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킹메이커>(2021)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 2016) 촬영 전부터 구상했고, <길복순>(2023)은 처음부터 전도연이라는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길복순>이 공개될 즈음 만난 자리에서 당신이 소설이든 역사적 사건이든 좋으니 영화화할 만한 아이디어가 없느냐고 물은 기억이 있다. <굿뉴스>작업에 착수하기 전, 창작자로서 이전과는 다른 기로에 서 있었나.
그랬던 것 같다. <길복순>에 대한 평이 호불호로 갈리지 않았나. 내가 잘하는 걸 더 해보고는 싶은데, 도전 의식도 생겼다. 그 당시 내 마음에 있던 어떤 짜증이나 분노가 <굿뉴스>에 영향을 줬다.
- 무엇을 향한 짜증이었나.
사람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고 하는 것에 대한 짜증. 뉴스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든 말이다. 그래서 영화의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명언(“진실은 간혹 달의 뒷면에 존재한다. 그렇다고 앞면이 거짓은 아니다”)부터 짓고 <굿뉴스>를 시작했다.
- 그 명언을 남긴 명사의 이름도 가짜로 지어냈다. 트루먼 셰이디라고. (웃음)
지금은 자세히 기억이 안 나지만 처음에는 그 이름이 아니었다. 괜히 명언을 전할 것 같은 외국인 이름, 그것도 중간에 약어처럼 한 글자가 들어가서 더 길어지는 이름을 원했다. ‘윌리엄 J. 어쩌고’ 이런 식으로. (웃음) 그랬다가 조금 의미가 담긴 이름으로 바꾸고 싶어 <트루먼 쇼>와 그늘이 드리워졌다는 뜻의 단어(shady)를 따와 ‘트루먼 셰이디’라고 정했다.
- 그 첫 대사가 실화를 재구성한 영화의 정체성과도 잘 어우러진다.
결국 명언도 어떤 권위가 부여된 것이다. 명언으로 무얼 가르치려 드는데, 그것조차 뻥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던 참에 일명 요도호 사건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기에 좋은 소재로 보였다. 일단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믿게 하려는 사람들의 의도가 담겨 있지 않나. 내게 중요했던 건 ‘속이는 행위’보다 ‘믿게 하려는 의도’ 였다.
- 어쩐지 수단과 목적을 논하던 <킹메이커>와도 통하는 테마다.
영화인 중에는 내 필모그래피에서 <킹메이커>를 제일 좋아한다는 사람이 많더라. 그런데 사실 나로서는 조금 부끄럽다. 애착은 심하게 큰 작품이지만, 거기서 너무 진중한 태도로 내 생각을 강요하지 않았나 싶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강조된 영화 같았달까. 그래서 이번에는 관객에게 생각할 여지도 주고, 그들의 뒤통수도 좀 싸하게 만들어보고 싶었다.
- 1970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끌리기도 했나.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그 배경에 끌리기보다는 관료주의를 충분히 비꼴 수 있겠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어찌 보면 요도호 사건의 하이라이트는 김포공항을 평양처럼 바꾸는 것일 텐데, 나는 그걸 그냥 극 중반인 3장에 짧은 에피소드로 놓았다. 그 전후로 벌어질 이야기들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피식피식 웃도록, 그러다 마지막에는 그렇게 웃는 게 조금 미안해지도록 하겠다는 못된 심보로 그런 구성을 짰다.
- 그 정서를 담당하는 게 아무개(설경구)와 고명(홍경)이다. 이번에는 재호, 창대처럼 전작에서 거듭 사용한 이름을 피했는데, 공들여 작명한 까닭이 있나.
인물의 이름을 고심한 게 처음이다. 원래 주변인 이름을 잘 가져왔다. 창대(<청춘그루브> (2010), <킹메이커>)는 늘 함께하는 스크립터, 현수(<불한당>)는 고등학교 친구, 은범(<킹메이커>)은 내가 아는 어느 매니저 이름이었다. 캐릭터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이름도 직관적으로 붙여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앞선 영화들보다 성의 있게 접근하려고 노력하면서 입신양명을 꿈꾸는 느낌을 주는 고명의 이름부터 지었다. 아무개라는 이름은 번뜩 떠올랐다. 그렇게 짓자마자 캐릭터에게 정감이 확 갔다. 관객에게 이 캐릭터를 좀더 알아가고 싶다는 호기심도 줄 법하고.
- 아무개는 <킹메이커>의 서창대(이선균)와는 다른 종류의 그림자다. <킹메이커>는 그 점을 표현하기 위해 명암을 적극 활용했는데, 이번에는 아무개의 구부정한 자세만으로 많은 게 설명되더라. 정작 배우는 아무개를 어떻게 극화해야 하는지 내내 미지수였다던데, 설경구 배우와는 어떤 대화를 나눴나.
아무개가 선배님 필모그래피 중 <오아시스>(2002)의 종두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사람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종두 같은 사람이 아니라 종두같이 보이고 싶어서 과장되게 연기하는 사람 말이다. 선배님은 일단 준비해갈 테니 감독이 알아서 정하라고 하셨는데, 선배님이 아무개로서 처음 대사를 뱉는 순간부터 아무개가 굉장히 이상해 보이더라. 그리고 그가 이상해 보여서 좋았다. 아무개는 주변인들이 가까이하기 싫어하는 인물이기를 바랐으니까.
- 그런데 주변인들은 아무개를 필요로 하지 않나.
그렇지. 다만 사람들이 가까이하기 싫어할 법한 모습이 아무개의 방어막이기를 바랐다. 그는 어차피 목줄이 채워진 개와 같은 존재인데, 주변과 가깝게 지내면 너무 많은 아양을 떨어야 하지 않겠나. 주위를 불편하게끔 만드는 게 그의 방패였을 것이다.
- 아무개는 “필요한 건 약간의 창의력과 그걸 믿으려는 의지”라는 말을 자주 한다. <불한당>의 재호(설경구)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을 믿으라 했고, <킹메이커>의 창대는 자기가 아니라 자기 욕심을 믿어달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무엇을 믿을 것인지를 넘어 믿으려는 마음 자체로 감독의 초점이 옮겨갔다는 게 확실히 느껴진다.
무의식적으로 쓴 대사들인데 내 안에 믿음에 관한 부정적인 관점이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사람을 잘 믿는다. 문제는, 그러면서 안 좋은 일들을 겪었다는 거다. 사람을 잘 믿기 때문에 믿음을 경계하는 것 같다. <굿뉴스>에 그 대사를 쓰면서는 요새 사람들의 행태를 떠올렸다. 일단 알고리즘부터가 우리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게 해주지 않나. 아무개는 그런 습성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인물이고, 그걸 이용하는 데 선수인 셈이다.
- 아무개는 그런 대사를 제4의 벽을 깨고 카메라 너머를 보며 뱉는다. 이런 장치들이 <킹메이커>의 아쉬움으로 남은 직접성을 반복하리라는 우려는 없었나.
이번에는 그런 장치로써 관객에게 거리감을 주고 싶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내가 홍경 배우에게 고명이 이 영화의 심장이라고 했다. 하지만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고명을 겪어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관객이 고명을 그저 지켜보기만을 바랐다. 한 인물에게 이입하는 게 아니라 이 군상을, 조금 더 세게 말하자면 이 군상들이 벌이는 ‘꼬라지’를 지켜보기를 원한 것이다. 어찌 보면 아무개가 없어도 이야기는 흘러갈 수 있다. 내용상 있는 인물이지만 없는 인물로 칠 수도, 누군가의 환상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개가 카메라 뒤에 있는 감독 같은 인물이라고 여겼다. 내레이션하면서 관객을 이 상황으로부터 조금 떨어트려놓는 거지. 그렇게 제4의 벽을 깨는 장면들이 몰입감을 깬다는 우려도 있긴 했으나 경구 선배님이 워낙 천연덕스럽게 잘해내셨다.
- 반면 고명은 공상의 이미지들로 대표된다. 그의 상상력은 야심에 부풀었을 때나 겁에 질릴 때나 어마어마하게 앞서나간다. 고명의 심경을 왜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싶었나.
<굿뉴스>는 재난영화일 수도 있다. 내게는 그 재난에서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신념을 가진 신파조의 영웅이 아니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사람들을 구하려는 반(反)영웅이 필요했다. 그런 캐릭터인 고명에게 줄 수 있는 재미가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아무개와 고명의 차이를 떠올렸다. 아무개는 아주 현실적으로 사고하고 제안하는 인간이다. 반면 고명은 겉으로는 그만큼 냉정한 척, 다 아는 척하지만 어린아이에 불과한 20대 청년이다. 그래서 무얼 하든 오버해서 생각한다. 그걸 상상의 장면들로 채우면 재밌을 것 같았다.
- 홍경 배우 또한 고명이 가진 야심과 본인의 20대를 겹쳐보았다고 하더라. 감독의 20대도 그러했나.
내 20대는 그리 야심차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더 야심차지 않나 싶다. 내 20대는 뭐랄까, 패배주의적이고 염세적이었다. 홍경을 보면서 시나리오를 많이 고쳤다.
- 예를 들자면.
경이는 이 이야기를 세대론으로 읽더라. 내가 시나리오에 그 의미를 녹이긴 했지만 경이는 그 부분을 내 의도보다 강하게 읽은 듯했다. 결국 마지막 장면의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혼자 선 고명이 지금 세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할 텐데, 그 의미를 잘 녹이려면 경이의 말을 더 경청해야겠더라. 그와 대화하면서 설득되었고, 내가 바라보는 지금의 20대를 떠올리며 각본을 다듬었다.
- 그렇게 고명은 아역까지 등장시켜가며 전사를 찬찬히 짚은 반면 아무개의 과거는 암시만 될 뿐이다. 두 주인공을 형상화하는 방식이 극단적으로 다르다는 데서 오는 부침은 없었나.
초고 단계에서는 아무개의 회상 신도 있었다. 고명이의 회상을 아버지의 시점숏으로 찍었듯, 아무개의 회상도 박 부장(류승범)이 아버지인 양 그를 바라보는 시점숏으로 찍어보려 했다. 그러다 아무개에 관해서는 아예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간 건데, 그러자니 너무 많은 의문이 남을 것 같아 암시만 하기로 했다. 배우에게도 연기할 동력은 필요할 것 같 아서.
- 한편 적군파는 상상도, 회상도 하지 않는다. 북한에 이상이 있다고 상정한 채 <내일의 죠>를 가슴에 새길 뿐이다.
적군파에 관한 책들을 읽었는데, 그들은 말도 안되는 논리를 갖고 있었다. 그들의 어리석음을 은은하게 돌려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길복순>에도 여러 가지 요소를 은은하게 넣어뒀는데, 전혀 알아주지 않더라. (웃음) 그래서 <굿뉴스>는 감독의 목소리를 강요하지는 않되 표현은 직관적으로 해보는 게 목표였다. 내가 뭘 하든 한쪽으로부터는 욕을 먹는다. 그러니 이번에는 얘네도 바보, 쟤네도 바보, 다 바보라고 보여주면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보고도 싶었다.
- 그런 ‘얘네’와 ‘쟤네’를 연출하는 걸 예전부터 즐겨온 듯하다. <불한당>의 조폭, <킹메이커>의 선거 캠프, <길복순>의 킬러 연합 모두 크든 작든 대의로 뭉친 커뮤니티이지 않나. 같은 뜻 아래 모인 개인들이 서로 달라 마찰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대한 끈덕진 관심이 엿보인달까.
요새는 별로 안 그러는데 의기투합하길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영화를 찍을 때야 당연히 의기투합해야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데, 다른 상황에서도 그러기를 좋아한 적이 있었고, 언젠가부터 그게 참 의미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자꾸만 무의식적으로 인물들을 모아놓고 헤어지게 만드는 것 같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계속 자기비판을 하게 된다. (웃음)
- 그래서일까. 이 영화의 결말도 씁쓸하지만, 그 씁쓸함을 영화가 직시하고 알아준다는 점에서 관객으로서 이상한 위로를 받았다. 감독에게 그럴 의도는 없었던 것 같지만.
나는 이 결말이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차원 더 나아간다면 그것대로 위로가 될 수 있겠다. 사실 마지막 장면을 촬영할 때 홍경 배우는 시계를 차기 싫어했다. 고명이 시계를 안 차면 안되겠느냐고 묻더라. 나는 바로 그 기분으로, 차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시계를 차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니까 경이가 왜 그래야 하냐고 되물었다. “내일을 살아가야 하니까”라고 답했다. 내일을 살아가기 위한 합리화는 인간 생존의 본능 아닐까. 나부터가 자기합리화의 왕이다. 이 상황이 복장 터지고, 비합리적이고, 억울해도 삶은 그런 것들의 연속이다. 지금 젊은 세대는 더 그렇게 느낄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야 하는데, 안되는 것도 있다. 그럴 때의 기분을, 고명이 시계를 차는 상징적인 행위로서 드러내고 싶었다. 이 사람은 그 시계라도 찰 수밖에 없다고. 우리도 결국 아무개들이고, 그걸 알면서도 내일을 살아가야 할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