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 바움백의 영화 속 인물은 미완의 상태에 있다. 관계는 뒤죽박죽이고 감정은 넘쳐흐르며 인물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간다. 각자 말하고 동시에 말하며 휴대전화로 말한다. 바움백의 영화가 수다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인물이 성장하고 완성돼가는 과정을 말로 보여주어서다. 말하는 동안 인물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확인하고 더 많은 말을 쏟아내며 관계를 회복하려 시도한다. 바움백의 세계에서 말은 미완의 인물들이 사용하는 성장 도구다.
<제이 켈리>는 이 익숙한 구조에서 한발 물러나 있다. 성장의 현장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성장 서사가 끝난 이후, 즉 이미 성공한 인물을 내세운다. 바움백 영화 세계에서 만나는 새로운 유형, 사후(事後) 인물이다. 성장 서사가 종료된 이후의 인간, 변화가 중심 사건이 되지 않는 인물을 뜻한다.
제이 켈리(조지 클루니)는 성공한 영화배우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미 완성된 인물이므로 자신의 직업적 위치와 사회에서의 역할을 명확히 알고 있으며 그에 맞는 태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흔히 기대하는 결핍이나 상처도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바움백은 일단 그를 흔들기보다 그대로 두는 쪽을 택한다. 영화는 뚜렷한 갈등 없이 인물이 만들어놓은 삶의 구조를 차분히 따라간다. 사건은 발생하지만 인물을 변화시킬 만큼 크지 않다. 그는 이미 제이 켈리라는 이름 자체가 되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다른 무엇이 될 필요가 없다. 바움백은 성공 이후의 인간이 겪는 정체성의 정지 상태를 공허에 가까운 정서로 그린다.
이때 사후 인물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진다. 사후 인물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니라 이미 도달한 상태에서 살아간다. 전진보다 유지하는 삶. <제이 켈리>가 바움백의 이전 작품들과 구분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영화는 질문한다. 변화할 필요가 없는 인간을 서사의 중심에 놓을 때, 영화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경로 이탈이 아닌 이동의 방법
그것은 사후 인물이 놓친 것. 성공에 이르는 동안 잃은 것과 이름을 얻기 위해 대가를 치른 것들을 회수하는 일이다. 그는 35년 동안 영화 현장에 있었고 큰딸은 34살이다. 아버지는 늙었으며 매니저는 지친 데다 마침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배우 인생도 마무리되려는 시점이다. 새삼 잃어버린 관계가 떠오르고 잊어버린 또 하나의 이름이 소중해진다. 켄터키 출신 제이 켈리. 배우가 되기 전 아무것도 아니었던 제이 켈리를 되찾기 위해 바움백은 ‘이동’의 방법을 사용한다. 대저택에 살면서 수영장에 뜬 낙엽을 뜰채로 건져내는 그를 이탈리아로 보낸다. 전용 비행기와 기차에 태워 실패한 관계 속으로. 영화에서 인물이 이동하는 일은 공간을 새로 만드는 행위다. 지리적 좌표를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기억과 사건을 새로 만들며 단순한 장소를 특별한 공간으로 활성화한다. 보통 과거 회상은 플래시백이나 장면전환 기법을 사용하지만 제이 켈리는 비행기 내부의 커튼 뒤나 기차 화장실에서 과거의 장소로 연결된다. 현재의 이동 경로에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형식이다. 장면이 아니라 공간이 나오는 이유는 현재의 몸으로 과거를 통과하게 만들려는 필요성 때문이다. 23살 연기 수업을 받던 강의실과 큰딸이 다니던 직장 같은, 관계가 만들어지고 실패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공간을 다시 걸어보게 하는 것이다.
제이 켈리 외에 자기 이름을 찾기 위해 이동하는 인물이 또 한 사람 있다. <프란시스 하>의 프란시스(그레타 거윅)다. 바움백이 만든 대표적 미완의 인물. 프란시스는 아직 자신의 이름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인물이다. 직업, 인간관계, 생활환경 모두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딘가로 계속 이동한다. 자신을 완성할 수 있다는 믿음을 품고 충동적으로 떠난 프랑스. 무계획 상태로 짧게, 어쩌면 실패에 가까운 이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이후 프란시스를 프란시스 하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 프랑스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지만,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는 동력이 돼준다. 미완이라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은 순간을 맞이하며 프란시스는 비로소 자기 이름을 온전히 소유한다.
미완의 인물 프란시스와 완성된 인물 제이를 잇는 흥미로운 접점은 또 있다. 숲이다. 도시 배경이 많은 바움백의 영화에 종종 숲이 등장한다. 뜻밖이지만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넘쳐나는 말과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가 코앞에 닥친 인물들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 바움백의 영화에 숲이 나타난다. 소음이 차단되고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인물을 잠시 혼자 둔다. 프란시스는 숲을 걸으며 부모와 통화한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흐름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질 만큼 조용하다. 늘 누군가와 함께 어울리던 프란시스가 혼자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장면이 성취나 결단의 장소로 연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전히 미완의 상태로 부모와 나누는 말은 자신과 연결된 삶의 기반을 확인하는 정도로 쓰인다. 프란시스는 숲에서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제이 역시 숲에서 가족과 통화한다. 자신의 아픈 손가락인 큰딸에게 전화를 걸어 실패한 관계를 회복하려 애쓴다. 큰딸의 어린 시절이 돌아오지 않듯이 두 사람의 관계도 복원될 기미가 없다. 숲은 실패로부터 몸을 숨길 수 없는 공간이다.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자신이 놓친 것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제이를 어둡고 안개 자욱한 숲에 고립시키기 위해 수다스러운 사람들과 햇살 가득한 토스카나까지 이동하도록 만들었다는 듯, 이 장면은 영화배우의 얼굴에서 자기 자신의 얼굴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영화가 유지해온 밝고 경쾌한 정조를 잠시 중단함으로써 제이의 성공한 삶이 어떤 조건 위에 세워졌는지를 제이와 관객 모두 인식하게 한다.
다시 해도 돼요?
제이 켈리의 영화 인생을 정리한 영상이 시상식장 스크린에 흐르는 동안 그는 객석에서 자신과 멀어진 사람들을 발견한다. 잃어버린 관계,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환영처럼 자리에 앉아 있다. 어린 두딸이 아빠를 위해 만든 영상이 스크린에 이어진다. 제이의 눈에만 보이는 영상이다. 공적인 회고와 사적인 기억을 경계 없이 연출함으로써 시상식장은 성공을 기념하는 장소에서 실패한 관계들이 호출되는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된다. 기립박수가 이어지는 가운데 제이가 카메라를 본다. 관객과 눈을 맞추듯 정면을 보며 그가 말한다. “다시 해도 돼요? 다시 하고 싶어요.” 이 말은 배우가 더 좋은 장면을 위해 감독에게 하는 요청처럼 들리지만 실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 질문엔 답이 포함돼 있다. ‘아뇨, 불가능합니다.’ 운과 노력으로 성공에 이르고 인생에 있어 대부분의 일이 결정된 사후 인물은 다음 말이 아직 남아 있으리라 기대할 수도 있다. 성공한 사람에게 세상은 늘 호의적이니까. 영화 오프닝에 실비아 플라스의 인용문이 타이틀 카드로 나온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책임이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 되거나 아무도 아닌 것이 훨씬 더 쉽다.” 분명한 건 어느 쪽을 선택해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들을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다. 촬영장에서 감독에게 늘 듣던 말. “이전 테이크도 좋았어요.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