘아직도 훌라춤 옷이냐. 못 말리겠군’이라는 농을 건네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 다케시가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훌라춤’ 옷을 입고 여름방학을 맞이한 아이처럼 들로 산으로 놀러 나간다.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다케시는 기꺼이 논다. 그러고보면 다케시에게 ‘논다’는 것은 ‘죽인다’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테제이다. <소나티네>에서 후배 야쿠자와 러시안 룰렛을 하는 다케시는 <디어 헌터>의 로버트 드 니로처럼 심각한 표정이 아니라 싱글벙글 하면서 총부리를 겨눈다. 기관총의 불꽃과 불꽃놀이의 불꽃이 오버랩되는 <소나티네>를 보면 다케시에게 살인은 유희처럼 일어난다. <키즈 리턴>의 아이들도 아예 떡잎부터 될 성부른 아이들이 교실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동안, 운동장에서 자전거를 타고 선생님을 놀려대며 논다.
더 재미있는 것은 <기쿠지로의 여름> 역시 다케시가 실제로도 놀며 찍은 티가 역력하다는 것이다. 기쿠지로의 장면에는 ‘잘 찍어야지’ 하고 마음먹은 진지한 모범생의 태도보다 상황의 즉흥성이 강하게 배어 나온다. 실제로 다케시는 오렌지 돌리는 처녀와 로봇 흉내를 내는 총각의 장면을 배우들에게 즉석에서 ‘잘하는 것 없냐’고 물어본 뒤 삽입했다 한다. 그러기에 기쿠지로가 선사하는 유머는 요절 복통의 웃음은 아니지만 느슨한 여백이 살갑다. 그건 마치 재미있는 만화를 아무 생각없이 뒤적이며 킥킥거릴 때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만화처럼 다케시는 깊이감 없는 화면에 설명적인 상황과 동선을 아예 생략해버린다. 다케시는 여기에 개구리, 자동차 바퀴, 잠자리 같은 이질적인 시점을 끼워넣고 컷을 역전시키는 편집으로 관객의 기대를 뒤엎는 장난을 친다(예를 들면 경마장 장면에서 다케시는 마사오의 모자를 때리는 기쿠지로를 보여준 뒤, 바닥에 앉아 있는 마사오의 컷을 붙인다. 기쿠지로는 마사오의 머리를 때린 게 아니라 단지 모자를 때렸을 뿐이다). 다케시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상처받은 아이는 놀아야 치유가 된다. 마사오는 바닷가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한 뒤 더이상 나쁜 꿈을 꾸지 않는다. 그러기에 스스로를 낮추어 푼수기 넘치는 바보가 되어서라도 다케시는 한껏 신이 난다.
좋은 코미디언은 사람들을 웃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마음을 위무해 준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서세원 같은 개그맨보다 배삼룡이나 이주일 같은 코미디언에게 더 위로받는 이유일 것이다. <기쿠지로의 여름>은 다케시의 필모에서 <키즈 리턴>과 함께 가장 이질적인 영화세계를 보여준다. 스타일은 지극히 다케시적이지만 더이상 폭력에 대한 강박관념은 보이지 않는다. 만담가 비트 다케시는 슬랩스틱 코미디언 다케시가 되어서야 사람을 위로하는 영화를 찍을 줄 알게 된 것이다. 입으로 시작하여 몸으로 사람을 웃기게 된 다케시. <기쿠지로의 여름>은 허술함을 여백으로 바꾸는 마법사 다케시의 뭉클한 로드무비인 동시에 근원적인 것을 상실한 모든 이들에게 베푸는 다케시의 신나는 놀이치료기도 하다.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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