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3일부터 주말하루 평균 4편, 뭐가 현실이고 뭐가 판타지냐
내 여자친구 뮤즈와 그녀의 러시아인 친구 스베타,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은 하루에 평균 네 작품씩 보며 주말 내내 함께 영화 속에 파묻혀 지냈다. 이제 현실은 거의 완전히 사라져버린 듯하다. 물론 상영된 영화들 모두가 엄격한 의미에서 ‘판타지’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물론 현실의 상상적인 재현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영화는 일정 정도 판타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그렇다, 그래서 나는 다큐멘터리에도 이러한 등식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좀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견지에서 보면 영화제 동안 상영된 작품들 중 상당수가 사실 보통 ‘판타지’라고 불리는 범주의 바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거린다 차다의 <슈팅 라이크 베컴>이나 미친 듯이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한쌍의 만담꾼을 다룬 훌륭한 오사카 코미디극 후지타 요시야스의 <삐-삐-형제> 같은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사실 아마도 올해 부천판타스틱영화제의 상영작 중 겨우 반 정도가 엄격한 의미에서 판타지물이라고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문제가 된다고는 개인적으로 절대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정말 판타지라는 것이 판타지다워지려면 무엇보다도 자유로워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이는 우리의 상상을 제한하는 습관과 장르의 제한, 편협한 정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면에서 주위의 일반적인 기대라는 부담으로부터 벗어난 예측 불가능성으로 인해 PiFan은 더욱 판타스틱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자유로운 판타지의 혼합물에 ‘섹스’라는 주제를 추가하면 영화제의 판타지 레벨은 “뭐냐면∼” 하고 머뭇거릴 틈 없이 빠르게 치솟을 것이다. 우리의 가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판타지와 욕망을 물리적으로 표출해내는 것이 바로 섹스 아니겠는가? 그래서 리처드 켈리의 무진장 뛰어난 SF 십대스릴러물 <도니 다코>나 폐막작인 안병기 감독의 공포영화 <폰>만큼이나 해리 싱클레어의 섹스코미디 <토이 러브>와 뉴욕의 사이버섹스에 대한 탐구라 할 <온-라인>이, 말하자면∼흠∼, ‘흥분되는’ 것이다. 나는 특히 <토이 러브>와 <온-라인>이 한때(혹은 때때로) 우리가 미친 듯이 골몰하는 애정(혹은, 음란) 생활의 상처뿐인 영광과 그 속에 존재하는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에로틱한 긴장과 혼동을 조롱하는 방식에 마음이 끌린다.
마찬가지로 아마도 올해는 PiFan 사상 가장 ‘게이적인’ 해로 기록될 듯한데 좀더 안전하고(?) 보수적인 부산국제영화제보다는 저만치 앞서 있다는 느낌이다. 동베를린 출신으로 자신의 흑인 밴드 ‘슈가 대디’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드랙 퀸에 관한 존 카메론 미첼 감독의 록오페라 <헤드윅과 앵그리 인치>로부터 쿠차 형제의 초강력 게이 단편들에 이르기까지, 담장 건너편에 있는 또 다른 성적 취향을 가진 이들에게는 넘치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미이케 다카시의 <블루스 하프> 같은 작품에서조차 이야기 속에 억눌린 게이 야쿠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영화제 기간 중 가장 즐거웠던 순간 중 하나는 영화 <온-라인>에서 늙은 뉴욕의 드랙 퀸이 시골에서 올라와 그를 찾아온 귀여운 소년을 노골적으로 더듬는 장면인데, 이 장면에서 거의 겁에 질리다시피 경악하는 한국 관객의 일치된 반응에 극장 안의 모든 외국인 관객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또 다른 잊을 수 없는 기억은 남부 캘리포니아의 산페르난도 벨리에서 온 로버트 스티븐스를 (혹은 엔젤 벤튼으로 알려진) 만난 것이다. 이 사내는 브리트니 스피어스 닮기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뒤 영화 <브리트니 베이비, 원 모어 타임>의 주연으로 발탁되었다. 이 영화 역시 게이영화인데 이번 영화제 기간 중 최대 히트작 중 하나였다. 그가 브리트니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아주 중요한 질문을 그에게 먼저 던졌다.
“그거, 진짭니까?”
”오∼우, 그럼요, 분명히 진짜지요.”
그는 산페르난도 지역 여성들 특유의 달짝지근하고 높은 톤의 음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걔가 한 건…, 패드를 대서는 쭉 눌러 올린 거예요. 요렇게….” 나는 다 큰 사내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는 몸을 꿈틀거리는 모양새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영화 속에서 일본어로 통화를 한다는 점 역시 인상적이었는데 알고보니 그는 도쿄 디즈니 랜드에서 피터 팬 역으로 일하며 9개월을 보냈다고 한다. 나는 “웬 피터 팬? 내 생각에는 팅커벨 역이 당신 취향인 것 같은데”라고 당연히 되물었고, 그는 “글쎄, 한번은 팅커벨 역을 하는 얘한테 내가 널 확 쫓아내 버리고 그 역을 맡을지도 몰라라고 말했더니, 그랬다가는 디즈니랜드에서 영원히 쫓겨나버릴 거야라고 말하더라구요” 하고 그는 애교스럽게 웃으면 대답해 주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게이판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곳이 이 세상의 허다한 곳 중에서 대한민국의 부천이라는 점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7월16일 화요일 저녁쇼킹, 포르노하지만 영화제 중에서 의심할 나위 없이 가장 쇼킹한 게이의 순간은 ‘블루무비 특별상영’ 중에 상영된 1930년대의 단편 포르노영화 <피콜로 피트>의 클라이맥스인 두 성인 남성들 사이의 노골적이고도 클로즈업된 펠라치오 장면이 아닌가 싶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요하네스 쇤헤르가 큐레이터를 맡은 이 미국과 독일산 국제단편포르노 모음 프로그램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에서는 최초라고 할 만한 경험을 선사했다. 진짜 하드코어 포르노가 극장에서 공식적으로 상영된 것도 처음이려니와 구강성교는 말할 것도 없고 수간(獸姦)에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집단성교까지 포함하고 있으니 말이다. 당연히 이 프로그램은 영화제 전체에서 가장 촉망받은 세션이었는데 소사구청 소향관을 진짜 포르노 극장처럼 야한 포스터와 번쩍이는 조명으로 치장하고 음악가 달파란이 섹시하고 부드러운 하우스 뮤직을 무성 단편영화의 상영 중에 연주하도록 한 주최쪽의 노력과 기지에 찬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이번 행사나 과거 그가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의 사운드트랙을 맡았다는 점을 통해 왜 그가 자신을 ‘파란’ 달이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행사를 앞두고 공권력에 의한 관계자들의 구속사태 등이 사전에 논의되었는데(내가 행사를 며칠 앞두고 영화제 집행위원장인 김홍준씨에게 감옥에 갈 준비가 되었냐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며 “물론, 그러면 난 아마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될 거야”라고 답했다) 때문에 관객 모두는 입장 전에 자신들이 순수하게 학술적인 관심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임을 밝히는 진술서 양식에 기입해야 했고 자신들이 법적으로 성인임을 입증하기 위해 신분증을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모든 행사가 끝나고 객석에 다시 불이 들어 왔을 때까지 파란 경관복의 사내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리고 너무나 놀랍게도 한국의 도덕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한국사회가 폭발해서 잿더미 속으로 사라지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거기 모두 예전 그대로 안전하게 생존해 있었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성에 대한 금기들에 지나치게 민감한 태도를 뒤흔들며 한국사회가 다시 작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는 사실이었다.
행사가 끝난 뒤 우리 모두는 소사역 부근 부천의 명소 둘리공원에 모여 바비큐 파티를 벌였고 다들 몹시 취해버렸다. 프로그래머 김영덕은 요하네스와 함께 다소 길게 늘어지고 지겨웠던 세미나에 붙잡혀 있던 서울 여성영화제의 프로그래머 주유신과 함께 들렀는데, 주유신처럼 (분명하게) 요하네스의 편에 서 있는 인사가 아니라 포르노 규제쪽의 입장을 대변하는 누군가가 토론에 참석했더라면 더 재미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석자 중에는 망가진 기타를 가지고 훌륭한 연주를 들려준 붕어라는 이름의 한국인 아나키스트도 있었고 트로츠키와 기똥차게 닮은 독일인 마오주의자도 있었다. 이번 영화제 최대의 히트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가공할(?) 북한 테크노 뮤직비디오 <평양 로보걸>의 핀란드인 공동감독인 요우닌 호카넨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나에게 북한 사람들이 이 작품을 얼마나 싫어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재미나는 일화들을 들려주었는데 너무 취한 나머지 그의 다른 이야기들은 하나도 기억이나지 않고 그가 북한 영화수출입공사의 유럽 지부장 석모씨를 계속 “Mr. Suck”이라고 부른 것만 생각난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회가 되는 대로 무조건 이 영화를 보라는 것이다. 가히 천재적인 걸작이라 할 만하다.
7월 18일 목요일 밤글쓰기는 이제 그만, 부천이 나를 부른다
이제 독자들에게 혼다 류이치의 사이키델릭 야쿠자영화 <도교 파라다이스 이별의 블루스>나 피터 잭슨의 논란 많은 가짜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 등 내가 영화제에서 본 다른 훌륭한 작품들이나 요하네스가 토요일 밤 나의 모텔 방에서 특별히 선별된 게스트에게만 은밀히 보여준 50년대산 일본 포르노같이 영화제 바깥(?)에서 발견한 다른 작품들에 대해서 좀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해디 마마나 슈가 도넛, 어어부프로젝트 등과 같이 페스티벌 중에 내가 본 훌륭한 한국의 인디밴드들 이야기를 좀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 일기를 위해 정해진 분량을 훨씬 초과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말았고, 공식적인 마감 시한도 놓친 지 오래다.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영화제는 아직 삼일이나 더 남았고, 나는 당장에라도 영화제의 공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시온 소노의 <자살 클럽>이 대단하다는 소리도 들리고, 오비타니 유리의 비디오 프로젝트 모음인 <골목길의 아이>도 훌륭하다고 한다. 그리고 토요일 밤의 <폰>도 놓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지금 나는 서울의 <씨네21> 사무실에서 이 빌어먹을 컴퓨터 자판을 쳐대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이제 그럭저럭 다 써나간 것 같다. 미친놈이라고 날 욕하려면 해봐라. 하지만 부천으로 가능한 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이 욕구를 억누를 수 없다.
왜냐하면!… PiFan은 삶보다 아름답기 때문이다. 스콧 버거슨/J.Scott Burgeson
번역 권재현
▶ 굿바이 부천, 어게인 2002
▶ 메가토크 제 1장 : 미이케 다카시 vs 김지운
▶ 메가토크 제 2장 : 할리우드, 한국영화를 주목하다:한국영화의 리메이크
▶ 메가토크 제 3장 블루무비 특별상영 및 세미나: 검열과 극장
▶ ‘국제문화건달’ 스콧 버거슨의 9박10일 부천방랑기 (1)
▶ ‘국제문화건달’ 스콧 버거슨의 9박10일 부천방랑기 (2)
▶ ‘국제문화건달’ 스콧 버거슨의 9박10일 부천방랑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