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인터뷰] 곁에 있을게, <세계의 주인> 배우 장혜진
이유채 사진 백종헌 2025-10-28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배우 장혜진은 타인을 너르게 포용하면서도 쉬이 휘둘리지 않는 인물을 연기해왔다. 그의 여자들이 실질적 가장이자 정신적 지주로 극 안에서 자리하는 데는 그러한 성격 덕분일 터다. <세계의 주인>의 태선 역시 부표와 같다. 어린이집의 유능한 원장으로서 아이들을 돌보고 집에서는 10대 남매 주인(서수빈)과 해인(이재희)을 건사한다. 양쪽에서 늘 온화한 미소를 짓지만 사실 그는 겨우 서 있다. 딸이 겪은 사건은 보호자인 그에게도 사라질 수 없는 내상을 남겼고, 남몰래 상처 부위에 술을 부어 통각을 마비시키는 것이 그가 터득한 치료법이다. 그럼에도 태선은 삶이 여전히 기쁨과 웃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진정 어른스럽고 아름다운” 태선을 연기하기 위해 장혜진은 기존의 연기법을 내려놓았다.

- 극장에 손수건을 가져가야 했다. 상처가 사라지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는 울림이 컸다.

‘<세계의 주인>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뭘까?’라는 대화를 우리끼리 한 적 있는데 그때 나온 말이 바라보기, 함께하기였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넌 이겨낼 수 있어’라고 다그치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너에겐 살아갈 힘이 있다고, 이런 말을 곁에서 해주는 윤가은 감독의 작품이 세상에 나와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 윤가은 감독의 장편 전편에 출연했다. 두분의 친분을 생각하면 시나리오는 어느 날 툭 받았을 것 같다.

윤 감독은 예의와 절차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시나리오는 회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받았고 이후에 참 윤가은다운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대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연히 안 하는 거고. 언니가 그런 선택을 내린다 해도 우리의 우정은 절대 금이 가지 않을 거라고. 그렇지만 내 마음속의 태선은 언니라고. 그러고 나서 대본을 읽었는데… 이걸 나에게 안 줬다면 내가 우정을 깼을 거다. (웃음) 첫 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한 신의 여운이 끝나면 그다음 신의 여운이 찾아왔다. 살아 있다는 건 그자체로 아름답고 다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지금도 울컥 한다.

- 어린이·청소년 배우가 중심인 윤가은 감독의 현장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이번에도 <우리집>때처럼 ‘어린이 배우들과 함께하는 성인들에게 드리는 당부의 말’이 적힌 감독의 촬영 공지 글을 받았나.

물론이다. 어린이 배우도 똑같이 존중받아야 하는 배우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외모를 평가하거나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식의 충고를 주의해야 한다는 말도. 덕분에 어린이 배우에게 ‘이렇게 해’ 대신 ‘네 생각은 어때?’라고 묻는 건강한 현장이 됐다.

- 태선은 그동안의 장혜진의 여자들과는 달라 보였다. 어쩐지 나른함을 풍겼는데 알고 보니 오래 불면과 알코올 의존으로 몽롱한 상태였다.

확실히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기했다. 철저한 대본파로서 문장부호 하나까지 살리기 위해 각종 테크닉을 동원하기도 하고 완급 조절도 계획적으로 하는데 <세계의 주인>은 그렇게 접근하고 싶지 않았다. 태선으로 오롯하게 있겠다, 그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작품을 하기로 결정하고 윤 감독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혹시라도 내가 잘하려는 욕심을 부리는 신이 있다면 다 잘라줘. 현장에서 그러거든 말려줘.’ 또 이 작품은 주인이가 중심이고 수빈 배우가 돋보여야 하는 영화이기에 그렇지 않은 것 같은 장면에서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 어떤 장면이었나.

후반부의 병실 신. 원래는 입원한 태선이 주인이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장면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나를 위한 장면 같았다. 그래서 윤 감독에게 “정말 이대로 가길 원한다면 나는 당연히 따르겠지만 그래도 한번만 다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딱 한마디 했는데 윤 감독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현장에서 내 대사를 다 빼는 걸로 신을 수정했다.

- 태선이 텀블러에 든 술을 싱크대에 쏟을 때, 단칼 같은 손놀림이 인상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손이 움직였다. 직전에 해인이의 마술쇼 초대장을 읽었으니까. 아이는 가족 모두가 와주길 바라며 썼을 텐데 엄마는 제대로 보지 않고 아빠는 연락도 없다니. 그 순간 태선은 퍼뜩 정신이 들었을 거다. 당장 바뀌어야 한다는 결심으로 싱크대로 향하고 이제는 정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남편(김석훈)을 찾아간다.

- 남편과 대면하는 시퀀스는 장혜진 배우 특유의 매서운 장악력이 발휘된다.

정말 쉽지 않았던 대목이다. 윤 감독은 서늘한 톤을 원했는데 나는 자꾸 현실 부부 싸움 모드로 격해졌다. 태선이 억눌러왔던 감정을 남편 앞에서가 아니면 어디서 풀겠나 싶어서였다. 현장에서 표현을 계속 줄여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럴수록 감정은 더 깊어졌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선 이 정도의 크기가 태선에게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 극 중 진짜 노력하는데 안되는 게 무엇이냐는 중요한 물음이 있다. 그 무엇이 있다면.

나를 컨트롤하는 것. 본래 감정의 고저가 심한 편인데 사회생활할 때는 항상 중간치를 유지하려고 한다. 불편한 상황이 생기는 걸 원체 못 견뎌서다. 그래서 혼자 있는 걸 제일 좋아하면서도 누가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으면 먼저 말을 건다. 반대로 함께 떠들고 싶어도 나를 어려워하는 것 같으면 거리를 두고. 그러다 보니 친화력 좋은 장혜진과 도도한 장혜진, 사람마다 나를 다르게 기억한다. 거기서 오는 어려움이 있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비치든 내가 아는 나를 지키기 위해 매번 애쓴다.

- 그 ‘중간치’를 연기에서도 찾으려고 하나.

그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럴수록 인물이 밋밋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연기가 재미없어졌다. 극과 극을 달리는 내 감정을 다양하게 접목해보는 데서 다시 흥미를 느꼈다. <밀양>이 바로 그 시작이었고. 흥미가 되살아난 것과는 별개로 이후 현장은 쉽지 않았다. <우리들>을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고 내 모든 걸 쏟아부었다. 그런데 인생이 참 묘하다. 봉준호 감독님이 <우리들>을 보고 <기생충>에 날 캐스팅한 거다. 그 뒤로 비중을 따지지 않고 쉼 없이 일했다. 그러지 말고 기다리라고, <기생충>장혜진에게 주인공 역할이 자연히 들어올 텐데 왜 앞서가냐는 주변의 조언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인생에 다시 없을 영광이 나를 변하게 할까봐 무서웠다. 기회가 주어진 것에 늘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내 발로 내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다.

- 차기작은 김태용 감독의 <넘버원>이다.

최우식 배우 캐릭터의 엄마 역할을 다시 한번 맡았다. 주인이 엄마와는 아주 다를 거고 그 점이 내가 이 작품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다. 앞으로 어떤 감독님들이 내게 감사한 제안을 주실지 모르겠지만 내가 <우리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감독님에게 아주 취약하다는 걸 밝힌다. (웃음) 윤가은 유니버스에서도 계속 살고 싶다. 윤 감독에게 토론토국제영화제에 한번 더 가자는 말로 은근히 어필 중이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