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시나리오를 쓴 게 200여편쯤 돼. 뭐가 어떻게 잘렸는지는 기억 못하지. 그냥 통과된 거는 거의 없었으니까. ‘반려’ 아니면 ‘개작’ 아니면 ‘부분수정’ 중 하나였어. 폭력이 많다, 야하다 뭐 그러는데 사실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런데 당시에는 중앙정보부 직원이 상주하면서 검열관들에게 일일이 입김을 넣었다고. 저거 잘라라 하고. 그러니까 더 복장이 터지는 거지. 그 사람 한마디에 시나리오를 새로 고쳐야 하게 되면 촬영이고 뭐고 모든 게 올 스톱이었으니, 원.”(윤삼육·시나리오 작가)
1970년
한국사회학대회 연구 결과, 아내우위형 가정이 남편우위형 가정보다 경제적 성취도, 성적 만족도가 더 높은 것으로 조사. ‘슈퍼우먼’과 ‘여성상위시대’가 한해 가장 널리 퍼진 유행어. 장발족 일제 단속. 최고 하루에 400명 이상 적발된 적도 있음. 외국인 장발족에겐 입국불허 방침이 내려짐.
1년 동안 제작된 한국영화는 모두 189편. 이중 ‘여인’(30편), ‘팔도’(8편), ‘명동’(7편), ‘아빠’(6편) 등의 단어가 들어간 영화가 많아, “여자 좋아하는 팔도 사나이가 명동과 홍콩에서 놀아났다”는 식의 한국영화를 향한 비아냥 듬뿍한 우스갯소리가 터져나왔다. “손수건 값이 아깝다”, “왈가닥 코믹”, “허풍선이 검객류” 등의 표현도 이때 만들어진 표현. ‘수중섹스’, ‘차중(車中)섹스’ 등의 신조어도 검열의 소재 제한으로 갈 길이 뻔한 한국영화가 노출에서 쥐구멍을 찾은 결과 탄생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검열의 욕심이 끝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여기 있다. 주인공을 죽여야 사는 기구한 운명의 영화, 유현목 감독의 <두 여보>가 그런 경우다. 어찌하여 두 남편을 거느리게 된 한 여인이 둘 중 누구도 택하지 못하고 보름은 전 남편과, 나머지 보름은 또 다른 남편과 보내면서 살게 된다는 줄거리의 이 영화는 애초 한 주간지에 실렸던 실화를 바탕으로 각본을 쓴 작품. 작가였던 신봉승씨는 “처음 들었을 때부터 쇼킹한 뉴스였다”고만 기억한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확인한 당시 문공부의 검열위원은 한 여자가 두 남편을 거느리는 것은 사회정서상 불쾌감을 줄 수 있다며 “그녀를 결말에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주인공을 마지막에 죽여버리는 처사는 결국 작가나 감독의 역량 부족으로 여겨져 끔찍이도 싫어했던” 유현목 감독은 결국 부정한(?) 여인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밖에 없었다. 허구의 그녀가 또 다른 시대적 허구에 의해 단죄를 당한 셈이다.
1973년
인구억제를 위해 낙태합법화 법안 발효. 여성의 24.6%가 술을 마신다는 통계를 두고 사회가 불안하다는 엉뚱한 평가가 나오기도. 일본 관광객들의 기생파티 기승. 블루진의 청년들, 거리 점령.
72년의 유신선포로 뒤숭숭했고, 74년의 긴급조치를 앞두고 하 수상했다. ‘우울하다’는 말이 유행어 목록에 오를 정도였다. 15년 넘는 가위질을 자처해 온 터라 “이제는 눈빛만으로 삭제장면과 분량까지 지적할 정도였던” 중앙정보부의 아무개씨에게도 하길종 감독은 여간 끈질긴 풋내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주인공과 한집에 사는 첩, 가정부, 동성애인 등의 난삽한 애욕 구도를 펼친 데뷔작 <화분>으로 가위맛을 톡톡히 봤지만, 그는 “사회적인 정서상 받아들일 수 없는 지나치게 어두운 복수극” <수절>을 들고 나섰다. 자신을 기다리던 아내와 딸이 도읍의 성주에게 강간당한 것을 안 남편이 전쟁에서 돌아와 복수하려다 죽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시대극으로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검열관이 보기에 그의 사상만큼은 여전히 불온하고 삐딱해 보였을 것이다. 20여분의 분량은 그렇게 또 잘려나갔다. 2년 뒤. <바보들의 행진> 때도 그와 그의 영화의 수난은 계속됐다. 그들 눈엔 장발족들이 득실대고 흥청망청하는 것으로만 보였을 <바보들의 행진>은 무려 5번의 퇴짜를 맞은 다음 최종 검열과정에서도 30분 분량을 난자당했다. 그로부터 4년 뒤. 서른여덟이라는 젊은 나이로 그가 요절한 건 무기력한 시대에 대한 그의 극적인 발언이기도 할 것이다.
1976년
면학기풍 조성을 위해 교원임용제 실시. 학도호국단의 내실화 방침 마련. 청소년범죄대책협의회 발족. 대한극장, 원인모를 화재 발생. 공연법 개정으로 형식적인 민간심의기구인 공연윤리위원회 발족. 90여편의 한국영화 개봉작 중 전국관객 10만명 이상 동원작품 없음.
검열은 하이틴영화라고 마다하지 않았다. 그해 교육의 최대 역점은 청소년 범죄 근절과 학원기풍 조성. 청소년들의 탈선, 비행 등을 부추기는 이른바 ‘잘 노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은 여지없이 눈총의 대상이 됐다. 문여송 감독의 하이틴 로맨스영화 <진짜 진짜 미안해> 역시 면학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검열과정에서 작품 전체가 반려되었으며, 결국 창작자가 문제의 장면을 자진 삭제해서 재차 심의를 받은 뒤 상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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