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국 감독의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을 보기도 전에 그의 신작 <단잠>을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보았다. <단잠>에서 카메오로 등장하는 한 배역이 기억에 남았다. 그는 주인공 수연(홍승희)이 고속버스에서 만난 낯선 이다. 그는 고속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수연에게 호의를 베푼다. 수연은 그것이 불편했는지 휴게소에서 버스를 타지 않는다. 그렇게 그는 빈 좌석을 바라본다. 상황은 되풀이된다. 고향에 도착한 수연은 친구가 일하는 카페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낯선 이와 다시 마주친다. 그는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때도 그녀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빈자리’다.
그 낯선 이는 아마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의 설희(여설희)일 것이다. 이광국의 두편의 영화는 설희라는 캐릭터로 느슨하게 연결된다. 유독 올해 한국영화는 빈자리를 응시했다. <부모 바보>에서 사라진 영진이 남긴 캠코더엔 짧은 의자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녹아내리는 얼음이 기록돼 있었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에선 정호가 사라졌고, 그의 텅 빈 작업실에 남겨진 두 여자는 뜻밖의 조우를 한다. <3학년 2학기>에서 누군가의 빈자리는 작업 현장에서의 사고로, 동료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노동의 참혹한 현실의 결과였다. <세계의 주인>에서 본 태권도장의 검게 그을린 벽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 <단잠>에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유골을 여전히 모셔두고 있었다. 언급한 영화들에서 빈자리란 이젠 그곳에 없는데 여전히 무언가가 잔존하는 상태였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은 이러한 연장선에 놓인 작품으로 빈자리를 응시한다. 명랑함을 표방하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의 겉모습과는 반대로 영화에 드리운 그림자는 깊다. 이광국 감독은 빈자리를 응시한 끝에 살짝 맺히는 ‘한 줄기의 희망’(A wing and a prayer)에 주목한다. 영화는 설희와 화정(우화정)의 로드무비다. 둘 다 면접을 보고 화정은 희망을, 설희는 절망을 체험한다. 설희는 카페 아르바이트 면접 자리에서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사회가 요구하는 그러한 질문에 설희는 빈칸으로 비워둔 채 살아간다. 취업 준비생인 화정은 잘 봤다고 생각하는 최종 면접의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일출을 보며 소원을 빌고자 떠난 이들의 여행은 화정이 최종 면접을 통과했다는 가정하에 출발한 즉흥 여행이다. 화정은 여기에 한술 더 뜬다. 화정은 혼자 살아보고 싶다고 설희에게 말한다. 사실상의 이별 여행이 된 셈이다. 같이 살던 화정의 갑작스러운 독립 선언으로 당황한 설희는 화가 난 채로 자리를 뜬다. 낯선 곳에서 길이 나뉜 둘은 혼자인 채로 여행을 시작한다. 영화는 늘 붙어 있던 두 친구를 낯선 곳에서 떨어뜨려 서로의 옆자리를 비워둔 상태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빛의 실패와 두개의 거울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은 둘의 우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영화는 옆자리를 비워둠으로써 서로를 끊임없이 의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대신에 우연한 만남으로 빈자리를 채우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옆자리뿐만 아니라 하늘도 비워놓는다. 두 친구는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을 자는 바람에 해돋이를 놓치고 만다. 그렇다고 카메라가 중천에 뜬 해를 비추지도 않는다. 달 역시 마찬가지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은 해도, 달도 없는 세계다. 그런 의미에서 둘의 여행은 밝은 낮 시간을 누비지만 실은 암흑 속에서 헤매는 느낌을 선사한다. 빛을 들이밀려는 순간이 있긴 하다. 설희는 어느 빈집에 매료돼 카메라를 꺼낸다. 하지만 카메라 셔터를 누르려는 참에 전화가 와서 사진을 찍지 못한다. 그녀는 왜 하필 빈집에 매료된 것일까? 화정도 비슷한 곳에 매료된다. 바닷물에 적신 부적을 해변가 근처 빈집 현관에 붙이고 소원을 빈다. 하지만 화정의 이러한 행동은 이상하다. 부적을 산 점집에서 무당은 화정의 사주에 물이 많으니 빛으로 말려야 한다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빈집의 이미지가 두 친구의 공허한 내면의 풍경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실패다. 두 친구 모두 무언가를 조명하는 데 실패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빛의 실패다.
팬데믹의 풍경을 제거하지 않은 채 고스란히 안은 이 영화의 풍경 속에서 감독은 사회적 거리를 좁히고 낯선 사람간의 대면 접촉을 통한 인간적인 빛, 즉 희망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스파크가 일어나야 하므로 두 친구가 겪는 우연한 만남은 곱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에게 생채기를 만든다. 설희가 만난 지안(서지안)은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괴롭혔던 한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기 위해 터미널에 있다. 하지만 그녀는 갑작스럽게 패닉이 오는 바람에 떠나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지안은 설희를 만난다. 오지랖이 넓어 보이는 설희가 지안에게 필요했던 존재인지도 모른다. 지안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많은 장벽들이 존재했다. 마스크는 기본이고, 공황이 찾아오면 지안은 우산을 펼쳐 세상과 단절해야만 했다. 다정하고 밝은 설희가 지안에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과거를 그녀에게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설희가 조명하는 것은 지안이다. 지안은 설희가 보낸 편지와 우산 덕분에 트라우마에 맞설 용기를 얻는다. 화정의 경우는 이와는 반대다. 잃어버린 애완 앵무새를 찾아 나선 여고생(여한나)이 화정을 조명한다. 둘은 앵무새를 찾아다니며 친해진다. 여고생이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구해주며 둘은 급속도로 친해진다. 하지만 화정이 면접 탈락 문자를 확인한 뒤 둘의 관계는 급격히 소원해진다. 화정은 여고생 친구의 장난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둘은 헤어진다. 하지만 감동은 뒤늦게 찾아온다. 화정과 설희는 다시 만났다가 싸우고 헤어진다. 화정은 혼자 상경한다. 그때 여고생에게 문자가 온다. 달을 찍은 사진과 함께 말이다. 그것을 보고 화정은 울기 시작한다. 그것은 무당에게 산 부적보다 더 값진 부적이 된 셈이다. 설희와 화정이 보고자 했던 태양 대신 스마트폰 액정 화면으로 우리는 달을 본다. 원하는 무언가를 얻는 것에 실패했지만 의외의 수확을 한 셈이다. 이것은 여행의 묘미일 것이다. 영화는 태양이나 달을 카메라로 비추지 않고 빛을 내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태양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알게 된 인연을 통해 영화는 빛을 생성한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에는 두개의 거울이 등장한다. 하나는 모래사장에서 발견된 깨진 거울이고, 다른 하나는 택시 안에서 발견된 멀쩡한 거울이다. 이 거울들은 인물들의 갈등이 봉합되는 과정을 상징하는 사물로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울처럼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의 불가능함을 역설한다. 즉, 타인을 경유해 반사된 이미지로서만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인을 통해 두 친구는 자신의 현재 혹은 잊고 살던 과거로 접속하고 또는 미래에 희망을 걸기도 했다. 이는 직접적으로 드러난 형태는 아니지만 나름의 시간여행인 것이다.
연기와 기억 사이
안선경, 장건재 감독의 <최초의 기억>은 연기를 통해서 이를 직접적으로 수행한다. 영화는 연기라는 픽션을 통해 과거의 첫 페이지인 ‘최초의 기억’에 도달하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타인이 그 기억에 접속하려는 시도이다. 타인에 의해 발화되는 최초의 기억이 실제 기억과는 무관하다는 점 역시 눈길을 끈다. 단순히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을 넘어선 타인 되기가 이 영화가 돌파하려는 지점이다. <최초의 기억>은 총 3개의 챕터로 구성됐다. 첫 번째 챕터는 영화 속 영화인 ‘최초의 기억’, 두 번째 챕터는 ‘연기 워크숍’, 세 번째 챕터는 ‘모방 독백’이다. 영화는 시간순으로 진행되지만 왠지 순서가 뒤바뀐 듯한 인상을 준다. 이유는 으레 워크숍의 결과물을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초의 기억>은 연기 워크숍의 결과물인 영화를 먼저 보여주고 그것을 만드는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놓는 후일담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워크숍의 방점은 영화 만들기가 아니라 모방 독백에 있다. 새삼스럽게 보자면 이 워크숍은 ‘영화’가 아니라 ‘연기’ 워크숍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돼보는 연기는 ‘나’라는 일종의 필터를 제거할 수도 없는 까다로운 작업이다. 워크숍을 진행하는 연기 선생님 송문(박종환)은 연기라는 행위 안에는 나와 타자가 공존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방 독백에 앞서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 이들에겐 중요한 선행 작업으로 보인다. 워크숍에 참가한 인물들이 ‘최초의 기억’이란 영화를 만들면서 시도했던 것은 자신의 기억을 꺼내는 작업이었다. 두 번째 챕터에서 인물들은 다 같이 영화를 보며 작업 과정에 대해 논한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영화 ‘최초의 기억’에서 배우들이 자기 기억의 일부를 가져와 캐릭터를 빚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기억을 꺼내어 마주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몇몇 참가자들은 힘들어했다고 고백한다. ‘최초의 기억’의 메이킹 영상이 있다면 보고 싶지만,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두 번째 챕터에서 이 영화에 참여하지 않은 선영(엄선영)과 동윤(강동윤)이 모방 독백 짝을 이뤄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아마도 ‘최초의 기억’에서 인물들이 겪었던 일련의 과정에 해당할 것이다. 다양한 사연을 지닌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감정이라면 ‘공허함’일 것이다.
‘최초의 기억’은 워크숍 참가자들의 개인사를 반영한 각본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후일담을 통해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배우들이 수행하는 연기와 자신의 기억이 공명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이들의 연기가 즉흥연기였고 리허설 없이 촬영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현장은 아마도 자신의 일부를 꺼내어 캐릭터를 만들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인 현장임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후적인 해석일 뿐이다. 첫 챕터를 볼 때는 온전히 픽션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기억’도 빈자리로 시작한다. 금주(이금주)는 조수석에서 밖을 내다본다. 그녀의 시선은 불안하다. 차 밖에서 그녀의 애인인 동근(서동근)은 이들이 만나려고 하는 친구 민주(강민주)와 통화 중이다. 금주의 눈에 무언가를 빼앗길 것만 같은 불안감이 진동한다. 그래서인지 금주는 여행 내내 동근의 속을 긁는다. 은경(조은경)과 요선(백요선) 커플도 마찬가지다. 활달한 요선과 달리 은경은 조용하다. 이들은 같은 곳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으로 사내 비밀 커플이다. 은경은 다른 직원과 희희낙락 수다를 떠는 요선을 바라보며 묘한 질투를 느낀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캐릭터는 금주와 은경이다. 금주의 빈자리엔 아버지가 있다. 중학생 때부터 아버지와 같이 살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동근을 괴롭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채울 수 없는 빈자리. 하지만 이것은 영화 속에 한정되어 있다. 두 번째 챕터인 현실로 넘어와서 금주가 어떤 가정사가 있는지를 영화는 온전히 보여주진 않는다. 금주가 현실과 픽션의 경계의 모호함을 유발시키는 인물이라면, 은경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은경은 과묵하고 속내를 알 수 없다. 그렇게 연기를 했던 이유를 두 번째 챕터가 시작하면서 알게 된다. 하지만 은경이 하는 독백이 실제 자신에 대한 것인지 영화 캐릭터 은경으로서 하는 독백 연기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은경의 독백으로 앞서 본 영화 속 은경이 왜 요선에게 그런 행동을 했는지 가늠할 뿐이다.
연기 워크숍의 최종 단계인 모방 독백에서 이 두 그룹이 보여준 연기를 보며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직접적으로 와닿는 감정은 따로 있다. 하나는 연기 선생님 송문이 자신의 최초의 기억을 독백하는 장면이다. 다른 하나는 선영과 동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감정의 레이어를 충분히 쌓은 뒤 선보이는 모방 독백이다. 이들의 모방 독백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배려의 픽션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다른 두 그룹이 흘리는 눈물에 감정적 동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공감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형언할 수 없는 상당히 모호한 형태의 정념일 테다. 거울을 보듯이 인물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독백했다면 시시했을 것 같다. 영화가 택한 것은 서로의 등을 맞댄 야누스 조각상의 형태다. <최초의 기억>은 모방 독백을 통해 나이자 타인이고 동시에 둘 다 아닌 상태의 형상을 포착한다. 거울로 들여다보는 것보다 타인을 경유해 귀로 듣고 등을 타고 느껴지는 또 다른 나의 기억. 그것은 실재하지 않지만, 무엇보다 최초의 기억에 가장 가깝게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