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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목격하는 개체, 이보라 평론가의 <콘티넨탈 ’25>

라두 주데는 신작 <콘티넨탈 ’25>(이하 <콘티넨탈>)의 참조점으로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유로파 51>(이하 <유로파>)과 앨프리드 히치콕의 <싸이코>를 언급한다. 편의적으로 구분할 때 전자는 내용의 측면에서, 후자는 구성의 측면에서 닮았는데, 가령 노숙자 이온이 난방기에 목을 매달고 죽은 후 그를 담당한 퇴거 집행인 오르솔리아가 사람들을 만나 고민을 나눈다는 줄거리는 <유로파>에서 어린 아들의 자살 이후 이레네가 도시를 거닐며 빈곤과 노동 실태를 마주하는 이야기와 느슨히 연관된다. 또 초반부에서 이온을 따라가던 영화가 그의 죽음 이후 오르솔리아로 주인공을 재설정한다는 점에서는 역시나 관객으로 하여금 갑작스럽게 이입의 주체를 이양시키는 <싸이코>의 구성이 환기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로셀리니의 근심, 주데의 냉소

<콘티넨탈 ’25>

로셀리니의 근심은 반세기를 훌쩍 지나 주데의 냉소로 전환된 듯 보인다. 그런데 냉소는 실상 가장 차가운 근심이다. 예컨대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의 후반부, 거의 연극에 가까운 롱테이크 시퀀스에서 관객이 발견하는 것은 (촬영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한) ‘액션’(action)이라는 기호가 쉼 없이 반복되며 만성화되는 과정이다. 노동을 수행하는 것, 공동체에 입회하는 것, 그리고 영화를 찍(히)는 것의 부조리는 거의 영속적으로 되풀이되는 데 있음을, 그래서 잠깐 정차할 때나 쪽잠을 자는 주인공 안젤라처럼 세계는 항구적인 운전의 미로임을 발설하는 이 결말에는 우스꽝스러운 콩트적 면모뿐만 아니라 둔중한 비념이 동시에 감돈다.

전작들보다 훨씬 간소하게 제작된 <콘티넨탈>은 앞서 썼듯 <유로파>를 이으면서도 <유로파>의 전제와 어긋나며 출발한다. 잠깐 우회하면, 로셀리니는 <유로파>의 주인공 이레네를 두고 잉그리드 버그먼에게 “시몬 베유의 영적 자매”라고 귀띔했다. 평생 노동자계급으로 살았던 레지스탕스 활동가이자 유대계였으나 가톨릭 문명에 경도되었던 기독교 신비주의자. 날 때부터 병약했음에도 자신의 안녕을 다스리기보다 일부러 식사를 제한했던, 앎과 삶을 일치시키려 애썼던 그 숭고한 인물 말이다. (그를 이토록 바른 언어로만 요약하기란 궁색한 일이지만) 로셀리니가 버그먼에게 이레네 역할을 맡기며 바랐던 바는 투쟁가이자 성인(聖人)이라는, 어쩌면 화합하기 어려운 두 개의 점근선이었는지도 모른다. 부르주아적 삶에 안주했던 이레네는 참척이라는 극단적 사건을 통해 다른 방식의 삶을 각성한다. 식탁에서 오가는 정치적 논쟁을 무심히 넘기던 그녀가 후반부에 이르러 낮은 자들의 안식을 묵묵히 강변하는 대목은 (유럽의) 신앙적 토대와 좌파적 이상이 용케 합일하는 순간이라고 일러볼 수도 있겠다.

버그먼과 함께하던 시기의 로셀리니에게서 느끼는 감동은 이런 압축적 비약에 있다. 이레네는 아들을 잃었다. 바꾸어 말하면, 아들만을 잃었다. 그런데 그녀의 정신은 죽은 아들을 경유해 이미 죽은 자들, 나아가 죽음을 앞둔 자들로 확장된다. 이는 또한 내가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슬픔에서 그것을 바라보겠다는 결단으로 나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두번의 자살 소동이 발생하는 <유로파>는 사실 목격자가 되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첫 번째, 아들 미셸의 죽음을 이레네는 놓치고 만다. (이것은, 실제로 어린 아들 로마노를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로셀리니에게는 아들에게 헌정한 <독일 영년>에서의 추락 이후 거듭하기 어려운 이미지였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후반부에 이레네가 입원한 정신병동의 한 여성이 창문에 머리를 매달 때 이레네는 그녀에게 다가가 얼굴을 쓰다듬는다. 여기서 영화는 이레네의 뒤늦은 목격을 옹호하는 숏-역숏을 마련한다.

세계의 우직함과 충돌할 때마다 구원의 문제를 탐구하던 로셀리니의 ‘시몬 베유식’ 여자는, 2025년의 유럽 대륙(continental)에서는 고해성사가 일종의 퍼포먼스와 다름없어진 현대적 개인으로 변형되었다. <콘티넨탈>의 배경인 트란실바니아가 루마니아와 헝가리 사이의 첨예한 역사를 관통하며 복수의 민족과 문화를 마구 집어삼켰듯, 거기 속한 오르솔리아는 더는 세계와의 마찰을 시도할 근력이 없는 인물이다. 영화에서 그녀는 주체는커녕 정말 개체쯤으로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이한 가치들이 상충하는 딜레마적 상황이나 이에 따라 변모하는 인물의 심리 상태가 아니다.

대부분의 장면이 대사가 범람하는 롱테이크로 이뤄진 이 영화에는 관객에게 각인될 만한 이미지랄 것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몇몇 대사로 오르솔리아에 관한 정보가 파편적으로 제시되는 것 이외에 영화는 그녀를 구체적인 인물로 만들 생각 또한 없다. 많은 극영화가 인물에게 전사와 욕망을 부여함으로써 개성적 주체로서의 페르소나로 발전시키거나 또는 일종의 원형(archetype)으로 정립시키려 할 때, 주데는 자율적 존재들이 활동하는 자연으로서의 장(場)을 전개할 뿐이다.

목격자, 포섭되지 않는

<콘티넨탈 ’25>

대신 오르솔리아가 <유로파>의 이레네와 대비되는 하나의 특징적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그녀가 처음부터 목격자라는 점이다. 이레네에게는 여러 실패를 통과하고서야 가능했던 목격자의 위치가 오르솔리아에게는 이미 부여되어 있다. 목격이 비극의 시발점이라는 것. (짓궂은 헌병대는 이 상황을 카메라로 촬영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일이라는 사실.) 그녀는 심폐소생술을 진행했고 구급차를 불렀으며 진심으로 슬퍼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그녀는 목격자이지 죽음의 당사자가 아니다. 살아 있는 우리 모두는 당연히 죽음에 있어 절대적 주체가 될 수 없다. 역설적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이 사태에서 연신 고통을 진술하는 이는 오르솔리아다. (잠깐씩 등장하는 가족을 제외하고) 가까운 친구, 오랜만에 만난 제자, 조언을 구할 사제까지 크게 세번의 ‘공식적인’ 만남에서 그녀는 닭이 울기 전 예수를 세번 부인한 겁 많은 베드로처럼 자신이 이해받을 기회만 수동적으로 구한다. 목격자의 위치에서 당사자성을 취하려는 오르솔리아의 ‘이후’는 이레네와 달리 타자와의 연루를 통한 연대나 내적 고투에 따른 성찰로 진전될 기미가 없다.

그러니까 동시대란, 이 빈번하고 편재하는 관전의 자리가 부풀고 부풀다 도리어 우리가 스스로를 당사자라고 오해하는 궤적인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도 등장하듯 우리는 매일같이 학살과 전쟁을 본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목격’이라 할 만한 지금, 죽음은 너무 만연해서 아예 내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오르솔리아는 사무실 한편의 난방기를 보는 게 괴로워 그 앞을 괴상한 배너로 가리고, TV에서 양심의 문제에 당면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에드거 울머의 <우회>가 방영될 때는 마냥 잠들어 있다. 당대의 인간은 목격과 너무 가까워 목격에서 이만 멀어지려는 (비)의지로 수렴한다. 서로를 끊임없이 목격하면서도 공동에는 포섭되지 않는 개체들을 응시하는 묵시록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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