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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에 관하여, <프랑켄슈타인>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단독 인터뷰
정재현 사진 최성열 2025-10-30

- (인터뷰일 기준) 평생의 숙원 사업이었던 <프랑켄슈타인>이 여러 영화제를 거쳐 극장 개봉과 넷플릭스 릴리스를 앞두고 있습니다.

기분이 아주 이상해요. 이 영화가 마침내 존재한다는 사실이 참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동시에 이토록 폭력적인 시대에 조금이나마 관객을 치유할 수 있길 바라게 되네요. 개봉 날짜까지 잡힌 요즘 매일 감정이 북받칩니다. <프랑켄슈타인>이 용서와 인류애를 말하는 영화라, 또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라 그런가봐요.

- 보통 소설을 영화화하면 원 텍스트의 내용과 형식 중 후자를 영화 포맷에 맞게 각색하는데, 감독님은 소설의 형식을 고수한 채 내용을 각색했습니다. 원작 그대로 1부는 빅터의 시점으로, 2부는 피조물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요.

메리 셸리의 소설이 아름다운 이유는 빅터와 피조물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건네기 때문이에요. 나는 7살에 제임스 웨일의 영화 <프랑켄슈타인>(1931)을 처음 접했고, 11살에 메리 셸리의 소설을 읽었어요. 책을 읽자마자 누구도 <프랑켄슈타인>을 영화화할 때 소설의 미학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후 등장한 여러 <프랑켄슈타인>영화들도 이 구조를 따르지 않았어요. 어른이 되어 영화감독이 되면 꼭 빅터와 피조물의 시점을 구분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메리의 이야기를 전하는 그날을 오랫동안 바라왔습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서문에 언급된 존 밀턴의 서사시 <실낙원>속 아담과 밀접한 사유를 건넵니다. 두 텍스트 모두 신의 섭리 안에서 인간의 역할을, 또 인간다움의 요건을 물으니까요.

- 원 텍스트가 이미 공상과학적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여러 시대를 뒤섞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정확한 고증을 지킨 빅토리아 사극(costume drama) 으로 만들어냈습니다. 현장엔 당시 의료 기술을 자문할 수 있는 피터 코플린 교수가 상주했다고요. .

작품의 배경이 1857년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나폴레옹전쟁(1800~15) 당시와 같은 막대한 규모를 필요로 하는 19세기 초반은 이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아요. 그보다 중요한 건 전쟁의 의미겠지요. 1857년은 전쟁 중에 생긴 수많은 시체가 하나의 단위처럼 묶여 되돌아오던 때고, 그렇게 거대한 참상을 목격할수록 우리는 인간성의 의미에 대해 자문하게 됩니다. 또한 이 시기는 사진술이 이미 존재하고,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하며, 의학이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여 기술적 비약을 이룬 때예요. 나는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읽는 동안 메리 셸리가 자기 반영적으로 작품을 썼다고 독해했어요. 그래서 이번 영화에 나의 자전적 요소를 담았습니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 또 나의 자식들과의 관계, 용서의 힘까지. 내 지난 삶이 영화에 담겨 있네요.

- 아버지 이야기를 하셨으니 감독님의 영화에 줄곧 반복되는 부자(父子) 모티프에 관해 여쭙습니다. 델 토로 세계의 부자 관계는 거칠게 양분이 가능합니다. 한쪽엔 <헬보이>속 양아버지 브룸 교수(존 허트)와 헬보이(론 펄먼)가 맺는 신의나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이하 <피노키오>) 속 제페토(데이비드 브래들리)가 보이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엔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속 비달 대령(세르히 로페스)과 오필리아(이바나 바케로)나 <피노키오>의 포데스타(론 펄먼)와 캔들윅(핀 울프하드)의 학대적 관계 혹은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가 자식들에게 설파하는 그릇된 가치가 있습니다. <나이트메어 앨리>속 스탠턴(브래들리 쿠퍼)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의혹마저 풍기고요. 이번 작품 또한 원작 속 프랑켄슈타인 부자의 다정한 관계를 지배와 억압의 관계로 재편했고 부자 사이의 경멸은 빅터(오스카 아이작)와 피조물(제이컵 엘로디)에게도 세습됩니다.

앞서 말한 대로 <프랑켄슈타인>은 나에게 아주 사적인 이야기입니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기도, 나쁘기도 했어요. 아버지의 존재는 내 삶의 가장 큰 그림자였으니까요. 메리 셸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메리가 쓴 마지막 두 저서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는 아버지와 매우 복잡한 관계를 맺은 채 생을 마감했습니다. 전기에 의하면 메리의 아버지 윌리엄 고든은 아내의 묘비 앞에서 딸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고, 아내가 딸을 낳고 산욕열로 사망한 일을 평생 메리의 탓이라고 전가했다고 하더라고요. 어쩌면 이 영화는 단지 내 이야기이면서 메리 셸리의 이야기이고, 내 아버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내 영화의 대부분이 아버지와 아들의 뒤틀린 관계에 관한 이야기예요. 이를테면 <블레이드2>의 다마스키노스(토마스 크레치만)와 자레드 노막(루크 고스) 사이도 그렇습니다. 많이들 자기 아버지와 달리 살아보려고 애쓰지만 마흔이 넘을 때쯤엔 결국 자기와 아버지가 별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될 거예요. 그 진리가 곧 부자 관계의 원형이고, 나의 정체성에도 영향을 주었어요. 나의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아버지에게 깊이 가닿는 데엔 나 역시 오랜 세월이 걸렸네요. 그간 아버지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수많은 변화를 감행했습니다. 내가 만든 수많은 영화가 그 증거이고요.

- 소설 속 빅터와 피조물은 마치 거울상처럼 그려지고, 빅터는 자신의 피조물을 혐오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피조물과 동일시하다 끝내 자기혐오에 잠식됩니다. 이 심리적 경로가 영화 속 빅터에게도 일부 반영됐을까요.

영화를 눈여겨본다면 빅터와 피조물이 거울에 함께 비치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하는 걸 간파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빅터를 연기한 오스카 아이작에게 피조물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버전의 영화도 고려 중이라고 전했습니다. 피조물의 이야기가 사실 빅터의 머릿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라면 진짜 괴물은 곧 빅터 그 자신이 되지 않겠어요? 빅터 안의 괴물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빅터에게 입힌 온갖 증오에 어머니의 죽음을 건강하게 애도하지 못했다는 청소년의 무력감이 더해져 탄생했을 테고요. 반면 피조물은 탄생 당시에는 아기와 같은 순수 그 자체예요. 우리도 태어날 땐 완벽한 존재였지만 삶이 우리를 조금씩 엉망으로 만들잖아요. (웃음) 그 관점에 입각하면 <프랑켄슈타인>은 누구나 ‘나의 이야기’라며 공감할 수 있는 텍스트가 되겠지요. 11살 이후부터 <프랑켄슈타인>은 나의 이야기였습니다.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18살에 집필해 19살에 출판했고, 심지어 16살에 퍼시 셸리와 야반도주해 가정을 꾸렸다고 해요. 우리 둘 다 인생의 모든 중요한 사건이 청소년기에 벌어진 셈이에요. 청소년들이 가슴속에 품는 의문을 두고 부모들은 “사춘기가 다 그렇지”라고 대충 넘기지만, 실상 청소년기야말로 인간이 가장 현명한 때 아닌가요? 세상의 모든 이상한 10대들은 저마다 총명합니다. 그들이 세상의 진실을 말하는 방식이 어른들의 선호에서 벗어나 있을 뿐이에요. 누군가가 “열몇살난 우리 집 아이가 사춘기라 그런지 날 싫어해요”라고 말한다면 나는 “아니오. 당신 아이는 마침내 당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들려주는 거예요”라고 되받아칠 겁니다.

- 오스카 아이작에게 프린스나 믹 재거 같은 록 스타를 빅터의 주요한 레퍼런스로 제시했다고요. 빅터가 오만한 동시에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인물이라 그랬을까요. 오스카 아이작처럼 좋은 의미로 다혈질인 배우에겐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떠올린 이미지는 조지 고든 바이런 같은 존재였어요. 바이런 경은 낭만주의 시대의 록 스타니까요. 바이런을 연상하며 오스카에게 활력 넘치고 자신만만하며 소년의 혈기로 가득한 인물형을 요구했어요. 한데 인간은 바로 그런 순간에 큰 실수를 범할 가능성이 높아요. (웃음) 빅터가 사고 피해자처럼 그려지는 걸 경계했습니다. 오히려 파가니니적인 미학을 원했다고 할까요. 영화 속 빅터는 예술가에 가까워요. 시인이거나 뮤지션, 조각가일 수도 있습니다. 강단 위를 콘서트 무대처럼 누비고, 교향곡을 지휘하듯 피조물을 꿰맵니다. 지성과 몸짓으로 사람을 현혹하고요. 그리고 록 스타의 심연엔 언제나 고통이 뒤따릅니다. 오스카의 눈빛은 단박에 빅터의 그것이었어요. 그의 눈동자엔 눈부심과 고통, 비밀과 아름다움이 한데 뒤섞여 넘실대고 있었습니다.

- 2000년대 중반부터 <프랑켄슈타인>의 제작, 연출에 도전해왔습니다. 오랜 응전 동안 피조물의 디자인이 감독님 안에서 변화를 거치지 않았을까 짐작하는데요.

초창기 피조물 디자인의 핵심은 불균형이었어요. 양팔의 길이가 서로 달랐고 서로 다른 색의 피부 조각을 패치워크처럼 얽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런데 모든 일이 더 나은 결말로 수렴했다고 봅니다. 지금의 피조물이 가장 훌륭하잖아요? (웃음) 괴물의 디자인은 곧 괴물의 정체성입니다. 예를 들어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괴생명체(더그 존스)는 사랑스러움, 아름다움과 같은 본질적 요소에 맞춰 설계했습니다. <크림슨 피크>의 유령은 레드 팔레트 안에서 악몽처럼 일그러져 있는데, 이는 제도를 포함해 모든 부패한 요소의 타락을 환기합니다. 전작을 함께한 마이크 힐이 이번 영화에도 어김없이 합류했어요. 마치 내 영혼의 쌍둥이 같은 친구예요!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부자연스러움이 그의 손길을 거쳐 살아났습니다.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될 것처럼 보이지만 존재 자체가 경이로워 계속 훔쳐보게 되는 외양을 갖추게 됐어요. 물론 그 안엔 제이컵 엘로디가 신체언어를 통해 순수함을 불어넣었고요.

- <크림슨 피크>의 레드를 언급해주셔서 떠올랐는데, 감독님의 영화에서 붉은색은 언제나 정념의 정점을 이룩할 때 사용됩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속 일라이자(샐리 호킨스)의 코트나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의 오필리아의 원피스, <퍼시픽 림>의 어린 마코(아시다 마나)의 구두 등이 떠오르네요. 제목부터 컬러가 들어간 <크림슨 피크>나 감독님 영화에 흐르는 수많은 피는 말할 것도 없고요. 빨을 주조할 때 유의하는 지점이 있습니까.

<크림슨 피크>는 돌이키면 <프랑켄슈타인>의 리허설 격의 영화였어요. 빨강은 가장 다루기 힘든 색 중 하나예요. 팔레트에 두면 가장 허기가 느껴지는 색이라 용례에 따라 의미장이 달라지죠. <프랑켄슈타인>에서 빨강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첫 순간은 빅터의 셔츠에 남은 어머니의 손자국이에요. 그 시점부터 빅터의 악몽에 등장하는 천사상을 포함해 모든 요소가 붉어집니다. 그리고 그 빨강은 죽음까지 정복하려는 빅터의 집착에 상응하고요. 빨간 천사상이 빅터에게 다가와 “나는 죽었다, 너는 나를 섬겨왔다”라고 말하는 순간 어머니는 빅터의 악몽이 됩니다. 캐릭터별로 명확한 컬러를 주었습니다. 하를란더(크리스토프 발츠)에겐 초록을, 빅터의 아버지에게는 파랑을, 엘리자베스(미아 고스)에게는 노랑과 보라를 선사했습니다. 피조물의 피부에 비치는 노랑과 보라는 엘리자베스의 것과 같아요. 그래서 이 둘은 서로 결합할 수 있습니다. 세트 컬러도 마찬가지예요. 초반엔 흰색, 파랑, 금색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빅터의 유년기에 접어들면 흰색, 검정, 빨강으로 변하고, 이윽고 모든 색을 빅터의 이야기와 피조물의 이야기에 퍼부었습니다. 각 색상이 장면을 구획하는 표지인 동시에 영화 전체에서 순환하도록 두었어요.

- 델 토로 월드의 괴물은 언제나 인간 일면에 대한 메타포가 아닌 괴물 그 자체로 그려지며 이야기를 성립합니다. 이는 곧 감독님 작품의 일관된 주제 의식인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를 관통하는 태도이기도 한데요. 괴물을 괴물답게 그리려는 작가적 비전을 어떻게 견지합니까.

근래에는 선인의 반대급부로 악인이 등장하는 서사보다 인간의 악이 중심에 있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낍니다. <나이트메어 앨리>의 스탠턴이나 <프랑켄슈타인>의 빅터 모두 돌이켜보면 작품의 히어로인 동시에 빌런이니까요. <피노키오>속 제페토조차 피노키오(그레고리 만)를 이해하지 못해 무례하고 잔혹하게 굴어요. 이제 나이가 예순쯤 되니 전과 다른 방식에 마음이 끌리네요. 이번 작품은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데에 주력했습니다. 피조물을 보세요. 인간 영혼의 화신 같지 않나요? 반투명하게 부서지는 흰빛, 아름다운 실루엣…. 피범벅의 흉측한 모습 대신 조각상처럼 만들고자 애썼어요. 그런 피조물이 점차 인간의 세상에서 고통받는 모습은 관객에게 아프게 다가오고요. 피조물을 보고 해부학 단면 도해를 떠올리는 관객도 있을 거예요. 사실 머리 부분엔 19세기 골상학의 문양을 본떤 예술적인 선을 새겨두었어요. 그 선이야말로 피조물의 순수성과 인간성을 표상합니다.

- 예상한 바지만 빅터보다는 피조물을 향한 감독님의 애정이 훨씬 크게 느껴집니다. (웃음) 혹시 창작자로서 빅터를 연민하는 부분이 있습니까.

빅터는 영화감독 같아요. 추진력은 강하지만 전체를 보는 시야는 약합니다. (웃음) 일을 시작했으면 마쳐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움직인다는 점도 영화감독의 특징을 공유하고요. <프랑켄슈타인>을 연출하는 감독으로서 당연히 관객이 기대할 법한 것들을 보여줄 의무가 있었어요. 생명 창조의 순간, 시체 더미와 부활 등이지요. 반면 여태 괴물의 시점을 그린 <프랑켄슈타인>이 없어서인지 이를 예상한 관객은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가 2부에 접어드는 순간 관객으로부터 매우 극적인 반응이 터지길 원했어요. 피조물은 영화에 점진적으로 존재감을 드리웁니다. 처음에는 한쪽 눈만 보이고, 사람을 죽이는 괴물처럼 인식되지만 조금씩 그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몰라요. 엘라이자, 빅터와 같은 1어절 이름만 발음하니까요. 그러다 마침내 피조물이 “내 이야기를 들려주마”라며 2부의 문을 열어젖히면 관객이 탄성을 내지르며 감전된 듯 항복하는 거예요.

- <프랑켄슈타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부수려는 자(빅터)와 그로 인해 죽지 못하고 사는 존재(피조물)의 숙명적 대결을 다룹니다. 감독님은 수많은 작품에서 주인공에게 죽음을 부여했습니다. 이들은 죽음을 통해 현실에서 이룩할 수 없는 영원한 안식을 얻습니다. 죽음만이 현실의 고통을 잊게 만든다고 보시나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가치가 죽음입니다. 생은 종말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워요. 영생은 누구에게든 고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멕시코인이잖아요. 멕시코만큼 죽음을 선망하는 나라가 또 어디 있어요. (웃음) 나는 평생 죽음에 매혹당했어요. 언제든 죽을 날을, 나를 둘러싼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농담이 아니에요. 사랑과 이별, 소득과 지출, 생명의 탄생이 끝없이 반복된다면 무슨 소용인가요. 인생은 덧없으므로 아름답지요. 멕시코의 시인 하이메 사비네스가 지은 시 <신화에 대하여>(Del mito)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싶네요. “누군가 내 귓가에 천천히 고요히 속삭이네. ‘살아라, 살아라.’ 그건 죽음이었네.” 죽음은 삶 이상의 축복입니다. 낭만주의자들이 삶을 저주라고 했던가요? 참 낭만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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