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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계의 주인> 윤가은 감독
김소미 사진 최성열 2025-10-28

- 개봉 전 토론토국제영화제, 핑야오국제영화제, 바르샤바국제영화제를 거치면서 심사위원상, 관객상, 비평가연맹상 등을 수상한 낭보에 늦게나마 축하드린다. 아시아, 유럽, 북미 대륙에서 <세계의 주인>을 받아들이는 문화적 맥락과 감수성에 미묘한 차이가 있었을 듯한데, 체감하기로는 어땠나.

언론·배급 시사회 전날 폴란드에서 돌아왔다. 세 번째 장편이지만 여전히 영화제에서 첫 공개하는 순간은 너무나 긴장되고 이 영화를 미워하는 사람만 없기를, 싶은 두려운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세계의 주인>은 유독 객석의 박수가 격려처럼 다가왔다. 대륙을 순차적으로 돌며 프리미어 상영을 하는 과정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의 층위가 얼마나 넓은지 감지하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중국 핑야오에서 있었는데, 상영 중 유독 엄숙한 분위기라 긴장했다가 QnA가 시작되자 체감상 객석 전원이 손을 들고 질문하려는 듯한 열기에 깜짝 놀랐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순수한 충격으로 가닿은 듯해서 감사했다. 자신의 개인사를 주저 없이 밝히며 감상을 전해준 관객들도 여럿 있었기에 잊지 못할 것 같다.

- 개봉일엔 김초희, 윤단비, 이옥섭, 임선애 감독까지 여성감독 4인이 모여 대화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다수의 감독이 <세계의 주인>을 위해 한자리에 모이는 광경에서 차곡차곡 쌓여온 여성감독들의 우정을 읽었다.

오랜 꿈이 실현됐다. (웃음) <세계의 주인>의 초안을 쥐었다 놨다 하면서 끙끙거릴 무렵에 감독님들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 부침을 알고 있기에 <세계의 주인>이 제작될 때 누구보다 크게 축하해준 분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욕심을 냈다. 이들에게 내가 얼마나 큰 세례를 받았는지, 어떤 용기와 지지를 얻었는지 공개적으로 고백할 것이다.

- ‘쥐었다 놨다’ 하는 동안 <세계의 주인>에 관해 무엇을 망설였고, 또 무엇을 포기할 수 없었나.

영화가 하고 싶어 고민 끝에 영화학교에 들어갔더니 쉬지 않고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시스템을 마주했다. 나를 움직여온 영화들은 무엇이었나 질문하게 된 시점이었다. 되짚어보니 스크린 안에서 나와 닮은 삶을 마주할 때 받는 생생한 용기 같은 것이 있었더라. 좋은 영화는 안도감을 준다. 내 삶이 제법 평범하든 특별하든 ‘이렇게나마 괜찮구나’ 하는 느낌. 그 연속 선상에서 <우리들><우리집>이후 내게 남은 또 다른 테마가 여성으로 태어나 몸으로 부딪치는 사랑과 성에 대한 경험을 실재하는 요소로 전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좀더 풋풋한 이야기이긴 했다. 그런데 쓰면 쓸수록 스스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요소들이 자꾸만 침범해오는 것을 느꼈다. 성과 사랑은 내게서 어떤 두려움, 공포, 불안, 걱정, 그리고 사회에 만연한 사건들과 분리될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것은 나와 내 친구들의 경험이기도 해서 한동안 직면하고 싶지 않았다. 거부의 시기 동안 쓴 내용들은 하나같이 가짜다. 그러니 이야기를 쓰고 버리는 시행착오가 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 시나리오의 여정에 불을 붙인 세태의 영향도 있었을까.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러 성폭력 관련 기사와 담론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시기에 내 안에 싹튼 질문이 하나 있었다. 들끓는 여론전 가운데 가해자를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곧잘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다’고 표현하곤 했다. 누군가의 온당한 분노이자 각성 과정일 수 있음을 아는데도 그 표현들에서 내가 꾸준히 상처받고 있더라. 피해자가 겪을 고통을 타인이 함부로 가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함부로 망가졌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내 인생에 닥친 어떤 재난과 여파가 어떤 양상으로 남아 있는지도 돌아봤다. 이 시기에 이금이 작가의 청소년 소설 <유진과 유진>을 읽고 크게 감명받아서 판권 구매를 목표로 잠시 이야기를 직접 만져본 기간도 있었고, 백온유 작가의 소설 <유원>에도 영향을 받았다. 흔들리는 과정에서 나를 등불처럼 이끌어준 작품들이다.

- 주인이 인정할 수 없는 서명문 속 문장이 곧 감독님이 방금 묘사한 여론의 전형적 반응과 유사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주인이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을 학교 공동체에 고백하게 된다는 설정은 어떻게 생겨났나.

사실 한동안은 주인의 고백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였다. 일련의 일들을 겪고 비로소 ‘사실은 내가…’를 말할 수 있게 된 아이의 이야기였던 거다. 이쪽은 더욱 장르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수없이 고치는 과정에서 무언가 정말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종착역이라고 생각한 지점이 이야기의 첫 관문일 수도 있다는 어느 작가의 말을 읽고 관점을 바꿔보기로 했다. 고백의 순간을 앞으로 당겨오자 갑자기 쓰는 나로서도 전에 없던 동력이 생겨났다. 주인은 이 말을 얼마나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서 반복했을까,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표출하게 된 순간엔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말하게 될까, 그리고 이 사건 이후에야 비로소 주인의 삶에 대해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들의 답을 찾아 나갔다.

- 흔히 ‘캐릭터’는 일관되고 특정한 기질로서 정의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삶에서 우리 개인은 허무할 정도로 변덕스러운 존재다. <세계의 주인>은 주인만의 성정을 묘사하면서도 그를 더 복잡한 존재로 만드는 변화무쌍한 면모들에 섬세히 접근한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끊임없이 여러 가지 연습을 반복하는 것 아닐까. 그 연습이 10대에 끝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지점들은 갱신하려고 평생 노력해도 모자라게 느껴진다. 성폭력 피해자, 생존자들의 사례를 연구하면서 우울하고 무력하게 움츠려든 모습도 일면 진실인 한편, 욱해서 분노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모습도 너무도 자연스러운 반응임을 알게 됐다. 말 그대로 피해자 안에 응축된 어떤 힘이 있는 것이다. <세계의 주인>에선 이런 에너지의 측면을 더 드러내고 싶었다. 그래서 주인을 사람들이 쉽게 연상할 만한 고정관념에 가까운 모습, 그것과 가장 멀리 떨어져 보이는 모습, 그리고 반쯤은 연습과 노력으로 갖춰진 사회적 성격이 공존하는 인물로 그렸다. 그것이 조금이나마 진실에 가깝기를 바라면서.

- 복합적 진실을 탐구하는 서사는 근래에 각광받고 있지만 여전히 이를 작업하는 과정 중에 있는 창작자들에겐 자신의 이야기가 뜻대로 가닿을지 외롭고 두려워지기 십상인 주제 같다. 주인의 주인이 되기 위해 윤가은은 어떻게 자기 확신을 지켜냈나.

아마 조금은 나이가 들어서…? 처음엔 절망의 깊이를 어떻게든 표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무겁게 지고 있었다. 취재차 인터뷰를 거치면서 오히려 그 생각이 와장창 깨졌다. 영화라는 작은 그릇에 한 인간의 비극을 장악해서 담아내겠다는 내 야심, 그것부터 헛된 망상일 수도 있겠구나를 깨달았다. 실제로 성폭력 피해자 연구는 연구 표본이 적고 폭력의 스펙트럼은 너무나 넓기 때문에 피해자의 양상을 하나로 표현하거나 종합할 수가 없다. 때문에 고정되지 않는 인물형을 그 자체로 구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어 갔다.

- 생존자 주변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줄기차게 싱싱한 꽃을 사오지만 이후에는 결코 돌보지 않는 엄마 태선(장혜진)처럼.

무단횡단하다가도 쓰레기를 줍는 게 사람이란 말을 좋아한다. (웃음) 사람이 다 그렇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분열과 모순이 괴롭지만 그것 자체를 받아들이면서 산다는 것을 나 역시 아직 배워가는 중이다.

- 과거의 진실이 언급되기 전인 영화 초반부, 집 안에 무언의 슬픔이 떠돌고 있음을 카메라가 종종 태연히 바라본다. 태선에 관해 좀더 덧붙이자면, 딸 옆에서 몇 캔째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 프레임 한 구석에서 툭 드러나기도 한다.

미화하지도 사건화하지도 않는 것이 어려웠다. 다 괜찮아 보이지만 우연히 툭툭 드러나는 엄마의 괴로움, 아빠의 부재, 그리고 아빠를 그리워하는 주인의 마음 같은 것들이 스며 있는 하나의 공간을 상상했다. 집으로 비유하자면 한쪽은 깨끗하지만 고개를 돌리면 문득 눈에 보이는 지저분한 한 구석이 있는 그런 순간들을 담았다. 그 시선이 태연했다면 다행이다.

- 감독이 세공하고자 하는 주제를 옮기는 서수빈이라는 괴력의 배우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이 낯선 생기와 건강함이 배가하는 애틋함이 있었다. 배우를 만나 인물이 더욱 힘입은 바를 들려준다면.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서수빈이라는 사람의 건강한 에너지가 나를 아주 상쾌하게 만드는 지점에 반했다. 동시에 그는 아주 사려 깊고 진중한 성격이기도 하다. 주인처럼 이런저런 말을 유쾌하게 건넸다가도 집에 가서 가만가만 곱씹는다든지, 타인을 대할 때 민폐가 아닐까 고민하면서 예의를 갖추려고 기합이 확 들어간 모습도 있다. 서수빈 배우가 어린 시절부터 11년 정도 태권도를 배운 영향이 있겠거니 한다. 절도 있는 사람이라고 할까. (웃음) 거기다 짧게 아이돌 연습생을 준비한 기간이 있어서 춤도 잘 춘다. 지켜보다보면 행동 하나하나에 절도가 있으면서도 어떤 순간엔 마치 물이 그릇에 이렇게 담겼다 저렇게 담겼다 하는 것 같은 유연함이 있다. 주인처럼 수빈에게도 상반된 모습이 있고 서수빈 배우는 특히 그러한 다면적 모습까지도 건강하게 드러내는 사람이다. 그래서 주인을 서수빈 배우가 잘 연기할 거라는 믿음보다는 서수빈 배우가 그 자신으로서 주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여성들의 공동체가 이렇다 할 설명적 접근 없이 일상적으로 묘사된다. 성폭력 피해자 자조 모임의 풍경이 영화 안에 어떻게 스며들기를 바랐나.

조사 과정에서 체감한 것이기도 하고 실제로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바이기도 한데 사회에서 계속 주변부로 밀려나고 소외되는 소수자들이 모이면 자신들보다 더 힘들고 약한 사람들에게로 자연스럽게 눈길을 주게 된다. 본인들이 그런 길을 거쳐왔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마음이 샘솟는 것도 같다. 가진 사람이 도움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힘든 사람이 꼭 더 힘든 사람을 도와준다. 그래서 성폭력 피해 자조 모임의 여성들이 모여 봉사를 한다는 구상을 지켜둔 채로, 여러 활동 중 청소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원치 않게 자기 삶과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던 사람들이 그걸 회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청소나 설거지는 다시 무언가를 통제하고 정리하는 감각을 되찾아준다고 한다. 삶의 기력을 잃고 생활하는 사람들의 집, 소위 쓰레기 집이라고 하는 곳을 찾아가 인물들이 공간을 깨끗하게 재구성하는 활동을 하게 만들고 싶었다. 한편 별도로 강조하지 않았지만 주인의 이름을 거꾸로 한 인주라는 인물을 나는 모임 구성원들의 기둥으로 생각했다. 고민시 배우가 연기한 미도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이었고 백현주 선배님과 꼭 함께하고 싶었다. 그를 필두로 배우들이 자발적으로 책임감을 느끼고 친족 성폭력 피해와 관련한 메뉴얼을 비롯한 각종 책과 다큐멘터리를 찾아 읽으면서 일종의 세미나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 속 분량보다도 준비 과정에서 만나서 모임을 가진 시간과 횟수가 훨씬 많다.

- 마술하는 소년 해인(이재희)을 <세계의 주인>의 마술이라고 해도 좋겠다. 주인의 세계가 요동칠 동안 마술쇼를 향한 소년의 여정도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다. 기다렸던 가족은 객석 어디에도 없고, 근심과 걱정거리를 모아둔 쪽지가 사라지게 하는 회심의 마술도 실패하고 만다. 이날의 슬픔이 소년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까.

일단 그 장면을 촬영할 때 서수빈 배우가 보러 왔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다. 엑스트라도 할 수 없는 역할이니 구석에서 그냥 보고만 있었는데 다 찍고 나서 뒷정리하려고 보니 구석에서 혼자 오열을 하고 있더라. 그렇게 슬픈 장면일 거라고는 찍는 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마술사 해인에 대해서는 어린이다운 상상력을 고민하면서 썼다. 어떤 기술을 부려서 전능한 힘이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마술인데, 어쩌면 이 소년의 무의식 한쪽에 가족의 고통을 오직 자기로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무력감도 있지 않았을지, 마술사의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싶었던 게 아닐지 헤아려봤다. 그가 태어나고 자라는 매일에 이미 이 집안에 비극이 자리했을 테니 막내로서 사랑도 받고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처지에서 나온 주목받고자 하는 심리의 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다 알고 있다. 그래서 해인이에게 힘들지만 돌파해야 하는 어떤 순간을 주고 싶었다. 막연히 알고 있어도 그것을 마주할 때에야 또 한뼘 자라는 거니까. 배우가 드라마틱한 표정을 전혀 짓지 않고 그저 조금 부루퉁한데도 어떤 서정성이 묻어나왔던 순간이 나 역시 참 좋았다.

- 주인의 곁을 지키는 중요한 인물 중 유라에 관해서도 복기해볼 만하다. 뒤늦게 주인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는 것에 가슴 아파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혼자 속앓이하는 시간을 묘사했는데.

유라는 참 어려웠다. 묘사도 분량도 가장 많이 바뀐 캐릭터랄까. 유라의 분량이 훨씬 많았는데 유라를 많이 드러낼수록 인물이 흐려지기도 하고, 조금씩 가지를 쳐내다보니 유라 캐릭터를 아예 빼 본 적도 있었다. 자꾸만 분량이 늘었다 줄었다 하니 강채윤 배우에게 미안한 마음도 컸다. 유라에 관해서는 지금까지도 아쉬움이 남는다. 더 표현하고 싶었고 매 순간 숙제였던 인물이다. 왜 그랬을까. 실제로 피해 당사자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하는 경우는 너무도 많다. 그 감정은 단순하지 않다. 일찍 눈치채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동안의 무지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과 수치심, 그리고 서운함 같은 것들이 뭉쳐져 있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나? 내가 고작 그런 존재였나?’ 싶은 작은 마음에 대해서도 들여다보고 싶었다. 유라 역시 제어되지 않는 여러 마음이 솟구치는 시간을 겪는다.

- 주인에게 전과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지만, 과거에 겪은 일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삽시간에 ‘어려운’ 존재가 된다. 저마다의 방식과 속도로 타인의 복잡성을 배우는 학급 구성원들이 배려, 의심, 불편함과 같은 여러 반응을 보여줄 때 관객도 함께 상처받는다.

다만 그 누구도 악의를 가진 존재로 묘사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선의의 혼란을 겪는 시간이다.

- 수호는 성범죄자 출소 반대 서명 문제로 주인과 갈등하는데 <세계의 주인>은 그를 적대자로 그리지는 않는다. 한부모 가정에서 여동생을 돌봐야 하는 10대 남성 수호의 성장통도 포용하는 이야기로 그리면서 고심한 바가 있을까.

수호는 과거의 나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어서 내 모든 총력을 기울여도 온실 속에 그를 가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세계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잘못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 앞에서 내 역부족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수호는 이런 분노와 무력감을 넘어서서 용감하게 행동한다. 동시에 수호의 트라우마는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아버지는 바쁘고 어머니는 부재한 상황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돌봐야 하는 짐이 10대 청소년에게 주어진 상황이다. 사실 서명에 한 명 정도 빠지면 어떤가. 그런데 수호는 집요하다. 그 집착적 반응에서 비집고 나오는 수호만의 공포와 불안을 보여주고자 했다. 동생의 목에 난 상처 때문에 수호가 엄청나게 흔들리는 순간들도 마찬가지다. 주인과 수호 모두 자신만의 트라우마가 있고, 나는 이 세계의 모두가 과거에 겪은 각자의 아픔을 갖고서 서로 요구하고, 거부하고, 충돌하고 있음을 바라보려 한다. 한편 <세계의 주인>을 쓰면서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미래를 진심으로 고민하는 남녀 청소년들이 있다는 것을 배우고 나아가 믿고 싶었다. 그 아이들이 절대다수가 아니라고 해도 그들을 들여다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 무도인의 담대함으로 관객을 안심시켜 주는 존재도 있다. 태권도 관장님이다. 그는 왜 미도가 남긴 그을음의 흔적을 끝내 지키려 할까.

하하. 미도한테 앞으로 더 받아먹을 게 많아서. (웃음) 뭐랄까, 관장님은… 인생을 스치고 지나갔던 좋은 어른들을 떠올리며 쓴 인물이다. 지금은 연락도 잘되지 않지만, 분명히 내가 위태롭던 한 시절에 도와주었던 어른들이 있었다. 나는 관장님이 미도와 주인이 겪은 일에 대해 정확히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서 썼다. 다만 그 아이들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흔들리는 모습을 꾸준히 옆에서 지켜봐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실패하고, 사고치고, 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어른이다. 그리고 체육관으로 종종 돌아오는 미도를 통해 어린 시절의 아픔이 유년의 예행연습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크면서 계속 마주하게 되는 무엇임이 느껴졌으면 했다. 그 끈질긴 흐름을 관장님은 알고 있을 수도 있겠다. 어느 날 미도가 스스로 벽면의 그을음을 새로 칠하겠다고 하면, 관장님은 순순히 허락해 주지 않을까?

- 익명의 쪽지가 자아내는 긴장감은 영화 말미에 쪽지의 목소리가 교실의 여러 얼굴로, 다성적 목소리로 확장되면서 감동을 준다. 연결감, 그것이 주는 용기에 닿기 위한 <세계의 주인>이 주인들을 확장해나가는 결말에 관해 질문드린다.

쪽지의 내용은, 피해 생존자에게 납득 가능한 반응을 요구하는 사회의 억압들 내지는 주인이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책상 위에 놓여 있거나 주인이 손으로 들고 있는 인서트컷처럼 찍을 수도 있었지만 화면을 쪽지로 덮어 전면에서 텍스트를 노골적으로 띄우고 싶었다. 또 이 쪽지의 내용이 보여지는 동안엔 소리도 없이 오롯이 글씨와, 그러니까 누군가의 터치와 대면하게 만들었다. 온전히 느끼고 대면하는 순간 같은 것이길 바랐다. 영화 말미에 이주인이라는 특별한 사건을 겪은 특수한 개인의 이야기를 쓸 때 바로 내 옆집 혹은 지금 있는 교실에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로 포옹하는 순간을 마련하고 싶었는데 교실에서의 마지막 장면을 쓸 때 쪽지의 목소리가 다양한 아이들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어떤 여자아이도 있었고 목소리가 걸걸한 아이, 진중한 아이, 소녀도 소년도 모두 있었다. 그 아이들의 얼굴도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쓴 것이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내게 돌려주는 목소리였다.

- 세 번째 장편 <세계의 주인>, 그리고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와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공개된 앤솔러지 영화 <극장의 시간들>속 단편 <자연스럽게>를 종합하면, 장면과 형식의 성취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관심사가 읽힌다.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지금 윤가은의 태도는 어디에 맺혀 있나.

지난 두편의 장편영화를 만들 때까지 내게 영화는 이야기에 가까웠다. 이것은 관객으로서도 마찬가지의 성향이었다. 좋은 장면보다 이야기나 테마가 더 와닿고 그것에 천착해서 영화를 만드는 어떤 태도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이어지는 성향일 텐데 한편 어떤 벽에 부딪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장면, 정말로 찍고 싶은 장면을 위해 현장에서 들여다볼 여유가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나 역시 아직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나 스스로 나의 습성 밖이 궁금해졌다고 할까. <콩나물>부터 지금까지 함께해온 편집감독이 얼마 전 그랬다. “언니, <세계의 주인>만들면서 제일 많이 한 말이 뭔지 알아?” 내가 물었더니 “어떻게 하면 균열을 내지, 어떻게 하면 불연속적이고 일관되지 않게 하지, 어떻게 하면 영화를 좀 찢어놓지?”라고 하더라. 전과는 다르게 숏을 붙여보고 프레이밍을 달리해보는 동안 화면의 거리감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가장 적절한 거리, 가능하다면 정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이것을 꼭 고백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 나는 <세계의 주 인>에 이르러 비로소 카메라 렌즈 mm수도 정확히 공부했다. 촬영감독은 나를 교육하며 영화를 찍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것을 말하는 데 부끄럽지는 않다. 몰랐으니 배워야 하고, 앞으로도 배울 것이다. 영화를 하면서 계속.

세차장의 모녀

“공터에 차를 세워놓고 살수차로 세차장 물줄기를 구현할까 생각할 정도로” 콘티에 부합하는 세차장을 찾는 데만 한참 걸렸다. 윤가은 감독은 “남효진 제작부장이 아니었다면 포기했을 것”이라고, 결정적 로케이션을 헌팅해온 동료의 이름을 몇번이나 강조했다. 주인이 교무실에 둘러앉은 선생님들과 수호(김정식)를 향해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라고 고백한 직후의 밤. 자동 세차장에 차를 세운 모녀는 가슴 아픈 시간을 보낸다. 처음에는 그저 미안하다던 말이 차츰 차올라 ‘유치원 아이들을 돌볼 게 아니라 딸부터 잘 챙겼어야지’라는 오래된 원망으로 치닫는다. <세계의 주인>에서 가장 격하게 치솟는 감정을 배우가 한 신 안에서 표출하는 이 장면은 프로덕션의 후반부, 장혜진 배우의 마지막 촬영 분량으로 진행됐다. “뒷좌석 공간이 나오지 않아서 카메라만 싣고 배우들이 탄 차를 보내야 하는 순간이 왔다. 배우들은 오히려 좋아했다.” 5~6테이크 만에 컷 사인이 떨어진 후, 두 배우 모두 탈진했다.

윤가은 감독은 이 장면에서 장혜진 배우의 연기를 보고 “쏟아내는 사람만큼 감정을 온전히 받아내는 사람의 연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았다고 말한다. 유일하게 배우와 팽팽히 의견 대립을 이어나간 순간임도 고백했다. “나는 태선이 주인과 함께 가슴 아파하기를, 물이라도 좀더 다정히 건네주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혜진 선배의 해석은 달랐다. 결과물을 보고 완전히 납득했다. 영화에선 처음이지만 모녀의 삶에서 이런 순간은 처음이 아니라는 걸, 이전에도 얼마나 여러 번 쏟아내고 추스르며 살아온 순간일지 배우의 연기가 시간의 층을 담아낸 것이다. 매번 자기를 다 던져버리면 아이를 어떻게 계속 돌보겠나. 태선의 냉정함은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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