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무서운 이야기는 극장 밖에서 들려온다. 그러나 스크린만큼 흉흉한 소문을 먹음직스럽게 차려놓는 장소도 드물다. 정치적 이슈는 그만큼 호러의 신선한 재료가 될 자질을 가졌다. 현실에서 공포를 조장해 세력을 모으려는 수사가 남발될 때, 영화는 그 전략을 차용해 관객을 끌어들인다. 어쩌면 정치인과 영화인은 모두 얼마나 미더운 거짓말을 꾸며낼 수 있을지 궁리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자회사 뉴라인시네마와 더불어 워너브러더스가 구사해온 호러 필모그래피도 2025년 1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2기가 출범한 이래 한결 흥미로워졌다. 1기에 해당하는 2017년 이후 4년간은 <애나벨: 인형의 주인><더 넌><요로나의 저주>등 <컨저링>유니버스 스핀오프들이 차례로 개봉했고, 스티븐 킹 소설 원작 <그것>과 그 속편이 장르 팬을 넘어 대중의 지지를 받아 크게 흥행했다. 반면 당시 풍자적 호러의 선두 주자는 블룸하우스였다. 조던 필의 이름도 하나의 현상으로서 거듭 호명되었다. 블룸하우스가 제작하고, 유니버설 픽처스가 배급한 <겟 아웃>으로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만끽한 그가 <어스>로 소포모어징크스에 어퍼컷을 날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비교적 깔끔하게 떡밥을 회수한 <겟 아웃>에 비해 <어스>는 그 장황함으로 종종 비판받았으나, 미국(US)이라는 ‘우리’(us)를 자문하는 메시지만큼은 누구도 비난하지 못했다.
또 한편의 블룸하우스 영화이자 <더 퍼지>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더 퍼지: 심판의 날>도 정치적 맥락에서 자주 회자되었다. 12시간 동안 살인을 포함한 범죄행위 일체를 허용하는 ‘퍼지 데이’ 존치 여부를 두고 다투는 대통령 후보들을 그린 감독 제임스 디모너코는 영화를 2014년부터 기획했지만, 극 중 극우 후보의 모습이 “더 트럼프처럼 보일 수 있도록” 다듬었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해당 인터뷰를 보도한 <가디언>은 “미국을 다시 피투성이로”(Making America Gory Again)라는 헤드라인으로써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만들겠다는 그분을 비웃었다.
당신의 무기가 당신을 공격하리라
다시 2025년 워너브러더스 라인업에 초점을 맞춰보자. <미키 17><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와 같은 대작이 트럼피즘(Trumpism)에 대한 직접적인, 때로 노골적인 리액션을 과시할 때 언뜻 워너표 호러는 여전히 <컨저링: 마지막 의식><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으로 프랜차이즈 명맥 이어가기에 집중한 것만 같다. 하지만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동시대적 공포를 구현한 세편의 영화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북미를 기준으로 각각 2025년 1월, 4월, 8월에 처음 공개된 영화 <컴패니언><씨너스: 죄인들>(이하 <씨너스>), 그리고 <웨폰>이야기다. 이들은 비밀스러운 화법으로 세태를 은유하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고어로 무장했다.
호러로 분류하기에 애매한 감이 있는 <컴패니언>은 AI 로봇이 주인공인 SF 스릴러에 가깝다. 감독 드루 행콕은 <인디와이어>팟캐스트에 출연해 도리어 이 영화가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를 지향한 “이별영화”라 공언하면서도 “이 시나리오가 내 유일한 작품이 될 수도 있으니 하이스트, 호러, 연인을 다룬 스릴러 모두를 쏟아부으려 했다”고도 전했다. 그러니 호러의 자장에서 <컴패니언>을 독해하려면 이 영화가 공포의 대상으로 지목하는 게 무엇인지부터 살펴야 한다. 인공지능이 핵을 터뜨리는 <크리에이터>나 ‘사탄의 인형’처럼 진화하는 <메간>의 사례를 돌이켜봤을 때 <컴패니언>의 AI 애인도 만만치 않게 위협적이다. 한데 <컴패니언>은 AI를 안티히어로의 위치에 둔다. 그 명분이 되어주는 게 바로 ‘통제’라는 키워드다. 이 영화 속 첨단기술은 개인의 취향을 핑계 삼아 폭력성을 용인하는 무기로 작동한다. 연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가스라이팅과 그루밍이 그 예시로 제시된다. 그래서 인간 남자가 조작한 여성형 로봇은 자기 실체를 자각하고부터 각성한다. 지력과 근력을 두루 업그레이드해 자신의 지능을 100점 만점에 40점에 불과하게 세팅해둔 전 남자 친구의 뒤통수를 후리는 것이다.
이 싸움은 페미니스트 호러라는 하위 장르의 계보를 충실히 이을지언정 현실 정치에 대한 코멘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 모른다. 다만 영화평론가 에릭 콘이 연초에 <할리우드 리포터>에 적었듯 “스크루볼코미디가 대공황 시절에 필요했던 유쾌한 탈출구를 제공했다면, 지금 일부 미국인은 비명을 지르고 싶어 한다”. 지난해 인상적인 족적을 남긴 <서브스턴스><노스페라투><스마일2>를 들어 호러 붐 경향을 짚은 그에 따르면 “극장이라는 따뜻한 공간에서만큼은 종말적 공포를 해소할 수 있다”. 결국 현시점 미국 영화 관객이 갈구할 법한 카타르시스는 정국의 망조를 극복할 민주시민의 주도권 회복이 아닐까.
그 욕망이 오장육부와 함께 폭발하는 <웨폰>은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물론 잭 크레거 감독은 <웨폰>이 사적인 경험에 기반을 둔 작품이라고 했다. 그와 코미디 극단을 결성하고, TV시리즈를 만든 친구가 실족사한 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들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는 한 학급을 이루던 17명의 어린이가 한날한시에 사라진다. 그 교실에서 유일하게 사라지지 않은 아이와 그 반 선생, 동네 경찰 등이 각자의 시선에서 사건의 전말을 밝힌다. 전작 <바바리안>으로 ‘다락방의 미친 여자’ 서사를 다시 쓴 잭 크레거는 여기에 ‘지하실의 미친 여자’를 소환한다. 마녀로 짐작되는 여자는 분장으로 본색을 감추고, 주술로 약자들을 통제한다. 약자들을 무기화(weaponize)해 신체를 강화하기 위해서다.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지지자들을 결집시켜 자가당착의 논리를 공고히 하는 누군가가 연상 된다.
빨간 모자 줄까? 파란 모자 줄까?
AR-15형 소총 모양을 한 구름을 띄우고, 베트남전 당시 찍힌 사진으로 알려진 일명 ‘네이팜탄 소녀’의 팔 벌린 자세를 실종 아동들의 마지막 포즈로 따온 감독은 이 기묘한 소동으로 트럼프 시대의 시스템 부재와 전쟁 후유증을 암시한다. 최종장에 이르러 반격을 당하는 마녀의 신체는 당신이 써먹은 무기가 당신을 공격하리라는 경고에 다름없다. 작가이자 프로듀서인 데버라 굿윈이 온라인 매거진 <토크하우스>에 기고한 것처럼, 그렇게 찢기는 신체가 왜 노인 여성의 것이어야 했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영화가 겨냥하는 문제를 키워온 집단이 누구인지를 안다면 그래서는 안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씨너스>가 아프리카계, 아시아계, 유럽계 미국인을 남녀노소 불러모아 펼친 난장을 기억한다면 <웨폰>의 백인 마녀는 약과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크리드><블랙팬서>를 지나 <씨너스>에서도 흑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그 흑인 남성이 얼마나 무결한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씨너스>에 이르러 정체성 정치의 맹점과 한계를 적극적으로 논평하기로 작정한 듯 보이는 그는 한쪽을 편들기보다 편 가르기를 유도하는 자들을 뱀파이어에 빗댄다. 햇빛을 두려워하는, 타인의 피를 빨아야 사는 존재들 말이다. <씨너스>가 빨간 모자와 파란 모자를 일란성쌍둥이에게 나눠 씌운 것도 그래서다. 예로부터 타자화에 능한 장르인 호러로써 타자화 자체의 공포를 설득한 셈이다. 우리를 불안에 떨게 하면서도 얄궂게 보호해주는 맹목적 믿음. 2025년 워너브러더스의 필모그래피는 그 허상을 핏빛 우화로 폭로하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