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생·크리스티앙 쇼보 분장학교 수료·<베이비 세일> <미술관 옆 동물원> <질주> <소풍> 분장. <선물> 의상
“이혼하자.” “못해. 쪽팔려서.” 이제는 이혼밖에 남은
게 없는 부부, 극과 극에 선 부부, 아내는 흰 옷을, 남편은 검정 옷을 입었다. 아내의 죽음을 모른 척하는 남편과 길거리에서 여러 번
쓰러지고도 남편은 모르리라고 생각하는 아내, 둘 사이에 비밀이 없어진 어느 날. 아내는 “그런다고 내가 당신이 좋은 남편이라고 할 것 같냐”며
퉁명하게 튕긴 뒤, 우물쭈물 나가는 남편의 뒤에다 대고 말한다. “오늘은 여기서 자라”고. 서로 등을 돌리고 누워 있어도 우리는 안다.
그들이 이미 화해했음을. 그들은 둘다 하얀 옷을 입고 있다.
“의상하는 사람들이 스탭25시 나온 것 보면 뭐라고 할 것 같다.” 이유경씨는
8년 동안 영화계에 몸담아왔지만 의상으로는 크레디트를 처음 올렸다. 8년 동안 그가 한 일은 분장. 의상에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이가
더 들기 전에 하고 싶은 것 해야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바람을 알고 있던 아트 디렉터가 제안을 해왔다. 그래서 의욕도 앞섰다. 용기(이정재)와
정연(이영애)은 20번 정도 옷을 갈아입는다. 연결 신이 아니면 똑같은 옷을 입고 나오는 적이 없다. 협찬받은 옷들을 위해서 열심으로 갈아입은
것이 아니다. 그들 사이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긴장관계는 집에서 입는 옷도 열심히 갈아입도록 했던 것이다. 모두 하나같이 무릎 나온 후줄근한
바지와 목 늘어진 면티이긴 하지만. 개그천왕 장면을 찍으러 부산에 내려갔을 때는 의상 짐이 그 많은 촬영 장비를 압도할 정도였다. 동대문과
남대문, 벼룩시장을 샅샅이 뒤져서 마련한 70년대 옷 40벌을 마련하고, 애들을 줄세워서 일일이 입혔다. 이런 촌스러운 스타일이 싫다고 까탈부리는
애들을 달래가면서. 옷은 촬영기간 내내 보관하면서 드라이클리닝도 맡기고 손빨래도 해야 한다. 정연이 하던 빨래는 소품이지만, 정연이 신은 양말은
그가 챙겨서 신겨준 것이다.
캐릭터를 의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처럼 보이는 데 의상이 묻혀가도록
했다. 관객이 의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그래서 속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들 옷이 스토리에 녹아들어가지 않고 튀게 되는 경우에는 후회가
된다. 친하게 지내던 이웃에게 레스토랑에서 정연이 밥을 한끼 사는 장면, 정연은 목까지 채운 하늘색 가디건을 입고 있다. 하지만 블라우스에
조끼나 파스텔 톤의 니트를 입히는 게 어땠을까 생각된다. 그것의 차이는? 블라우스가 가련한 정조를 더 강조할 것이다. 개그맨 용기는 알록달록한
홍과 녹 스타일- 일명 홍록기 스타일- 로 몸에 딱 붙고 튀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평상시 모습이 튀면 개그가 죽지 않을까 하여 무난하게
갔다. 가족이 모여서 가족사진을 찍는 장면, 갑작스런 호출에 달려온 용기는 뒤가 약간 들린 하늘색 재킷을 입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찍힌 가족사진에서
하늘색은 느닷없는 화해의 따뜻함을 더한다. 이유경씨는 현장에서 여성답지 않다고 ‘꺼칠이’로 불렸다. 개그맨 철수가 대기실에서 “오늘은 왜 이렇게
꺼칠하지, 꺼칠이∼” 할 때 영화를 같이 보던 스탭들이 모두 웃었다. 시절은 보답받는다. 돌려줘야 할 옷, 내가 입지 않은 옷, 내 것이 아닌
옷들이 한참이나 쌓였는데, 그중 몇개를 잃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 옷들이 영화에 어울려 웃고 있다.
글 구둘래/ 객원기자 anyone@cartoonp.com
사진 이혜정 기자 hy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