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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곽경택 인터뷰 [1]
2002-07-05

˝김득구가 내내 무서운 눈으로 뒤통수를 쳐다보는 것 같았재˝

애초, 예비된 ‘파트너’는 따로 있었다. 그런데 곽경택(36) 감독은 제3자를 통해 완곡하게 거절 의사를 전해왔다. 친분이 없어서라는 이유는 간단했으나, 서글서글하기로 유명한 곽 감독의 답변치곤 의외였다. 심적 부담 때문인가? <챔피언>이 전국에서 800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던 <친구> 이후 내놓는 작품이니 이해못할 바는 아니었다. 관객과의 대면을 앞두고서 동료와 벌이는 스파링. 대부분의 감독은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를 바랄 테니까.

한동네 주민인데다 초등학교 2학년 딸래미들이 같은 학교, 같은 발레학원에 다니는 탓에 2년 전부터 곽경택 감독과 얼굴을 트고 지낸다는 박찬욱(39) 감독을 섭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렇다 해도 ‘덕담만발’ 토크는 곤란했다. “저를 고르셨다면 아무래도 한계가 있지 않겠어요?” 그는 알다시피 동종업에 종사하는 ‘이웃사촌’끼리 ‘격한’ 논쟁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니겠느냐며, “만나보기 전까지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면서 “녹음용 대본이나 하나 구해달라”고만 덧붙였다.

하지만 기우였다. 정작 인터뷰가 있던 날. “미준이는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쁘다”, “아닙니다. 어디 서우만 하겠습니까”, 딸들 이야기로 인사를 대신한 이들은 기대 이상의 파이팅을 선보였다. 박찬욱 감독은 순서대로 매 장면을 떠올리며 질문의 수위를 점차 높여갔고, 곽경택 감독 역시 부적절한 클린치 없이 매 순간 침착하게 대응했다. 두 감독이 벌인 2시간 남짓의 인터뷰는 대국을 마친 뒤, 복기하는 이들의 꼼꼼함을 연상시키기에도 충분했다.

Zoom-in

박찬욱 | 늦어서 미안해. 김지운 감독 만나러 가는 도중에 생각나더라. 오늘 인터뷰 약속이 있었구나 하고. 곧장 오긴 했는데, 좀 늦었네. 어제 시사회에는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나왔던데?

곽경택 | 왜, 코리아픽쳐스 김동주 대표가 다리를 안 다쳤습니까. 계단에서 넘어져갔고, 얼마 전에 철심박는 수술받고 그랬어요. 그래서 나보고 무대 올라가서 대신 인사 좀 해달라고 해서 챙겨입고 나갔심다.

박찬욱 | 난 어제 아내랑 함께 보는데 좌불안석이었어.

곽경택 | 왜요?

박찬욱 | 맨시니가 걱정돼서. 괜히 영화 보여준 것 아니야?

곽경택 | 김득구하고의 인연은 순간의 악몽이 아니라 평생 가는 거라고 생각하니 지금은 괜찮다고 하던데요.

박찬욱 | 그래. 개봉이 코앞이네. 한국이 결승 갔으면 관객을 뺏겼을 텐데.

곽경택 | 월드컵 덕도 보네요. 오는 월요일이 휴일 아닙니까.

박찬욱 | 하여튼 분위기 대단해. 요즘 화장실 노크할 때도 붉은 악마 응원 박자에 맞춰 ‘똑똑∼똑 똑 똑’한다잖아.

곽경택 | 요즘 어떻게 지냈습니까.

박찬욱 | 시애틀영화제 갔다왔고. 월드컵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돌아온 날이 이탈리아 하고 경기하는 날이었거든. 검색대를 막 통과했는데, 와 하는 거야. 안정환이 골을 넣은 거지. 집에까지 어떻게 가야 하나, 고민이 들더라고. 리무진 버스 기사 아저씨도 교대하는 사람하고 소리지르면서 하이파이브 하고 뭐 그러대. 재밌는 건 승객 중에 혼혈로 보이는 분이 서툰 우리말로 ‘누구하고 했어요?’ 그러는 거야. 순간, 그 기사 안색이 싹 변해. 싱글벙글하던 표정이 굳더라고. 주위 사람들도 그것도 모르냐는 분위기로 바라보고. 다들 면박을 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 그 운전사가 교대한 기사를 보더니, ‘어이, 우리가 어디하고 했더라?’ 그러는 거야. (웃음)

곽경택 | 저도 클랙슨 따라서 안 누른다고 욕 좀 먹었심다. (웃음)

Round1: 오프닝, 왜 그렇게 열었나?

#6 시골길 바닷가.

어린 득구가 버스를 발견하고 달려가자, 흙먼지를 일으키며 멈춰서는 버스. 문이 열리고 차장을 바라보는 어린 득구.

김득구: 이거이 어디가는 버스래요?

차장, 눈짓으로 노선표를 가리킨다.

김득구: 좀 태워주래요

차장: 어디까지 가는데?

득구: (멋쩍은 표정으로) 끝까징요.

박찬욱 | 오프닝을 어떻게 가져가느냐, 꽤 고민했지? 득구의 꼬맹이 시절부터 갈 생각은 없었어?

곽경택 | 마, 일단 많은 사람들이 봐야 안 됩니까. 편하게 보게끔 해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가는 게 좀 수월하잖습니까. 그런데 제가 흥이 안 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이거, <친구> 아이가, 누가 그럴 것 같고. 또 많은 사람들이 ‘끝’을 다 알고 있다 아입니까. 이거 미국가서 싸우다 죽은 권투선수 이야기 아니야, 하면 정말 끝입니다. 그게 부담이었지요. 어떻게든 끝까지 보게 하려면 처음에 시선을 끌어야 한다. 그렇다면 가장 큰 클라이맥스를 두 토막으로 나누어 오프닝으로 가자 했던 거지요.

박찬욱 | 부담이라고 하는 게 내가 보기엔 장점인 것 같은데. 이 영화의 매력은 어차피 김득구가 죽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애. 중간에 까불고, 웃기고, 너스레를 떨어도 다 슬프단 말이야. 어떻게든 마지막의 죽음과 결부되니까.

곽경택 | 형님이라면 어떻게 했겠어요?

박찬욱 | 선택은 결국 취향의 문제니까. 나라면 어린 득구가 차장한테 ‘이거이 어디 가는 버스래요’ 하는 장면으로 갔으면 어떨까 싶은데. 어디 가냐고 물으면, ‘끝까징요’ 하고 되받는 대사가 맘에 들어선지 그 장면을 끌고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궁금하네. 김득구, 정말 ‘끝까지’ 가는 사람이잖아.

곽경택 | 그랬으면, 조용하게 시작을 했다가 뒷부분에 임팩트를 줄 수 있었을 것 같십니다.

박찬욱 | 사소한 거지만 오프닝에 왜 자막을 안 넣었어?

곽경택 | 일부러. 권투 경기 시작하는 거야 뻔하잖습니까. 감으로라도 알아먹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고. 시선을 뺏기기도 하고. 김득구가 서 있는 곳이 머나먼 타지라는 느낌을 주고 싶기도 했고.

박찬욱 | 마지막 거, 멋있는 대답이다. 앞으로 누가 물어보면 꼭 그렇게만 대답해. (웃음)

Round2: 김득구는 어떤 인간인가?

동아체육관 사무실의 다섯명의 신입관원들, 한줄로 정렬해 있다.

김윤구: 차렷, 관장님께 대해 경례.

김현치: 말해봐. 니, 복싱 배아가 뭐할끼야?

(중략)

김현치: 느그가 여기 온 이유는 한마디로 챔피언이 돼서

맨주먹으로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쥐고 싶다. 이거다. 맞나?

김득구: (놀라는 표정으로) 네.

박찬욱 | 김득구가 우연히 포스터를 보고 체육관을 찾아가는 것으로 나오잖아. 그런데 나중에 보면 어렸을 적 샌드백도 두드리고 그러던데. 원래 권투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건가.

곽경택 | 그렇죠. 근데 영화라는 게, 특히 어떤 실존 인물의 드라마틱한 여정을 소개할 때, 터닝 포인트를 딱 심어주잖아요. 이 사람이 권투를 한 거는, 그걸 선택한 거는 그 사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전환점이긴 한데. 처음부터 그 과정을 자세하게 강조하고 싶지는 않더라구요. 그냥 자연스러워 보였으면 좋겠다, 뭐 그랬지요. 그땐 한국챔피언만 하더라도 권투만 해선 먹고살기 힘든 시대였어요. 체중감량 때문에 다들 못 먹으면서 다른 막일을 해야 했으니까.

박찬욱 | 시합장면을 봐도 천재 복서는 아니었는데.

곽경택 | 전혀 아닙니다. 내추럴 본 복서가 아니에요. 그저께 맨시니가 김득구를 그레이트 워리어(Great Warrior)라고 표현했는데, 그건 그 순간이죠. 갈수록 투지가 많이 생기긴 했는데, 타고난 복서라고 보기에는 펀치력도 약했어요. 전에 취재하러 김현치 관장 만나러 갔는데, 그래도 지금껏 제 맘속에 담아둔 사람 아닙니까. 김득구도 관장을 아버지처럼 여겼다고 일기에 썼을 정도고. 그런데 단박에 저보고 그러는 거에요. ‘득구, 글마는 뚝심도 없었고, 권투도 못했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더라구요. 제가 비굴해지데요.

박찬욱 | 그런 거를 더 강조했으면 어땠을까. 사실 천재 복서 이야기는 무슨 재미로 하겠어.

Round3: 김현치냐 이경미냐, 고민 됐겠네

#41 선수대기실

득구에게 다가가 2만원이 든 격려금 봉투를 내미는 김현치 관장

김현치: 자, 받아. 매맞고 번 돈이다. 무슨 말인지 알제.

김득구: 예.

박찬욱 | 그럼, 김현치 관장도 세계챔피언을 한 거야?

곽경택 | 아니오. 도전했다가 빌라 포로한테 졌어요. 못했지요.

박찬욱 | 첫눈에 김현치 역할을 맡은 윤승원씨가 들어오더라. 오랜만에 본 얼굴이잖아.

곽경택 | 이명세 감독님이 추천해주셨어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제작부였던 조원장 프로듀서가 뉴욕에 갔다가 뵙고선 요즘 곽경택이 김현치 역을 맡길 사람이 없어 고민한다고 했나봐요. 그랬더니 윤승원씨 사진을 구해서 보내주시더라구요. 딱 그 덩치를 보는데 사진에서 간지가 묻어나고. 또 왕년에 <토지>의 길상이 아닙니까.

박찬욱 | 나이가 어떻게 되시지?

곽경택 | 유동근씨하고 동갑인데…. (웃음)

박찬욱 | 배우랑 캐릭터랑이 매력있어서 그런지 난 프로권투가 몰락하는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비운의 복서 같은 이야기도 그럴듯할 것 같애. 곽경택/전체 영화 골격을 김현치랑 김득구랑 가느냐. 김득구와 이경미로 가느냐. 완고까지 고민했습니다. 둘 다 하믄 다 놓친다. 하나만 선택하자. 2고에서는 김현치랑 간다고 바꿨다가, 결국 지금처럼 김득구와 이경미로 가게 됐어요.

박찬욱 | 왜 그런 거야?

곽경택 | 내가 죽어도 포기못하는 게 뭐냐 생각해보니까. 남들이 뭐라 해도 이 영화 시작했던 건 마지막 장면의 아이였거든요. 그렇다면 모태인 이경미하고의 관계에 무게를 실어주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데요. 후반부에 이경미한테 감정을 몰아준 것도 그런 이유에서고.

박찬욱 | 회상의 몫을 김현치 관장한테 줘도 난 감동이 사그라들진 않을 것 같애. 마지막에 프로권투가 시들해져서 이젠 쇠락한 체육관에 관장 혼자서 회상을 한다고 해도 그만한 감동이 있을 거야.

곽경택 | 2고에선 형님 말처럼 김현치 혼자 들어가요. 김현치가 체육관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면서, 여기 단식원 한다 했십니까 그러면 상대방이, 아입니다, 일종의 비만관리 스포츠센터, 뭐 그런 곳입니다 하고. 계약 끝나고 김현치가 테레비를 멍하니 보고 있으면, 한참 인기 좋았던 프로야구 중계가 나오는 장면은 촬영까지 했는데.

박찬욱 | 그런데 왜 안 넣었어?

곽경택 | 그런 거 있잖습니까. 마지막을 정리하고 또 정리하고 또 정리하고 하는 느낌. 뭐 그런 것 같더라고에. 끝이 안 날 것 같은. 그래서 미국에서 치러진 장례식 부분에 김현치 관장 대사도 날렸어요. 김 관장이 한국에 전화하면서 그러거든요. 아무래도 한국에서 장사를 한번 더 치러야 하지 않겠나, 득구 관은 종팔이하고 상봉이하고 득구하고 들면 되겠다 해놓고서 놀라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도 그래서 뺐십니다. 박찬욱 그런 고민에 직면할 때 있어. 멋있게 찍어놓아도 영화가 안 끝날 것 같으면 그거 빼고 가야지. 그래도 DVD 타이틀엔 꼭 넣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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