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 밤 <친구>를 보러 갔다. 영화 시작 전부터 신랑은 매우 행복해 했다. 여기저기 하도 크게 광고가 나서 벌써 개봉한 줄 알고 극장에 갔다가 허탕치고 <천국의 아이들>만 보고 돌아온 지 며칠 만에, 운좋게도 시사회에 초대된 것이다. 우리가 처음 만나 극장에서 본 영화는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인데, 그는 아직도 이 영화를 세상에서 가장 쓰레기 같은 작품 1위 자리에 올려놓고 있다. <왓 위민 원트>를 저주하고 <파니핑크>를 발로 밟아버리는 그가 공공연히 꼽는 최고의 영화는 단연 <지존무상>이다. 그리고 <유령>과 <첩혈쌍웅>에 경의를 바치며 <록키>와 <정무문>을 숭배한다. ‘사나이’, ‘의리’, ‘고독’, ‘승부’, ‘혈투’ 등은 그를 바로 미쳐버리게 만드는 단어들이다.
“롤라장”(절대 “롤러 스케이트장” 아님)에 감동하고 유오성의 카리스마에 기절하고 장동건의 눈빛에 다시 깨어나는 사이 줄거리 파악도 완전히 못한 채 영화가 끝났다. 신랑의 반응이 궁금해 힐끗 쳐다보는데, 그는 감격에 찬 표정으로 느닷없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소리까지 질렀다. “<대부>보다 낫다!” 놀란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는데도 아랑곳없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의 열변은 불이 붙었다.
나: 왜 하필 <대부>야?
신랑: <대부>도 지네 동네의 룰에 따라서 사는 마피아 패거리들 얘기잖아. 거기에 뭐 이태리 전통인지 시칠리아 정선지 뭐 그런 거 들어가고. 그래서 다 한 패밀리였지만 결국 등 돌리는 놈들 생기고. <친구>도 마찬가지야. 건달들의 룰이 있고, 부산 그 동네 정서가 있고, 다 한 친구들이었지만 죽고 배신하고….
나: 난 좀 유치하던데?
신랑: 이태리 마피아놈들이 지네 흔한 공동체를 뭐 예를 들어 필리오레니 뭐니 부르면 우리 보기에 근사하잖아. 건달들 의리가 왜 유치해. 알고보면 한없이 멋있는 거지.
니: 마지막 “쪽팔리잖아”는 뭐야?
신랑: 말 잘했어! 그 “쪽팔리잖아”야말로 이 영화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대단한 대사야! 그 한마디로 다 끝나는 거야! 준석(유오성)인 꼬붕들이 동수(장동건) 죽인 걸 몰랐지. 하지만 자기가 덮어쓰는 거야. 왜냐! 준석인 부끄러웠거든. 자기가 동수를 못 지켜준 게 말야. 그리고 자기 수하들이 저지른 일을 자기가 몰랐다는 것도 그렇고, 동수가 겨우 하빠리 피래미들 손에 죽은 셈이 된다면 자기나 동수나 너무너무 쪽팔리는 거지. 자길 위해서도 동수를 위해서도 준석인 그걸 뒤집어써야 했던 거지. 그게 진정한 건달들의 의리야!
그는 명동에서 분당까지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사자후를 토해냈다.
원고를 쓰려는데 아무래도 줄거리가 석연찮아 편집부에 전화해 물어보다가 나는 신랑의 해석이 왕창 다 틀렸음을 알게 됐다. 준석은 동수가 죽는 것을 몰랐기는커녕 직접 지시한 당사자였다. “쪽팔리니까”도 그런 의미는 도저히 아니었다.
그날 저녁 집에 와서 또 <친구> 얘기를 시작하는 신랑의 말을 자르며 나는 말했다. “준석이가 동수 죽인 거라던데? 자기 해석 다 틀렸어.” 일순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누가… 그래?” 누가 그랬는지 알면 가만 안 두겠다는 투였다. “<씨네21>.” “<씨네21> 누구?” “남… 동철.” “또?” “김혜리.” 무시할 수 없는 이름들이 나오자 그는 잠깐 괴로워하더니 말했다. “감독이 직접 말하기 전엔 믿을 수 없어.” “감독이 그렇게 말했다던데?” “그건 또 누가 그래?” “이영진.” 그는 잠시 뒤 다시 말했다. “그건 감독이… 각본의 의도를 잘 몰랐던 거야.”
나는 케이오 펀치를 날렸다. “감독하고 각본이 같은 사람인데?”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작가도 미처 몰랐던, 관객의 탁월한 해석이라는 게 있는 거야. 감독이 몰라서 그래. 내 해석이 맞아.”
말도 안 되는 걸 끝까지 우기는 그를 보자 내가 괜한 얘기 꺼냈나 싶기도 했다. 하긴 저 사람은, 학창 시절 체육복이 없어 쭈뼛거리던 자기에게 “우리 반씩 입자”며 바지를 벗어준 어떤 친구를 아직도 추억하는 사람인데. 사업이 망했다고, 동생한텐 비밀로 하고 돈 좀 빌려달라는 친구 형한테 수천만원을 대출받아 꿔줬던 사람인데. 그러다가 나한테 들켜서 “당신이 무슨 영화 주인공인 줄 아냐, 주제나 파악하고 꼴값을 떨라, 꼴같잖게스리 의리 좋아하네”, 하는 욕을 아직까지 듣고 있는 사람인데. 그러고도 후배들의 “형님” 소리 한마디면 한달 식비보다 훨씬 많은 술값을 그냥 긁어버리는 사람인데. 잠옷도 아닌 러닝셔츠 바람으로 허벅다리를 벅벅 긁으며 TV나 보는 저 소시민의 가슴 한구석에, 북만주 말달리는 사나이들의 의리에 대한 동경이 있다 이거지. 머릿속으론 자기가 바로 로키고 주윤발이고 준석이라 이거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어린아이의 산타클로스 꿈을 깨버린 야박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남자들도, 여자들의 신데렐라 판타지만큼이나 유치하면서도 절실한 그런 동화를 품고 사는 거였다.
오은하/ 대중문화평론가 oheunha@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