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레드씨국제영화제(이하 레드씨영화제)가 12월4일부터 13일까지, 사우디아라비아의 항구도시 제다에서 열렸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18년 개국 이래 최초로 문화부를 설립한 후 국가 전역에 35년 만에 영화관을 짓기 시작했으며, 2019년부터 문화부 산하 비영리단체 레드씨영화재단(Red Sea Film Foundation)을 통해 영화제를 운영 중이다. 이번 영화제에선 어떤 영화, 어떤 게스트가 화제를 모았을까. 2025년 열린 영화제에서만 감지할 수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화제작 동향은 어떨까. <씨네21>이 3년 내리 레드씨영화제에 참가해 영화 강국을 꿈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모저모를 취재했다.
제5회 레드씨영화제는 총 15편의 영화를 경쟁부문에 초청했다.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 미야케 쇼 감독의 <여행과 나날>을 제외하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서아시아 및 북아프리카에서 제작된 영화가 대부분이었고, 작품들 중 월드프리미어로 공개된 작품은 모함마드 셰이크 감독의 장편 데뷔작 <바르니>(Barni)가 유일했다. 달리 말해 경쟁작의 다수는 이미 베를린, 선댄스, 토론토 등 국제영화제에서 선공개된 작품들이었다. 레드씨영화제를 방문해야만 볼 수 있는, 그러면서도 흔쾌히 경쟁 섹션에서 겨뤄질 만한 영화가 아직은 부재한 걸까. 이 아쉬움은 영화제는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영화시장에도 동일하게 건넬 수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제 개막 5회차를 맞는 신생 영화제로서, 각종 국제영화제의 화제작을 모으고 초청작의 면면에서 일정한 경향성을 만들려는 레드씨의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디아스포라 내러티브에 주목하다
앞서 다양성 부재를 토로했지만, 유사 문화권의 관객과 창작자만이 공명하는 특정 포인트는 타국의 관객인 기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경쟁부문 최고의 화제작은 감독 겸 배우 셰리언 다비스의 연출작 <너의 흔적들>(All That′s Left of You)이었다. <너의 흔적들>은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규탄한 배우 마크 러펄로, 하비에르 바르뎀이 제작에 참여한 영화다. 이 시대극은 3대에 걸친 팔레스타인 난민 가족의 역사를 통해 참극의 근현대사가 각 세대에 남긴 상흔을 다룬다.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극장 바깥에서도 현재진행 중이고 영화 또한 이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한데 <너의 흔적들>은 그럼에도 일상을 살아가는 가족구성원의 나날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심지어 홈 시트콤에 가까운 유머로 완급을 조절하며 보편적 드라마를 완성해냈다. 영화의 아랍 프리미어 상영이 있던 12월5일. 러닝타임 내내 극장은 오열을 넘어 통곡으로 가득했고, 이는 관객과의 대화까지 이어졌다. 셰리언 다비스가 “이 영화는 부분적으로 내 삶에서 영감을 얻었다. 나의 아버지는 인생 대부분을 망명으로 보낸 팔레스타인 난민이다”라고 운을 떼자, 서아시아 각지에서 온 관객들이 본인과 본인의 가족이 겪은 내전의 비극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감독과 출연배우, 관객이 또다시 울고 현장 통역사도 울었다. 그리고 종영 이후 극장 바깥에선 셰리언 다비스 감독이 영화의 여운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관객들과 한참을 서서 일일이 포옹을 나누는 명장면이 펼쳐졌다. 영화는 레드씨영화제에서 상영된 <힌드의 목소리>(튀니지), <팔레스타인 36>(팔레스타인)과 함께 2026년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영화상 숏리스트에 요르단 대표로 올랐다. 라이베리아 내전을 아이의 시선으로 풀어낸 애니메이션 <알라에게는 책임이 없다>(Allah is Not Obliged), 미얀마의 박해를 피해 국경을 넘는 로힝야족 남매의 드라마 <로스트 랜드>(Lost Land), 난민 작가의 생존기를 다룬 <유난>(Yunan)까지. 이번 영화제의 경쟁부문을 포함해 지금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는 서아시아 및 북아프리카의 영화는 전쟁, 강제 이주, 그리고 난민의 생존기를 목격자의 시선에서 진술한다. 여기에 케냐 전역을 떠도는 여성 트럭 기사를 취재한 다큐멘터리 <트럭 마마>, 메카로의 성지순례 중 실종된 손녀를 찾아나서는 할머니의 로드무비 <히즈라>를 더한다면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인물들의 디아스포라 내러티브가 영화제 전반을 수놓았다고 볼 수 있다.
고용 창출 역시 중요한 숙제
사우디아라비아 영화시장은 지금 국제 공동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영화위원회(이하 사우디영화위)의 부문 개발 및 투자 유치 총괄 압둘잘릴 알나세르에 따르면 2020년 2월 사우디영화위가 발족한 이래, 사우디아라비아는 “해외 프로덕션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해 박스오피스의 성장과 로컬 콘텐츠의 부상을 도모”한다. 2025년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 최대의 박스오피스 시장이자 세계 순위 15위로 자리 중이다. 알나세르는 이를 “시장의 성장을 믿고 투자한 민간 기업 8개의 파트너십이 도운 성과”라고 언급하며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화산업이 성장할 수 있던 여러 배경을 소개했다. 그중 하나는 인센티브 프로그램이다. 사우디영화위는 2022년 ‘40% 현금 리베이트’ 제도를 도입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영화를 제작할 경우 수익의 일부를 환급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사우디영화위는 이 기회를 수익 창출의 창구는 물론 인재 양성의 발판으로 활용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인구의 77%가 30살 미만일 정도로 경제활동인구 비중이 높지만 이제 문화산업이 태동하는 국가라 영화 전문 인력이 충분치 못하다. 그리하여 공동제작 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인력을 최소 40명에서 최대 70명까지 고용할 것을 명문화했다. 제작사 옐로 캐멀의 대표 라샤 알이맘은 “가이 리치와 같은 할리우드 기성감독이 이 제도를 적극 활용해 신진 인력을 창출했”으며 소니, 옥산다와 같은 국제기업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적극적으로 유치 중인 버추얼 스튜디오 제작에 적극 투자했다”고 부연했다. 그래도 나아갈 길은 멀다. 제작사 필름 알울라의 상임이사 자이드 샤커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는 “파격적인 인센티브 전략으로 공동제작을 유치하지만 시작 단계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시행착오와 학습 비용 탓에 국제 제작진 사이에 ‘영화를 찍기에 지나치게 비싼 국가’라고 소문이 났다”고 우려했다. <유난> <싱크> 등 경쟁부문 초청작의 해외 공동제작을 도모한 프로듀서 알라 알라사드 또한 “두바이, 아부다비, 도하에 레드씨영화제까지 등장하며 아랍권 영화산업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건 사실이다. 그런데 아랍 인구 3억5천만명 중 영화제 관객수나 극장 실관람 관객수는 여전히 연간 1천만명 정도에 불과하다”라며 공급에 비해 폐쇄적인 수요를 지적했다. 이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아랍권 영화제는 다양한 전략을 앞세워 관객을 유치한다. 그중 레드씨영화제는 ‘게스트 섭외’로 영화제의 위상을 높이고 할리우드와 파트너십을 맺는다. 이번 영화제에선 상영작이나 토크 세션이 없는 우마 서먼이 오로지 개막식과 ‘우먼 인 시네마’ 행사를 위해 제다를 찾았고, <라스트 위치 헌터2>로 복귀를 타진한 원로배우 마이클 케인이 공동 주연배우 빈 디젤이 미는 휠체어에 올라 개막식 최고의 컷을 연출했다. 기자들에게도 갑자기 “커스틴 던스트, 니컬러스 홀트, 앤서니 홉킨스 등의 배우가 내일 제다를 찾을 예정”이라는 전보가 수시로 날아들었다. 이들이 제다에서 남긴 ‘최초 발언’은 신생 영화제를 하루가 멀다 하고 들썩이게 했다. 이어지는 페이지에서 <씨네21>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만난 영화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