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영화제는 한국 관객에게 일본 장르영화가 도착하는 가장 오래된 항구였다. 미이케 다카시의 막무가내 V시네마가, 시미즈 다카시의 축축한 J호러가, 구로사와 기요시의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이 부천을 경유해 우리에게 당도했다. 30주년을 맞은 올해, 부천은 지금 일본 장르영화의 바통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중임을 증명하는 자리다. 시그니처부터 B 익스트림, 판타스케이프까지 늘어선 올해의 일본 작품들은 그 이어달리기의 한복판을 포착한 한편의 스냅숏처럼 읽힌다.
가장 먼저 호명할 이름은 구로사와 기요시다. 제79회 칸영화제 칸 프리미어 부문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된 <흑뢰성>이 시그니처 섹션에서 국내 첫선을 보인다. 당대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든 무장 아라키 무라시게가 고립된 성 안에서 벌어지는 밀실 살인의 수수께끼에 맞서는 심리 미스터리다. 국내 재개봉을 앞둔 구로사와 기요시의 호러 <회로>와 비교하면 관습적인 문법과 안정적인 형식을 보여주는 그의 첫 사극인데, 맞물리는 대화의 연쇄 속에서 스릴과 공포, 비극과 코미디를 넘나드는 심리적 압력은 여전히 감탄스럽다. 시미즈 다카시 감독은 시그니처 섹션에 신작 <입에 대한 앙케트>를 선보인다. 워너브러더스가 가세한 이번 신작은 <주온>으로 J호러의 문법을 알린 그는 여전한 현역임을 증명한다. 조조 히데오는 2020년 한국영화로 먼저 영화화된 소네 게이스케의 동명 소설에 바탕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이름 없는 자> 두편을 시그니처 섹션에 동시에 올렸다. 조조 히데오는 핑크영화와 오리지널 비디오의 다작 공방에서 단련된 구력이 미이케 다카시와의 접점을 떠올리게 만드는 감독이다. 그리고 올해 부천은 회고·헌정의 섹션인 ‘스트레인지 오마쥬’를 통해 미이케 다카시의 2001년작 <이치, 더 킬러>를 상영한다. 불온했던 이단의 이름이 고전으로 호명되는 올해, 미이케를 잇는 다음 세대의 일본 감독들이 다양한 신작으로 부천의 여러 섹션을 채웠다.
바통이 향하는 자리에 서 있는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가장 주목할 만한 이름은 나가히사 마코토다. 단편 <그래서 우리는 풀장에 금붕어를>로 선댄스 단편 그랑프리를, 장편 데뷔작 <위 아 리틀 좀비>로 선댄스 심사위원 특별상과 베를리날레 특별언급의 영광을 안았던 그는 신작 <염상>(부천 초이스 월드)으로 칸에 이어 부천을 찾는다. 신주쿠 가부키초에서 유흥가 생활을 하는 ‘토요코 키즈’를 응시한 작품으로 팝 컬처를 흡수한 표면 아래, 컬트 종교 신자인 부모 밑에서 가정폭력을 경험한 2세의 통점을 묻어둔 사회파 드라마다. <5초 만에 완전범죄를 성공하는 방법>(B 익스트림)의 곤도 료타는 ‘<링> <주온> 이후 일본 호러영화의 부활’을 내걸고 시미즈 다카시가 심사위원장으로 자리한 일본 호러영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했고, 올해 시미즈 다카시와 함께 시그니처 섹션에서 신작을 올리게 됐다. 의도치 않게 교사를 죽인 동생을 위해 형이 생성형 AI에 완전범죄의 방법을 입력한다는 설정은 AI를 전면에 내건 부천의 화두와도 포개진다. 3세대 재일 한인 손명아 감독은 <트로피>(판타스케이프)를 선보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제작사 소속으로 니시카와 미와의 <멋진 세계>, 고레에다의 <브로커> 조감독을 거쳤다. 조선학교에 다닌 자신의 경험을 출발점 삼아 무용에 매진하던 소녀가 K팝 콘서트 티켓값을 마련하려다 아버지가 북한에서 받은 훈장까지 팔아버리는 이야기를 담았다.
<그대가 영화>로 감독 데뷔한 우에다 마코토의 <그대가 영화>(판타스케이프)는 각본가로서 십수년 갈고닦아온 규칙을 잇는다. 기발한 설정 하나로 밀어붙이는 괴력의 컨셉을 고수했던 그는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에서 2분 뒤의 미래를 비추는 TV를 등장시켰고, 속편 격인 <리버, 흐르지 말아줘>에선 교토의 노포 료칸이 2분짜리 타임루프에 갇힌다. 첫 장편 연출작 <그대가 영화>는 시모키타자와의 한 영화관이 무대다. 영화를 보러 간 두 사람 각자의 인생이 서로의 스크린에 영화로 비친다는 불가능한 구조를 발명해 매체를 재료 삼은 메타 코미디를 펼쳤다.
이어질 두편은 엄밀히는 신인의 것은 아니다. 미키 다카히로의 <머지않아, 이별입니다>(시그니처)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로 대표되는 연애영화의 명장이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는 소녀가 장례회사에 인턴 장례 플래너로 들어가는 이야기로 빚은 신작이다. 순애와 세카이계의 문법을 장르의 안쪽으로 끌어왔다. 나이토 에이스케의 <살인 불곰의 습격>(B 익스트림)은 일본에서 실제로 빈발한 곰 습격 사건을 크리처 호러로 옮긴 작품으로, 신인이 아닌 중견 장르감독이 장르 생태계의 엔진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다. 거장과 신예 사이, 중간 세대의 두께가 있기에 이어달리기는 끊기지 않는다.
올해 부천의 일본 라인업은 한편의 잘 짜인 계주처럼 보인다. 낯선 장르로 보폭을 옮기는 구로사와 기요시, 헌사의 대상이 된 미이케 다카시, 제자와 함께 같은 트랙을 달리는 시미즈 다카시, 그리고 나가히사 마코토, 손명아, 곤도 료타, 우에다 마코토 등이 뒤따른다. 일본 장르영화의 바통은 여전히 분주하게 이동 중이고, 30주년을 맞이한 부천영화제가 올여름 이 경주를 가장 좋은 자리에서 지켜볼 객석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