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오후>에서 가장 의외였던 점은 소를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애초 검은 소의 클로즈업숏으로 시작된 이 영화엔 소가 경기를 치르는 과정, 검붉은 피가 등줄기를 타고 흐르다 점점 호흡이 거칠어지고 결국 창을 꽂은 채 경련을 일으키며 퇴장하는 순간이 반복해 담긴다. 로카 레이의 전기다큐멘터리였다면 몇몇은 불필요했을 신이다. 그러나 <고독의 오후>는 윤리적 관점에서 투우를 고발하진 않는다. 도덕적 판단은 유보한 채 투우의 규칙 안에서 맞부딪히는 소와 인간의 육체를 담아낸다.
플롯은 단순하다. 경기를 마친 투우사가 이동하고 다시 경기를 준비하고, 경기를 치르고 이동한 뒤 또 준비하는 구조의 반복이다. 김예솔비 평론가가 “투우사를 일종의 배우”로, “그의 손에 들린 카포테나 물레타는 순간적으로 무대라는 단상을 만들어내는 커튼과 유사한 장치”로 바라본 것처럼(<씨네21> 1560호, 프런트 라인) 투우사와 소가 매번 서로 대적하는 역할로 참전하며 이를 관람하는 관객이 존재한다는 면에서 투우 경기를 공연예술에 빗대볼 수 있다. 다만 헤밍웨이의 표현처럼 “투우는 예술가가 죽음의 위험에 처하는 유일한 예술”(<오후의 죽음>)이란 차이가 있다.
반복되는 영화의 구조에서 예측 불가한 지점이 바로 여기인데, 죽음이란 결말은 정해져 있지만 경기 내용과 죽음의 주체는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알베르트 세라와 촬영감독 역시 무엇을 마주할지 모르는 채로 카메라를 들어 올렸을 것이다. 경기장의 사운드와 이미지는 끊임없이 불일치한다. 프레임 밖에서 관객의 환호와 탄성이 들려오지만 장내를 원경으로 보여주는 경우는 없다. 타이트한 숏엔 소와 투우사만이 잡힐 뿐이다. 죽음을 전제한 공연에서 카메라는 오직 튀어 오르는 피로 생을 확인한다는 역설을 포착하는 데에 관심을 둔다.
투우사의 취약함은 경기장 밖에서 드러난다. 용맹하게 소에 맞서던 로카 레이가 환복할 때 비로소 아물지 않은 자신의 상처에 관해 고백한다. 투우사의 의복은 전사의 갑옷이라기보다 사제복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그가 상흔을 가린 채 경기장의 전사로 둔갑하게 한다. 그래서인지 경기 전 단장한 몸을 코르셋처럼 조인 의상에 욱여넣고 묵주에 키스하며 무사를 기도하는 과정을 로카 레이는 신성한 의식처럼 수행한다.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 투우사들은 상대할 소의 실력을 평가하고 경기를 마치고 이동하는 밴에선 승리를 상찬하는 말을 쏟아낸다. 그것은 로카 레이의 경기에 대한 진실된 감탄이라기보다 으레 따라붙는 전통의식의 일부처럼 보인다. 말로 뱉어내야만 경기의 유의미함을 증명하고 뒤따르는 두려움까지 떨쳐낼 수 있다고 믿는 듯 느껴진다.
투우에 관한 지대한 관심과 별개로 알베르트 세라는 여러 인터뷰에서 투우가 “시대착오”적이며 “과거의 가치와 문화를 유령처럼 남겨둔 존재”(<더 필름 스테이지>)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더 기록의 의미가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태도를 세라의 전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루이 14세의 죽음>에선 죽어가는 왕(장 피에르 레오)과 함께 쇠해가는 절대왕정의 권력을, <내 죽음의 이야기>에선 카사노바 후작(빈센 알타이오)과 드라큘라 백작(엘리세우 우에르타스)을 등장시키며 계몽주의의 종말을 암시한다. <퍼시픽션>에서 프랑스의 고위 관료인 드 롤레(브누아 마지멜)는 프랑스 식민주의의 흔적을 대변하는 존재다. 그리고 <고독의 오후>에 이르러 스페인에서도 주변화된 투우 문화를 자신의 첫 다큐멘터리 소재로 삼는다. 요컨대 저물어가거나 이미 소멸한 시대의 잔재를 꾸준히 다뤄온 셈인데, 이를 대변하는 신체를 관찰하고 변화를 묘사하는 형식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기능을 잃은 채 부패해가는 루이 14세의 다리, 식욕과 성욕을 추잡하게 추구하는 중년의 카사노바 후작. 그리고 피를 흘리며 전시된 소와 인간의 육체가 있다. 특히 <고독의 오후>에선 죽음을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는 과정으로 여기는데 이는 <루이 14세의 죽음>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과 일치한다.
로카 레이는 경기 중 몇 차례 소의 뿔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다시 경기장으로 뛰어든다. 위험을 감수한 채 그가 투우를 지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 투우는 계급 상승의 통로였다. 그러나 본국에서조차 투우가 중심에서 밀려난 처지라면 더욱이 의문이 든다. 알베르트 세라는 이 질문에 답할 의지가 없다. 정확히는 로카 레이의 내면과 의도에 무관심하다. 제작 과정에서 알베르트 세라는 로카 레이와 한번의 식사만 함께했고 영화에 그의 어떤 인터뷰도 반영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고독의 오후>는 로카 레이와의 접촉 없이 그의 육체만을 빌리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적절한 마타도르가 있다면 대체도 가능했을 것이다.
앙드레 바쟁은 영화가 단순히 죽음을 기록할 뿐 아니라 “죽음을 반복할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고독의 오후> 역시 무한히 되풀이되는 죽음을 재현한다. 그러나 영화는 정해진 운명을 설명하는 대신 예정된 끝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더 집착한다. 로카 레이가 경기를 마치고 내려오자 동료 투우사가 고양된 목소리로 “목숨은 아무 가치가 없어!”라고 소리친다. 투우 경기는 생존자가 승리하는 방식이지만 역으로 자기 삶을 온전히 포기한 자만이 오를 수 있는 무대다. 영웅 대접을 받던 로카 레이는 이 순간 오로지 피와 살로 구성된 몸뚱이와 다름없다. 수시로 끼어드는 소음이 아니라면, 객석 반응을 유도하는 로카 레이의 시선이 아니라면 맞부딪히는 소와 투우사만이 경기장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고독의 감각은 오직 둘만이 공유하는 것일 테다. 소의 죽음을 지연시키며 경기를 운영하는 투우사는 자기 죽음 또한 유예해가며 투우의 무대 위로 반복해 소환된다. 경기장 밖에서도 투우사들이 쉬이 긴장감을 잃지 않고, 마무리된 하루를 경탄하는 모습이 영화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것과도 이어진다. 스스로를 “불사의 존재”로 지칭하던 로카 레이가 <고독의 오후>를 처음 관람했을 때 감독이 “자신을 배신했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알베르트 세라는 말한다.(<인 리뷰 온라인>)
영화는 승리한 로카 레이가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으로 끝맺는다. 객석의 환호에 화답하는 로카 레이의 얼굴에는 어쩐지 일말의 기쁨도 해방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후로 그는 같은 의식을 거치며 예정된 경기를 숱하게 치를 것이다. 지친 그의 뒷모습이 끌려 나가던 소와 겹쳐 보인다면 과한 비약일까. 생과 사의 주체, 살생의 악업을 짓는 자와 죽음에 저항하는 자의 위치는 투우 경기에서 수시로 바뀐다. 피와 살이 자아내는 흥분과 혐오, 역겨움과 매혹이 매 순간 겹쳐진다. 대신할 소와 투우사의 육체가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투우는 느리게나마 자신의 명맥을 유지할 것이다. 그 지난함과 모순의 총체가 투우라는 무대 위에 공존함을 <고독의 오후>는 끈질기게 주창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