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니아>를 말하기 전에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성을 상상하며 글을 출발하겠다. 처음 <지구를 지켜라!>(2003)의 리메이크 소식을 접했을 때 아리 애스터 감독이 제작을 맡고 원작 감독인 장준환이 연출이 맡는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이뤄지지 않았고,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연출을 맡게 된다. 장준환 감독이 만들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프로젝트 초기에 왜 그가 감독으로 거론됐던 것일까? <지구를 지켜라!>엔 번역 불가능한 지점이 존재한다. 특유의 B급 감성이 영화 전반에 깔렸다. 영화는 2000년대 초반의 유치하고 엽기적인 무드를 물씬 내뿜는다. <지구를 지켜라!>는 당대 한국의 시대적 감수성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그 감성 자체를 2020년대에 그대로 이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것을 따로 떼놓고 <지구를 지켜라!>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영화의 인장은 리메이크 시 난제가 된다. 또한 배우의 몫도 너무 큰 영화다. 배우 신하균은 멀끔한 용모로 코믹하면서 광기 어린 병구 역을 훌륭히 소화해낸다. 강단과 유약을 오가는 병구는 다소 복합적인 감정을 관객에게서 끌어내는 캐릭터로 이 역할에 어울릴 만한 배우를 찾는 것도 어려움이 따른다. 여기에 순이(황정민)의 존재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장준환 감독이 <지구를 지켜라!>할리우드 버전을 만들었다고 가정해도 이 영화의 특수성을 답습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지구를 지켜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무드는 리메이크 과정에서 가장 먼저 폐기 처분해야 할 1순위다. 그러면 남는 것은 납치, 감금, 고문 그리고 탈출이라는 일련의 탈출 서사다. 범죄 현장이기에 이들을 쫓는 형사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다. 쫓고 쫓기는 탈출극으로서도 <지구를 지켜라!>는 손색없는 작품이다.
란티모스가 <부고니아>의 적임자일까?
장준환 감독은 <지구를 지켜라!>로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3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했다. 예외적인 <1987>(2017)을 제외하면 <지구를 지켜라!>와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에서 보이는 모종의 연결고리는 납치, 감금, 고문 그리고 탈출로 이어지는 서사구조도 있지만 더 핵심은 세상과 유리되어 파국으로 치닫는 남성을 그린다는 점이다. <지구를 지켜라!>리메이크의 핵심은 이 부분에 있다고 생각한다.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를 잠시 살펴보면 화이(여진구)는 범죄 집단에 납치되어 길러진다. 삐뚤어진 남성성을 표출하는 범죄 집단의 리더 석태(김윤석)는 화이에게 살인을 명령한다. 화이가 죽인 사람은 그의 친부다. 장준환의 인물들은 가족의 문제로 범죄를 저지른다. 이러한 잔인한 선택으로 내몰리는 점은 란티모스와 친연성을 갖는다. 란티모스는 일종의 실험실의 과학자다. 그는 유폐된 장소를 골라 말도 안되는 상황에 인물들을 풀어놓고 바라본다. 바깥을 상상하기를 불허한 장소에서 어떻게 하면 바깥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가 그의 테마다. <킬링 디어>(2017)에서 한 소년은 수술 과정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고 의사에게 저주를 퍼붓고 그것에 사로잡힌 의사는 자신의 가족 중 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 몰린다. 가족을 두고 윤리와 도덕의 선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송곳니>(2009)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다. 이 영화에 나오는 자녀들은 <가여운 것들>(2023)의 벨라(에마 스톤)처럼 뇌와 신체의 부조화를 겪는다. 다 큰 자녀들은 어린아이에 머무른 채 세계를 다시 학습한다. 학습보다는 동물 조련에 가깝다. <더 랍스터>(2015)처럼 동물화하는 인간, 인간이란 틀을 넘어서려는 극단성이 란티모스에게 존재한다. 다시 <송곳니>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무언가로부터 자녀들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 집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송곳니가 빠지는 것이다. 영구치이기에 송곳니는 자연적으로 빠질 수 없다. 외부의 충격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신의 일부를 뽑는 행위지만 가족공동체를 와해시키는 행위이기도 하다. 송곳니를 강제로 뽑아버릴 만한 사건이 발생하고 탈출이 시작된다. 이렇듯 기존의 체계를 붕괴시켜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고 탈출을 감행하는 것에 있어서 장준환과 란티모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렇다면 란티모스가 <부고니아>의 적임자일까? 그가 즐겨 하는 서사구조로 보자면 적임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부고니아>에서는 그가 지닌 극단성을 표출하지 않았다. 대중적으로 블렌딩한 프로젝트로 충분히 재미있지만 좀더 극한으로 밀고 나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구를 지켜라!>와 <부고니아>의 차이점은 온도에 있다. 장준환은 뜨거운 영화를 만들고, 란티모스는 차가운 영화를 만든다. 온도차를 만드는 것은 우선 플래시백에 있다. 병구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은 그의 불우한 인생사가 빌드업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적인 신파성이 묻어나는 연출로 번역이 불가능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란티모스는 설명적이지 않다. 그는 인물의 전사를 보여주지 않고 관객에게 상상하게 만든다. <부고니아>엔 단 두개의 흑백 화면의 플래시백이 등장한다. 그마저도 되게 비현실적인 연출을 선보이기에 감정이 동요되지 않는다. 감정이입이 차단하는 주된 이유는 촬영에 있다. 그의 인장이 된 광각렌즈로 표면을 훑는 방식의 촬영이 이에 해당한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에선 어안렌즈를 극단적으로 사용하며 인간의 시선을 넘어선 동물화된 시선 혹은 바깥의 시점으로 영화의 세계를 바라본다. <부고니아>에서 이러한 촬영은 두드러지진 않지만, 훔쳐보는 듯한 시선은 감정이입을 가로막는다. 동시에 이는 외계인이 지구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존재하는 <부고니아>에 적합한 형식이 되기도 한다.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본 지구의 모습은 가히 놀랍다. 그것은 월식 일정을 카운트다운하는 <부고니아>의 챕터 이미지다. 그 이미지는 지구 평면설이 주장하는 원반 형태의 지구다. 영화를 한번밖에 보지 못해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테디(제시 플레먼스)가 지구 평면설을 믿는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심취한 것은 외계인이 지구를 파괴할 것이라는 음모론이다. 그것이 지구 내부에서 바깥을 바라본 시선이라면 이에 맞서는 외부의 시선으로 지구 평면설을 등장시킨다. 멀리서 보면 <부고니아>는 음모론에 음모론으로 맞서는 코미디쇼다. <지구를 지켜라!>와 <부고니아>에 관류하는 것은 바로 음모론이다. 음모론과 그것에 심취한 남성 그리고 억압하고 표출하는 남성성이야말로 <부고니아>가 놓쳐선 안될 지점이다. 이 영화에 거는 기대는 그것을 탐구한 아리 애스터 감독이 <부고니아>제작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란티모스가 그것을 성취했을까?
<지구를 지켜라!>로부터 20년 이상 훌쩍 지난 지금 시점에서 음모론은 다른 위상을 지닌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다루는 음모론은 세기말에서 2000년대 초반 시기에 형성된 종말론적 불안의 징후 중 하나로 보인다. 영화에서 병구는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이들과 어머니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이들에 대한 사적 복수를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음모론을 맹신한다. 지구를 지킨다는 사명감은 허울만 근사할 뿐 병구에게 시급한 것은 복수다. 하지만 병구는 기껏 강 사장(백윤식)을 납치해서 속 시원한 복수를 하지 못한다. 병구의 총구가 향한 곳은 강 사장이 반사되어 비치는 거울이다. 이는 희망이 제거된 자의 무력한 몸짓이다. <부고니아>에서 다루는 음모론이란 포스트-트루스(Truth) 시대의 반영이다. 테디는 유튜브를 통해서 보는 콘텐츠로 인해 확증편향이 심해지는 인물이자 동시에 그러한 콘텐츠를 만드는 크리에이터다. 믿고 싶은 것이 진실이 돼버리는 시대 한복판에서 고립된 인물로 테디와 그의 사촌 동생 돈(에이든 델비스)이 있다. 원작과 동일하게 테디는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음모론을 끌어들이긴 하지만 독특한 것은 생태학적인 접근으로 음모론을 시작한다는 점이다. <부고니아>의 시작과 끝을 보면 인류세적인 영화로 분류 가능한 특이성을 보인다.
<부고니아>는 꿀벌 소리로 시작한다. 이후에 꽃가루를 나르는 꿀벌의 이미지를 보여주며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테디가 걱정하는 것은 꿀벌이 사라지고 있는, 이른바 군집붕괴현상이다. 꿀벌이 벌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으면 벌집에 남는 것은 여왕벌과 애벌레뿐이다. 테디는 이 모든 원인을 CEO 미셸(에마 스톤)에게로 돌린다. 그녀의 회사에서 만든 살충제가 생태계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그 배후엔 외계인이 있다는 것이 테디가 믿는 진실이다. 그는 아마도 자신을 꿀벌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월식이 오면 자신을 비롯한 인간과 지구가 사라질 것이라는 위기감에 테디는 사로잡혀 있다. 테디와 돈은 미셸을 납치하는 데에 집중한다. 운동을 하며 신체를 단련하는 것을 넘어서 이들은 잡념을 없애려고 화학적 거세를 위해 주사를 맞는다. 테디에겐 제거된 남성성과 통제할 수 없는 세상으로부터의 무력감에 대한 보상으로서 음모론이 자리한다. 이들이 맞설 상대인 미셸은 격투기 시합을 나갈 사람처럼 미친 듯이 운동한다. 테디와 돈이 미셸을 납치하러 갔을 때 둘은 그녀를 쉽게 제압하지 못한다. 이들보다 지적으로,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거의 모든 면에서 우월한 존재로서 미셸이 존재한다. 왕족인 외계인일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을 때 이들은 미셸의 편의를 봐주며 비로소 우월하게 바라본다. 남성성을 제거했지만, 여전히 전통적 위계에 사로잡힌 남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에 사촌 동생 돈에 대한 설명이 부재하다. 테디에게 감화된 돈은 무조건적으로 테디의 말에 복종한다. 테디의 말을 믿고 화학적 거세를 위해 주사를 맞는다. 아마도 테디는 그를 일종의 실험 대상으로 여긴 것 같다. 자신도 주사를 맞았다고 말하지만, 거짓말로 보인다. 그 주사의 부작용이 발현한 것으로 보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지하방에서 돈은 미셸을 감시한다. 미셸은 자신을 풀어주면 우주선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그를 구슬린다. 이곳을 벗어나 바깥을 상상하게 유도하는 미셸의 바람과 달리 돈은 총구를 자신의 머리로 향한 뒤 방아쇠를 당긴다. 주사의 부작용이었을지도 모른다. 남성성 제거로 인해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고 스스로 좌초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반면에 테디는 생존을 위해 지구 바깥을 상상하지만 자신의 몸에 두른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실패한다. 자의든 타의든 두 남성은 지구를 지키지 못한 채 자멸한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해석일 뿐이다. 란티모스의 주된 관심은 미셸이다. <부고니아>는 페르소나인 에마 스톤의 수난을 다룬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와 <가여운 것들>에서 그는 여성이 억압된 시대를 배경으로 주체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다시 써나가는 여성을 그린 바 있다. <부고니아>에선 엄밀히 말하면 미셸은 여성의 몸을 한 외계인이다. 테디의 고문으로 수난을 겪는 미셸의 신체 중 란티모스가 주목한 곳은 그녀의 얼굴이다. 우주선과의 교신을 차단하기 위해 미셸의 머리는 밀리고 몸 전체는 하얀 크림이 뒤덮인다. 이후에 그녀의 얼굴에 돈의 피가 뒤범벅되며, 하이라이트는 폭탄이 터지면서 참수된 테디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로 날아와 그녀를 기절시킨 것이다. 이후 지구에서 탈출해 우주선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끈적한 액체 속에서 정화되며 자신의 본모습으로 돌아온다. 란티모스는 고통과 정화의 영화적 장소로 에마 스톤의 얼굴을 가학적으로 탐미하는 감독이다.
두 영화 엔딩의 다른 뉘앙스
란티모스의 가학적인 면모는 마지막에서 발휘되지 못한다. 지구 자체를 폭파해 없애버리는 <지구를 지켜라!>의 엔딩과 달리 <부고니아>는 지구에서 인간만 멸종시킨다. 미셸은 우주선에서 뾰족한 침으로 지구를 덮고 있는 투명한 막을 찔러 터뜨린다. 그 즉시 지구에서 인간이란 종은 모두 죽는다. 세계 여러 곳에 시체가 널린 장면이 몽타주된다. 그 막은 마치 브뤼노 라투르가 말하는 ‘임계영역’을 떠올리게 한다. “임계영역이란 지구의 표면, 즉 ‘대기권과 기반암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수킬로미터의 얇은 생물막’을 가리킨다.”(김홍중, <가 까스로-있음>) <부고니아>속 임계영역에서 파국을 맞이한 것은 오직 인간이란 종뿐이다. 김홍중은 파국을 “‘시간의 끝’이 아니라 ‘끝의 시간’, 끝 이후에 펼쳐져가는 시간”이라 말한다. <부고니아>는 바로 ‘끝의 시간’을 엔딩으로 보여준다. 이는 인간의 시선, 인간의 시대 너머를 바라보는 란티모스의 극단성을 보여주는 <부고니아>의 짧지만 강렬한 순간으로 여전히 그를 궁금하게 만드는 영화의 가능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