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잉, 그로잉 Glowing, Growing
감독 호리에 케이
출연 료 무라시마, 도다 마사히로
일본/ 2001년/ 92분
20대 중반의 남자 키미노부가 여자를 목졸라 죽인다. 사랑하던 여자가 자신의 사랑을 비웃으며 떠나려 한 데 분개해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다. 키미노부는 자살을 결심하고서 어릴 때 고향에서 졸개처럼 데리고 다녔던 20대 초반의 준을 찾아가 부추긴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태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자살할 권리가 있어. 자살을 통해 우리는 자유로워지는 거야.” 준은 힘센 남자들에게 맞고 다니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얼간이 소리를 듣고 채인 유약한 남자다. 어딘가 모자라기까지 해보이는 준은 ‘자유’라는 말에 마음이 끌린다. 둘은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서 안내한 해변가를 자전거를 타고 찾아나선다.
24살의 호리에 케이가 대학 졸업작품으로 만든 <글로잉, 그로잉>은 특이한 영화다. 불확실한 동기로 자살하려는 둘의 바보스런 여정을 뜻밖에 진지하고 슬픈 분위기로 끌고 간다. 특히 자격지심에 스스로 비장해지며 자살 결의를 다지는 준은 분명히 웃긴데, 영화는 감상적이고 슬픈 음악을 깔아준다. 중반이 지나면 그 의도가 드러난다. 자살동기가 좀더 분명했던 키미노부는 돌아가고, 특별히 죽을 이유없이 따라나섰던 준은 막다른 길로 간다. 그 역설 속에 일본사회에서 남자로 살아가는 게, 어떤 이들에겐 죽는 것만큼 두려운 일일 수 있다는 전언을 슬쩍 녹여넣는다. 신인답지 않게 능청맞은 연출이 인상적이다.
◆ 마지막 눈 なごり雪
감독 오바야시 노부히코출연 미우라 도모카즈, 스도 아쓰코
일본/2002년/ 101분
매듭을 짓지 못한 감정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떠났던 그 자리를 고집하며 대답을 기다린다. 겨울 끝자락에 매달려 녹지 않는 마지막 눈처럼. 이렇게 쓸쓸한 제목을 가진 <마지막 눈>은 열몇살에 시작된 어린 사랑이 오십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눈덩이처럼 다져진 사연이 목쉰 흐느낌으로 터져나오는 이야기다.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본 세 사람의 사랑. 끝나버린 줄 알았던 그 옛날이야기는 착한 사람들을 노래하는 기타 선율과 함께 멈춰 있던 시계를 돌리기 시작한다. 20년이 넘도록 함께 산 아내가 집을 나간 날, 유스케는 고향 친구 미즈타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미즈타의 아내이자 유스케와 애매한 첫사랑의 감정을 나눴던 유우코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 유스케는 28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유우코가 손목을 그었던, 고향에서의 마지막 밤을 떠올린다. <마지막 눈>의 감독 오바야시 노부히코는 광고감독으로 활동하다 1977년 공포영화 <하우스>로 데뷔했으며, 고향 오노미치를 배경으로 <전교생> 등 오노미치 3부작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신작 <마지막 눈>은 실험영화와 장르영화, 청춘영화 등을 두루 거친 노장의 성숙과 아직 버리지 못한 유치한 감성을 동시에 짐작하게 한다. 삶에 대한 어떤 기대도 남아 있지 않은 유스케는, 눈이 내리기를 소망하며 베갯속을 눈송이처럼 뿌리던 유우코의 애정을 비로소 깨우치는 것이다. <마지막 눈>은 결코 화려하거나 격렬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지만, 묻어둔 시간만큼이나 길게 끄는 여운이 있다.
◆ 데이곤 Dagon
감독 스튜어트 고든
출연 에즈라 고든, 라켈 메로노
미국
2001년/ 94분
공포영화팬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눈이 반짝반짝 빛날 3인방이 만났다. <좀비오> <지옥인간> 등을 연출한 스튜어트 고든이 감독을 맡았고, 이들 영화의 프로듀서이자 <리빙데드3> <소사이어티> 등을 감독한 브라이언 유즈나가 제작을 맡은 작품. 원작은 판타지호러소설의 대가 H.P. 러브크래프트. <좀비오> <지옥인간> 외에 켄 러셀의 <백사의 전설>도 그의 소설이 원작이었다. <데이곤>의 무대는 스페인의 한적한 어촌, 폭풍에 휘말린 요트가 암초에 부딪히자 배에 타고 있던 미국인들은 구조를 요청한다. 그러나 마을은 음산한 분위기에 젖어 있고 주민들은 좀비처럼 보인다. 호텔에서 일행을 기다리던 주인공 폴은 경악한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인간을 잡아 껍질을 벗겨 말려놓은 현장을 목격한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과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를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이미 15년 전에 기획된 작품. <좀비오>가 성공한 뒤 곧바로 제작에 착수하려다 스튜디오의 반대로 무산됐던 영화를 스페인의 자본과 인력을 지원받아 완성시켰다. 당시 스튜디오는 영화에 등장하는 식인인간을 흡혈귀나 좀비로 수정하길 원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저주를 받아 어류를 닮은 돌연변이가 됐다는 이야기가 다소 ‘낡은’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황폐한 마을에 고립된 남자가 식인인간들에 둘러싸이는 무시무시한 이미지나 데이곤 공주가 유혹하는 에로틱한 장면은 스튜어트 고든, 브라이언 유즈나 콤비의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 악마의 등뼈 The Devil’s Backbone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출연 에두아르도 노리에가, 마리사 파레데스
멕시코, 스페인
2001년/ 106분
“<디 아더스>와 비슷하게 야심적이고 지적인 영화지만, <디 아더스>보다 강력하고 설득력 있다.”(미국 평론가 로저 에버트) <크로노스> <미믹> <블레이드2>의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가 스페인을 무대로 찍은 유령영화 <악마의 등뼈>는 지난해 미국에서 <디 아더스> 못지않은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때는 프랑코의 쿠데타로 촉발된 3년에 걸친 스페인 내전이 끝난 1939년, 부모가 좌파였던 10살 소년 카를로스는 산타루치아의 어느 고아원으로 간다. 운동장 한복판에 불발된 폭탄이 남아 있는 황폐한 고아원, 이곳에서 카를로스는 유령의 속삭임을 듣는다. 카를로스는 자신의 침대가 참혹하게 죽은 소년 산티의 자리였다는 걸 알게 되고 복잡하게 얽힌 고아원의 비밀이 하나둘 드러난다. <악마의 등뼈>에서 유령은 단순히 관객을 겁주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첫 장면에 흘러나오는 독백은 “유령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끝없이 반복되도록 운명지어진 끔찍한 순간… 번번이 되살아 나타나는 죽은 어떤 것, 오랫동안 연기된 어떤 감정….” <악마의 등뼈>에서 유령은 스페인 내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스페인 역사를 연상시키는 강력한 상징이지만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봐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유연하고 우아한 호러영화.
◆ 삐-삐-형제 The Bleep Brothers
감독 후지타 요시야쓰
일본
2001년/ 102분
<삐-삐-형제>는 기이한 영화다. 여기는 외설스러움과 순정이 태연하게 얼굴을 맞대고 공존하는 세계다. 퇴폐적인 스트립쇼가 벌어지는 클럽은 인물들의 순수한 희망이 보존되는 공간인 반면, 공인된 대중적 유희의 공간인 방송사는 이들을 타락으로 이끄는 공간이 된다. 유명한 만담가가 되기를 꿈꾸며 스트립 클럽에서 인기없는 만담을 늘어놓던 두명의 형제가 우연한 기회에 방송사에 발탁되어 성공을 맛보고 다투고 화해하기까지의 과정이 영화의 기둥 줄거리다. 두 형제가 쏟아내는 외설적인 이야기의 대부분은 방송중에 ‘삐-’ 소리로 처리되어 거의 시청자들에게 전달되지 못하는데, 오히려 이것이 그들을 스타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들의 별명은 ‘삐삐 형제’. 그러니까 스타는 그들이 아니라 다름 아닌 ‘삐-’ 소리다. 감독은 미디어의 선정성과 속물근성을 적절한 유머와 함께 은근히 비꼬고 있다. 기발한 상황설정 및 진지하면서도 우스꽝스럽고, 순수하면서도 외설적인 대사의 묘미가 압권이다.
임범·남동철·김혜리·박은영·황혜림·최수임·김현정 유운성/ 영화평론가
■ 패 밀 리 섹 션
고양이 아가씨, 다람쥐의 입맛 다시네
올해 부천영화제가 가족 관객을 위해 마련한 오붓한 식탁에는 유럽의 북쪽에서 날아온세편의 동화와 한편의 절절한 가족드라마가 올랐다. <상처>는 노르웨이, 스웨덴이 합작한 아담한 가족드라마. 막 첫 키스를
맛본 13살 소년 빅터에게 스포츠맨이자 학교의 스타인 형 올레는 산 같은 영웅이다. 그러나 형에게는 빅터가 알지 못하는 무거운
비밀이 있다. 남들이 형을 대하는 태도가 어딘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빅터의 불안이 커져갈 무렵 올레는 빅터에게 자신이
진짜 형이 아니라고 말한다.
빈센트 발 감독의 네덜란드영화 <미노스>는 치명적인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랑스런 ‘캣 우먼’의 모험담이다. 순한 성품
때문에 화끈한 기사를 쓰지 못해 해고 위기에 몰린 신문기자 티베 앞에 강아지만 보면 나무를 타고 정원의 다람쥐에게 입맛을
다시는 이상한 아가씨 미노스가 나타난다. 그녀의 정체는 신비한 사고로 인간이 된 암고양이. 미노스는 숙식을 제공받는 대가로
온갖 비밀에 정통한 고양이들의 정보를 티베에게 귀띔해 그를 민완기자로 탈바꿈시킨다. 동물의 본능에 고착되지 않고 경험을 통해
인간성도 흡수하는 미노스의 유연한 캐릭터는, 감상 뒤 어린이들과 이야기해 볼 만한 화제.
러시아영화 <사냥꾼 페도>는 폐기물이 가득한 공터에서 할아버지 거지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로 시작한다. 순박한 사냥꾼 페도는고약한 황제와 귀족이 내리는 불가능한 과제로 죽음의 위기에 몰리지만, 새의 모습으로 날아든 현명한 여인의 도움으로 난관을
하나씩 돌파해간다. 고정된 카메라, 발레에 가까운 양식화된 연기가 이채롭다. 다소 잔인하고 노골적인 유머도 들어 있으니 고려할
것.
북구 민담의 냄새가 물씬한 핀란드에서 온 올리 사렐라 감독의 <롤리>는 사나운 롤리족과 그들에게 숲 속 마을을 빼앗긴 요정들의
반목이 용기있는 요정 소녀 밀리의 모험을 통해 조금씩 풀려가는 과정을 그린다. 이질적이고 낯선 존재는 분명 두렵지만 친구가
될 수 없거나 공존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교훈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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