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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어쩔수가없다 각본>
진영인(번역가) 사진 백종헌 2025-11-18

박찬욱, 이경미, 돈 맥켈러, 이자혜 지음 을유문화사 펴냄

영화 각본집을 읽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쩔수가없다>각본집은 맨 먼저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흐르는 범모와 아라와 만수의 이층집 신을 찾아서 펼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만수는 범모를 죽이기로 계획은 했으나 아직 어설프고 무얼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는 상태다. 지문을 보면 범모는 조용필 노래를 감상하느라 안락의자에 늘어져 있고, 만수는 “이 가련한 무방비 상태의 사내”를 내려다본다. 눈을 뜬 범모는 “그래, 우리 둘이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겠지”라고 상대를 단단히 오해한 채 비장한 대사를 외친다. 그리고 만수가 총을 가리려고 몇겹씩 손에 씌운 장갑을 가리키며 “요리하다 생각해 보니 막 갑자기 아라를 독차지하고 싶어졌어?”라고, 비장한데 웃긴 대사를 한마디 더한다. 이쯤 읽으면 귓가에서 “엄마야, 나는 왜!”라는 애절하고도 간드러진 노래가 엄청난 볼륨으로 감돌고, 만수가 장갑을 벗고 또 벗어서 랩에 둘둘 만 권총을 보여주는 장면이 생각난다. 셋이 총을 노리고 피를 흘리며 끈적한 몸싸움을 하는 장면도 떠오른다. 박찬욱 감독의 전작 <박쥐>를 떠올린 관객이 있을 것도 같다. 범모의 미련함에 만수와 아라처럼 속이 터질 것 같고, 그 와중에 범모가 또 불쌍하고, 범모와 사실 그리 다르지도 않은 만수가 한심하고 웃기고, 애증을 총알처럼 폭발시키는 아라의 모습에 압도당한 영화 관람의 기억이 각본집을 통해 되살아난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어딘가 답답하면서도 통쾌한, 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총 두방 맞는다고 죽냐?” 같은 실없고도 심각한 대사는 글로 읽어도 웃음이 난다.

뒤이어, 댄스파티를 뒤늦게 기억하고 연회장으로 간 만수의 어색한 춤도 확인해보자. 지문에 따르면 만수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으려는 생각에 춤추듯 몸을 흔들고 좌우로 움직이며 군중을 헤치고 전진하여 점점 미리와 가까워진다”. 저 지문 한줄이 살인을 저지르고도 어떻게든 약속을 지키겠다고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고 와서는 멀리 춤추고 있는 아내를 목격한 만수의 그 묘한 표정, 그리고 푸르스름한 연회장 조명 아래 사교댄스를 과연 배운 게 맞기는 한지 의심스러울 만큼 몸을 기묘하게 흔드는 몸짓으로 구체화되어 관객 앞에 나타나다니 배우의 연기며 무대의 색채, 카메라의 구도 등등 모든 것이 훌륭하다는 생각만 드는데, 그러면서 웃음이 자꾸 나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이 영화가 좋다 혹은 싫다로 의견이 갈릴 수는 있지만, 연기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어디 하나 부족한 구석이 없다는 점에는 다들 동의할 것 같고 그 토대에 이 탄탄한 각본집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거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 안 하면 앞의 두 사람 죽음을 헛되게 하는 거잖아. 개죽음 안 만들려면 어쩔 수가 없잖아.”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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