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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교류하고 섞이고 풀어내다, 제38회 도쿄국제영화제
이유채 2025-11-06

파격보다는 품위를

안도 히로야스 도쿄국제영화제 위원장에게 평생공로상 수상을 축하하는 꽃다발을 받는 요시나가 사유리.

올해 도쿄국제영화제(이하 도쿄영화제)는 선배 세대에 대한 경의로 막을 올렸다. 개막식 후반, 기모노 차림의 배우 요시나가 사유리가 개막작 <삶을 위한 등반>의 주연배우로 무대에 올라 인사를 전한 뒤 돌연 암전이 찾아왔다. 곧 안도 히로야스 도쿄영화제 위원장이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등장했다. 특별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된 그에게 축하를 전하기 위함이었다. 1957년 데뷔해 <삶을 위한 등반>이 124번째 출연작인 요시나가 사유리는 쇼와·헤이세이·레이와 시대를 잇는 국민 배우로, 여든살이 된 지금까지 주연 자리를 지켜왔다. “앞으로도 계속 영화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이끌어달라”는 포부 섞인 그의 소감에 객석에서는 지지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갈 방책을 영화적 유산에서 찾겠다는 영화제의 기조는 개막작 선택에서도 엿보였다. 중견감독 사카모토 준지의 연출작 <삶을 위한 등반>은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다베이 준코(요시나가 사유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휴먼드라마다. 투병 중에도 직업적 소명을 잃지 않고 젊은 산악인들의 등을 밀어주는 준코의 모습은 그와 같은 길을 가겠다는 일본 영화인들의 의지를 반영한 듯했다. 한편 상영 뒤 관객들 사이에서는 무난하다는 평이 주로 오갔다. 영화제가 파격과 모험보다는 안정과 품위를 택한 셈이다. 개막 3일차에는 또 다른 특별공로상 수상자인 야마다 요지 감독의 <도쿄 택시>가 아시아 프리미어로 공개됐다. 91번째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에서 그는 “일본영화가 황금기이자 오락의 왕좌로 불리던 시절에 영화를 시작한 사람으로서 지금의 엄격한 시대를 살아가는 영화인들이 안쓰러운 동시에 대견하다”며 서두를 열었다. 애니메이션의 굳건한 흥행과 실사영화 <국보>가 22년 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극장에 활기가 감지되고 있으나 여전히 지속적인 활동 방안을 모색하는 후배 일본 영화인들은 현역 선배의 말에 고개를 자주 끄덕였다.

현실의 문제들을 영화만의 방식으로 담다

<도쿄 택시>의 포토 타임을 가지는 배우 바이쇼 지에코, 야마다 요지 감독, 배우 기무라 다쿠야(왼쪽부터).

영화제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올해 경쟁작은 현재적 문제를 개성적인 영화적 기법으로 묘사한 영화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치야마 요조 프로그래밍 디렉터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각국 감독들이 자신이 주목하는 사회문제를 스크린에 담대하게 옮겨놓은 작품들”이라고 소개했다. 이탈리아 영화 저널리스트 카를로 샤트리안(심사위원장), 배우 계륜미, 프랑스 출신 편집감독 마티외 라클라우, 배우 겸 제작자 사이토 다쿠미, 중국 출신 감독 겸 프로듀서 비비안 쿠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은 “감동과 놀라움, 영화의 활력을 강조하는 영화”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개막 3일차인 10월29일 현재, 세계 최초 상영작 8편과 아시아 최초 상영작 7편으로 구성된 경쟁작 15편 중 10편이 관객을 만났다. 경쟁작 중 초반 화제작은 개막 첫날 상영한 말레이시아 감독 종 킷 아운의 네 번째 장편영화 였다. 사별한 여성 홍임(판빙빙)이 터전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인 이웃을 구하기 위해 영적 능력을 발휘하는 이야기다. 가부장제 사회 속 여성의 곤경을 다룬 작품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의식 장면이 스크린을 압도하는 하이라이트로 꼽혔다. 판빙빙이 참석한 관객과의 대화는 팬들로 활기를 띠었다. 도쿄영화제에서 최우수여우주연상을 받은 지 15년 만에 다시 이곳을 찾았다는 그는 “가짜 코를 붙이고 강력한 여름 모기를 100번 이상이나 물렸으나 큰 도전이 곧 큰 재미를 가져다주었다”며 호쾌히 웃었다. 개막식 레드카펫에 똑같은 금발 머리를 한 배우들로 이목 끌기에 성공한 사카시타 유이치로의 <블론드>는 28일 월드프리미어에서도 관심을 받았다. 두발 단속에 항의해 머리를 금색으로 물들인 학생들과 소동을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교사 이치카와(이와타 다카노리)의 대치와 화합을 담은 블랙코미디다. 시니컬한 유머를 품은 대사가 돋보이는 가운데 동시대 학교의 고민을 과감히 들춘다는 평가를 받았다. 29일에 최초 상영한 <항성의 저편>은 상영 뒤 박수가 길게 이어졌다. 도쿄영화제가 발굴한 젊은 연출자인 90년대생 감독 나카가와 류타로의 신작으로 임신한 딸 미지(후쿠치 모모코)가 오랫동안 불화한 시한부 엄마 가나코(가와세 나오미)와 보내는 마지막 시간을 담았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관객들이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 이유에는 살아 있음의 위대함을 영화적 재료를 총동원해 스크린에 담고자 한 연출자의 강한 의지가 있을 것이다. 카세트테이프에 봉인된 목소리, 자연물로 이은 미장센이 시공간을 초월한 연결의 감각을 선사한다. 고요한 영화와 달리 무대인사는 활기찼다. 감독이 아닌 배우로서 마이크를 쥔 가와세 나오미가 나카가와 류타로 감독과 배우 히로이치로(딸 미지의 남편 토시조 역)에게 농담을 건넬 때마다 두 남자는 수줍어했고 객석에서는 웃음이 퍼졌다. 29일 저녁에는 장률 감독의 신작 <춘수>(春树)가 첫선을 보였다. 자리 잡지 못한 여배우(바이바이허)가 고향으로 돌아가 회복해가는 과정이 자리를 꽉 채운 관객에게도 위안의 시간이 되어주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타지 생활로 고향 말을 잃은 주인공의 언어적 상실은 여러 비평가에게 해석의 단초가 되었고 한때 수많은 영화를 제작했던 옛 스튜디오의 철거 전 마지막 모습이 스크린에 포착됐을 때 노년의 시네필이 훌쩍였다는 후일담도 들려왔다.

교류하고 섞이고 풀어내다

경쟁작 <항성의 저편>의 나카가와 류타로 감독이 가와세 나오미와의 즐거웠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다양한 세계와의 교류’를 올해의 미션으로 강조한 도쿄영화제는 매일 크고 작은 심포지엄과 파티를 열어 네트워킹의 장을 현실로 만들었다. 특히 콘텐츠 마켓인 TIFFCOM에서는 풍성한 게스트 라인업과 세분화된 영상 비즈니스 상담을 통해 폭과 깊이를 모두 확장하겠다는 야심이 느껴졌다. 공들여 준비한 만큼 29일 개막 첫날, 넓은 하마마쓰초 행사장에는 전시 부스를 오가는 각국의 영상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실사판 시리즈 <원피스>총괄 프로듀서 후지무라 데쓰의 ‘일본 IP의 미래’를 주제로 한 기조 강연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 공동제작, 태국 BL(Boy’s Love)·GL(Girl’s Love) 흥행, 홍콩 스토리텔링 전략, 튀르키예 리메이크 시장 동향 등 다양한 영상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는 세미나의 열기가 뜨거웠다. 영화제 후반전에서의 교류의 핵심은 아시아 신인 창작자와 여성이다. 우선 올해 새로이 신설한 쇼케이스 섹션인 ‘아시아 학생 영화 콘퍼런스’가 10월31일부터 시작한다. 안도 히로야스 위원장이 “영화의 미래에 또 다른 새로운 길”이 될 거라고 자부한 15편 중에는 <엔진의 심폐소생>(감독 정혜인), <백파 이크>(감독 김은서) 등 한국영화도 다수 올라와 있다. 지난해 신설한 여성 역량 강화 섹션은 대화의 자리를 강화했다. 우선 11월1일에는 <쇼군>의 미야가와 에리코, <플랜 75>제작자 에이코 미즈노 그레이 등이 모인 심포지엄 ‘도쿄에서 세계로– 일본 여성 프로듀서, 세계로 나아가다’가 예정돼 있다. 11월3일에는 폐막작 <햄넷>의 감독 클로이 자오가 주축인 여성 크리에이터 토크 프로그램 <그녀의 시선>과 황혜림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참석하는 원탁토론 ‘여성 영화제의 힘’이 이어진다. 직접 경험한 도쿄영화제는 전통의 영화축제로서 오래된 나무를 가꾸고 새로운 씨앗을 심는 양쪽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몇해 안 남은 40주년이 기대되는 이유다. 10일간 이어지는 제38회 도쿄영화제는 11월5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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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도쿄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