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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민의 클로징] 빨강의 스펙트럼

입춘이 지났으니 바야흐로 병오년, 붉은 말의 해다. 영화라는 장르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붉음’은 언제나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떠올리게 한다. 그에게 빨강은 살아 있음의 정수, 인간의 욕망과 세계의 역동을 담는 열린 기호다. 그러나 죽음과 비관으로 점철된 세계에서 신년을 맞이해 품어보는 미래에 대한 희망은 현재를 가까스로 유지하는 데에 소진되는 잔인한 낙관으로 변모하기 일쑤다. 희망을 추락시키는 힘의 핵심은 양극화와 그로 인한 분열이다. 세대와 젠더, 인종과 국가, 계급의 지표는 존재의 고유한 특성을 기술하는 서술어가 아니라 존재의 대립을 부추기는 낙인으로 작동한다. 개인의 정치성을 주장할수록 공동의 정치성은 반감한다. 악순환이다. 다름과 차이가 분열이 아닌 조화로 나아가게 하기, 그러니까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변환시키는 일이 이 시대의 과제다.

알모도바르의 영화 <패러렐 마더스>(2021)는 이러한 존재론적 난관에 관해 한 가지 방책을 제안한다. 제목처럼, 서사는 평행한 두축으로 진행된다. 아이가 뒤바뀌게 되는 두 여성의 사적인 멜로드라마와 스페인내전 때 행해진 집단학살의 역사적인 공적 드라마가 그것이다. 그러나 현세대의 경험 바깥에 있는 이전 세대의 과거는 어떻게 ‘우리’의 시간이 되는가? 평행선은 서로 만날 수 없지만 폭로될 수밖에 없는 진실을 향해 기어코 진행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동일한 역량을 지니며, 교차점을 생성하지 않는 바로 그 방식으로 ‘공통’이 아닌 ‘공동’의 기억 속으로 진입한다. 그리하여 미래로 나아가는 일은 과거로의 매몰이나 그것의 축출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 안에 성찰적으로 재배치하는 일이 된다. 아이의 생물학적 부모가 밝혀지는 반전의 결절점이 유해의 발굴 작업이 본격화하는 시점과 중첩되는 것은 매우 급진적인데, 이는 존재의 좁힐 수 없는 차이와 그것이 지시하는 경계를 수용함으로써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령, 페미니즘이 남성 지배의 언어와 체제를 부수는 실천일 때, 영화는 페미니즘을 남성성의 전폭적인 소거가 아니라 남성성을 재배치하는 작업으로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인부들이 유골의 자리에 몸을 포개며 눕는 마지막 장면은 현재의 몸들이 과거의 흔적 위에서 남성들의 시간적 연속성을 새롭게 체현하는 수행이다. 이것이 알모도바르가 동시대를 향해 제안하는 실천, 내 것이 아닌 타자의 시간을 품는 실천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 하나 비슷하지 않다. 여성들은 서로 다른 처지와 맥락 속에서 아이를 낳고, 각자의 삶에서 중요하게 돌보고 추구하는 목표 또한 다르다. 때로 어떤 여성은 보통의 남성으로부터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강한 남성성을 내보이기도 한다. 여성주의가 여성을 단일한 인격적 정체성으로 규정하기를 거부할 때, 남성성 또한 동일성으로부터 해방된다. ‘나’와 ‘너’의 경계가 교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아르투로가 아이의 생부가 아님을 직감하고 부정하지 않는 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자신이 아버지로 지닌 좌표를 직시하는 정직함이다) 그러나 나란히 함께, 공동의 대지 위에서 삶을 일구어갈 수 있다는 진실을 각성해야 한다. 알모도바르의 ‘빨강’이 ‘여성’과 ‘삶’에서 출발해 고통과 죽음까지 끌어안는 다종다기한 색채의 퀴어한 스펙트럼으로 화하는 것처럼, 다가온 새로운 시간을 이전과 ‘다르게’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존재의 경계를 넘어서는 나란한 지향을 꿈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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