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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근원을 오해하고 있는 공포영화,<폰>의 오류와 실수(2)
2002-08-08

공포,번짓수가 틀렸다

공포의 공간, 인색한 활용이 공포를 반감시킨다

호정과 창훈 부부가 새로 구입한 저택, 죽은 여고생의 시체가 감추어져 있는 그 저택이 영화 속에서 전혀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영화 <폰>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원혼은 분명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줄 중개자로 더없이 적격인 직업을 가진 지원을 곁에 불러들였다. 귀신들린 집은 생명력을 지니고 집안 어디에나 편재하는 귀신의 존재를 환기시킬 때만이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집은 어서 뛰쳐나가고 싶은 곳이거나 숨겨진 비밀을 찾아 인물들이 집요한 탐색을 벌이는 그러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휴대폰의 ‘광역성’과 귀신에 의한 희생자 선택의 무작위성은 자꾸 지원의 발길을 엉뚱한 곳으로 향하게 만든다. 지원은 좌표없는 장소를 찾아헤매는 존재이다.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휴대폰 벨소리와 노트북 화면에 뜨는 괴이한 메시지로 대치해놓은 것이 장르의 성공적이고 현대적인 변용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그토록 널찍한 집을 무대로 삼았으면서도 감독은 공간의 특성을 효율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실패하고 있다. 이 영화의 대부분의 공포효과는 심도 얕은 화면과 진부한 포커스 이동이 창출해내는 눈속임에 기반하고 있다. 한갓 만성 딸꾹질 환자들을 위한 치료제에 불과한 ‘깜짝 효과’들이 스크린과 스피커로부터 지겹도록 터져나온다.

감독은 전작 <가위>에서 휴대폰 화면으로부터 손 하나가 솟아나와 희생자의 눈을 뽑아내는 모습을 다소 어색한 특수효과로 보여준 바 있다. 스크린은 환영들이 펼쳐지는 공간이라는 암묵적인 약속을 깨고 갑자기 스크린을 넘어 관객을 향해 달려드는 무언가가 있을 때 공포의 감정은 극대화된다. 이것은 공포영화 제작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지녀보았을 한없는 이상이다. <링>의 귀신이 텔레비전 모니터를 넘어 희생자에게 다가오던 장면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이상을 반영한 영화들의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 웨스 크레이븐의 <영혼의 목걸이>와 <스크림> 연작, 존 카펜터의 <매드니스>, 토비 후퍼의 <폴터가이스트>, 그리고 레니 할린의 <나이트메어4> 등등. 영화 <폰>에서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와 비현실적인 환영으로서만 그 존재를 드러내던 원혼의 시체가 마침내 지원을 통해 발견되어 바닥에 쓰러진 호정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오는 순간의 묘사만큼은 탁월하다. 이는 파열하는, 혹은 현실로 확장되는 스크린의 이미지를 적절히 변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은 아무것도 아님, 비어 있음, 무가치성, 환영, 완벽한 죽음 그 자체가 존재를 뒤덮으며 엄습해오는 순간이 아니다. 스크린에 재현된 귀신이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조건 가운데 하나는, 그 귀신에 의한 죽음이 존재의 완전한 박탈, 사후 구원의 가능성까지도 완전히 소거시켜버리는 진정 저주스러운 죽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귀신의 존재 자체가 거꾸로 죽음의 공포를 경감시키는 역할을 떠맡게 되는 우스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를테면 <엑소시스트>에서 악령을 퇴치하기 위해 스스로의 영혼을 악령에게 내맡겨야 하는 딜레마에 처한 신부의 죽음이 바로 그러한 죽음이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폰>은 다소 미심쩍다. 유령의 집 관람은 끝나가고 빛이 들어오는 입구가 저만치 보인다.

"공포란 무엇인가?" "관심없음!"

안병기 감독은 윌리엄 프리드킨의 <엑소시스트>가 유발하는 공포의 원천이 악령들린 소녀 리간의 기괴한 몸뚱이에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과연 그럴까? 악령을 퇴치하기 위해 결국 자신의 영혼- 기독교적 사유에서라면, 존재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질- 을 악령에게 내맡길 수밖에 없는 신부의 딜레마가 없었다면 <엑소시스트>의 공포는 그저 피상적인 것에 그쳤을 것이다. 여기서 존재의 뿌리를 파고드는 공포는 구원의 불가능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폰>에서 귀신들린 아이의 몸짓은 참으로 ‘엽기적인’ 볼거리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

<폰>은 공포영화 장르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기보다는 친숙한 공포의 소재들을 가지고 ‘유령의 집’을 구성하는 데 훨씬 공을 들인 영화다. <폰>은 공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이건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말이지 감독의 관심은 ‘공포’가 아니라 ‘공포영화’에 놓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관객에게 ‘잘 먹힌’ 공포영화들을 어지러이 끌어들여, 우리로 하여금 이미 익숙한 체험을 다시 한번 반복하게 만든다. 이 체험은 다른 게 아니라 분명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번지점프 줄에 매달리고 자이로드롭에 올라타는 이들이 기대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필름으로 찍혀졌고 필름조각들의 조합이 일련의 서사적 이미지들을 구성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폰>을 영화라 불러야 할 것인가? 따라서 이 글은 한 영화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올해 새로 선보인 놀이기구에 대한 시승기(試乘記)이다. 개인적으로는, 거의 졸음이 쏟아질 만큼 지루했다.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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