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시장 점유율이 40%를 넘어서고, 한 작품에 100억원에 가까운 제작비가 투여되며, 아시아를 시작으로 세계시장을 두드리고 있는 한국영화의 위세는, 그 내실이야 어떻건 외양만큼은 실로 당당하다. 하지만 80년이 넘는 역사를 통틀어 가장 호기를 누리고 있는 한국영화도 10여년 전만 해도 보잘것없는 상황에 몰려 있었다. 60년대의 영화(榮華)를 뒤로 한 채, 돈이 되는 외화를 수입하기 위해 한국영화를 ‘의무적’으로 제작하면서 창의성과 역동성은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85년과 86년 영화법이 개정되면서 한국영화 의무제작 조항이 삭제되고, 영화수입이 자유로와지자 그나마 한국영화를 만들던 영화사들은 수입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88년 UIP를 필두로 할리우드의 직배가 시작되자, 더욱 좁아진 외화 선택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한국영화 제작은 더더욱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고사의 위기를 겪고 있던 한국영화에 갑자기 강력한 돌풍이 몰아쳤다. 1992년 개봉한 <결혼 이야기>가 그것이다. 서울에서 52만6천명을 동원했던 이 영화를 시작으로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완성도 높은 상업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장군의 아들> 같은 흥행작이 있었지만, 이 영화 이후 생겨난 흐름은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술보다는 흥행을 앞에 내세운 영화들이, 감독의 감성보다는 기획자의 이성으로 제작된, 그러면서도 ‘때깔’면에서는 이전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진 영화들이 잇따라 등장한 것이다. 한국영화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이때부터 다시 싹트기 시작했고, 대기업이 자본주로 등장했으며, 대학을 졸업한 이른바 ‘엘리트’들이 대거 영화계로 진출하면서 일거에 세대교체를 이뤄냈다. 한마디로 기획영화의 역사는 한국영화계가 산업화하는 데 가장 직접적인 공헌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한국영화계 지형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흐름 중 하나인 기획영화의 역사를 들춰보는 것은 향후 10년을 바라보는 망원경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편집자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1992년의 7월로 여행을 떠나보자. 장소는 서울하고도 종로의 피카디리 극장 앞. 최민수와 심혜진이 유쾌한 웃음을 짓고 있는 대형 간판 아래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매표소에서 출발한 줄이 종로를 향해 뻗쳐 있는 형국. 막 개봉한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서고 있던 20대 남녀 관객은 “한국영화인데도 굉장히 재밌대”라고 재잘거리고, 눈길은 ‘토요일 오후를 섹시하게’라는 카피에 박혀 있다. 당시 피카디리와 자매관 피카소, 그리고 강남 씨네하우스를 통해 그렇게 장기상영된 이 영화의 최종 성적은 서울관객 52만6천여명. 당시 역대 한국영화 흥행순위 3위에 해당하는 대기록을 세웠던 이 영화의 제목은 바로 <결혼 이야기>다.
이 영화는 폭발적인 관객몰이를 했다는 점뿐 아니라, 영화제작사와는 별도의 전문기획사인 신씨네에 의해 기획됐고, 여성 영화홍보 달인인 심재명(명필름 대표)씨에 의해 썩 잘 포장됐다는 점에서 당시에도 상당한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피카디리극장 앞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던 신씨네 신철 대표조차도 이 영화가 10년 뒤 일으킬 파장에 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대기업의 영화투자, 투자와 제작의 분리, 프로듀서 시스템의 확립, 획기적인 영화계 세대교체 등 현재 영화계의 구도가 확립되어나가는 작은 혁명의 뇌관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영화의 출현을 알기 위해서는 1988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 신씨네의 밤낮없는 고민은 결국 <결혼 이야기>를 낳았다. 오른쪽 사진은 <결혼 이야기>를 성공시키고 제작사로서는 첫 영화 <미스터 맘마>를 제작하던 1992년 여름의 신씨네 구성원. 이랫줄 왼쪽부터 오정완, 신철, 김무령, 유인택씨. 위 왼쪾부터 차승재, 김선아, 한명 건너 이문형, 오른쪽 끝은 권병균씨.
그해 9월 신철은 그동안 근무하던 명보극장을 떠나 독립을 꾀한다. 그는 극장 시절 알고 지내던 황기성 사장의 황기성사단 사무실의 한구석에 자리를 마련하고 한국 최초의 전문 영화기획사 신씨네를 꾸린다. “UIP가 직배를 하면서 한국영화는 멸망한다고들 했지만 나는 흥행될 것 같은 영화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 한데 제작사로 나가긴 어려웠다. 자본을 구할 수도 없었고, 제작경험도 없었다.” 기획사라는 위상은 일종의 우회로였던 셈이다. 또 피카리디와 명보극장의 선전실에서 근무하면서 관객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얻은 경험이 많았던 그였기에 관객 눈높이에 맞는 영화를 기획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한국영화가 이래야 한다는 둥 다소 관념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극장에서 관객을 상대하는 일종의 대고객창구 역할을 하다보니 그것을 극복하게 되더라.” 서울극장의 이준익(씨네월드 대표), 심재명씨나 단성사의 석명홍씨 등 초기 기획자 중 극장 선전실 출신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흥행 잘되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들을 거듭 겪어온 탓에 관객이 원하는 바를 남들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철 대표는 이렇게 극장에서 근무하면서 얻었던 관객에 관한 데이터를 당시 흔치 않던 286컴퓨터에 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는 곧 대학 연극반 선배인 유인택(당시 민족예술인총연합 사무국장, 현 기획시대 대표)씨를 통해 교육현실을 다룬 마당극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판권을 얻어 영화로 옮기는 기획을 시작했다. 30여명의 고등학생을 인터뷰하면서, 입시 때문에 목숨을 던지는 일이 빈번한 교육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을 수 있었고, 기획안을 짜 연출자 강우석 감독, 시나리오 작가였던 김성홍 감독에게 전달했다. 서울 15만명이라는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신철씨는 이를 바탕으로 제작을 향한 꿈을 향해 조금씩 전진한다. 90년에는 성폭행당할 위기에 있던 한 여인이 가해자의 혀를 물어뜯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름으로>(제작 예필름, 감독 김유진)를 기획하면서 제작에 부분적으로 참여했고, 다음해에는 소련, 동구권 붕괴를 바라보며 <베를린 리포트>(제작 모가드코리아, 감독·각본 박광수)를 기획해 제작에도 상당 부분 관여하게 된다.
1세대 프로듀서 3인 인터뷰-영화세상
대표 안동규
“감독이 100%인 시대는, 갔다”
90년대 초 기획영화 1세대로 꼽히는 데 당시 기획영화의
정체성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 지금 생각하면 모순이 있다. 신철, 유인택과 나는 조금 다르다. 나는 특별히 기획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하며 제작을
시작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때 기획영화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젊은 영화사 사장이 나온 게 처음이여서가 아닌가 싶다. 영화사 등록이
제한되던 시절엔 영화사 사장하면 다 60대였는데 90년대 들어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고 영화사 등록제한도 풀리면서 30대 사장들이
나왔다. 신철, 유인택, 안동규, 세 사람이 한꺼번에 영화사를 차리니까 기획영화라는 말로 묶어버린 셈이다.
대기업 자본이 들어온 것과 젊은 프로듀서가 등장한 것이 기획영화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거 아닌가.
→ 대기업 자본이 있었으니까 젊은 프로듀서들이 독립할 수 있었다. 신철, 유인택, 안동규는 전통 충무로 제작자의
끝자락에 있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기업에 비디오 선금을 받고 지방에 판권을 미리 팔아서 제작비를 마련했다. 지방
장사를 직접 했던 마지막 세대인 셈이다. 하지만 영화의 성격으로 보면 신철, 유인택과 안동규의 노선은 달랐다. 두 사람은
기획영화에 대한 믿음을 갖고 움직인 반면 나는 특별히 이전 세대와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내 경우는
오히려 요즘 기획영화의 개념에 철저하려고 한다. 믿을 건 시나리오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됐고 그런 점에서 시나리오 작가에게
많이 의존한다. 예전엔 영화는 100% 감독이 만든다고 여겼던 것 같다.
기획영화의 의의와 부작용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 대단한 의의나 부작용이 있겠나 싶다. 지금은 기획영화 아닌 경우가 드물지 않나. 이미 기획영화가 대세가 됐고
일반화됐다. 예전엔 감독 하나 믿고 가는 시대였지만 이젠 무슨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기획자의 아이디어가 있고 거기에 맞는
감독을 고르는 시대가 됐다.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비율로 봤을 때 80%는 기획영화인 셈이다. 예전엔 감독이 들고온
기획이 많았지만 이젠 프로듀서의 기획이 많아지는 식으로 역전된 것이다.
그런 역전이 긍정적이라고 보나.
→ 영화를 무엇이라고 보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익을 내는 상품이라고 여긴다면 긍정적이겠지만 정신을 만족시키는
창작물로 본다면 부정적일 수도 있다. 산업화라는 면에서 보면 긍정적이지만 반대편에선 부정적인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런 양면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시대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 르네상스 때처럼
예술가를 전폭적으로 후원하는 시대가 아닌 이상 기획영화가 대세일 수밖에 없다. 내 경우도 그런 양면성을 인정하면서 제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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