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영화의 주요 설정이 포함된 리뷰입니다.
한 감독의 세계가 확장하는 궤적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기쁨. <세계의 주인>을 본다는 것은 <우리집>(2019) 이후 6년 만에 세 번째 영화를 내놓은 윤가은 감독의 차분한 진일보를 목격하는 경험이다. 인물이 품은 순수를 동력 삼아 유년의 우정과 성장통을 그려온 윤가은 감독의 자질은 일찍이 회자되어왔다.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 조형과 섬세한 정서, 주제를 고르게 성취한 그의 영화는 반듯한 감동을 선사해왔고, 한국형 리얼리즘의 작가로서 그가 보여준 준수함은 산업적인 기대로도 이어졌다. 어린이 배우와 캐릭터를 대하는 창작자의 태도 면에서도 감독의 세계가 독보적인 영역을 확보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세계의 주인>에 이르러 보태고 싶은 감탄은 한층 품을 키운 형식과 단단함에 있다. 우선 <세계의 주인>은 대화(대사), 미술, 영화 전반의 감수성적 측면을 포괄해 동시대 10대의 생활양식을 흡수한 표면을 재현해낸다. 학교와 가정 안팎을 둘러싼 소우주를 밀도 있게 품은 영화는 그로부터 도달하려는 목적지까지 플롯을 담대하게 이끌어 서사의 매듭을 완결 짓는다. 장르 관성을 부풀린 일군의 ‘한국영화’들과 비서사 혹은 액티비즘에 가까운 독립영화들의 부지런한 출현 사이에 어떤 공백이 있었음을 <세계의 주인>을 보며 새삼 실감했다. 실재하는 삶을 성실히 묘사하면서도 핍진성에 갇히지 않는 이 영화는 픽션이 더 넓은 낙관과 선의, 용기로 가닿는 가능성의 장르임을 알려 준다.
미성숙하기에비로소 성장할 날들이 남아 있는
눈 뜨면 키가 한뼘 자라나는 유년의 집에서 진로상담이 한창인 공학고등학교 3학년의 교실로 자리를 옮긴 연령의 변화는,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종합하건대 쉬이 넘길 표면상의 변화만은 아니다. 머리는 일찍 커버렸지만 몸은 닥쳐온 호르몬의 농간에 혼란스러운 나이. 영화가 우선 부딪쳐오는 감각은 성과 사랑의 요청이다. 첫 화면, 교실에서 키스하는 주인(서수빈)과 남자 친구를 카메라는 멀리서 훔쳐보거나 비밀스럽게 엿보지 않고 그들의 팔딱대는 심장 근처에서 지켜본다. 부단하고도 열심인 율동을 지나 소개되는 주인은 남들보다 한뼘 더 씩씩하고 어쩌면 왈가닥인 18살이다. 사건은 동급생 수호가 학급을 돌며 아동 성범죄자 출소 반대 서명운동에 나서는 가운데 격화된다. 성폭행이 피해자의 삶을 망가뜨린다는 서명문의 묘사에 좀처럼 동의할 수 없는 주인은 수호의 취지를 알면서도 끝내 동참을 거부하고, 곧 둘 사이에 집요한 갈등이 이어진다. 영화의 미스터리는 이 무렵 증폭된다. 참다못해 “나도 성폭행 피해자”라고 교실 한가운데에서 외친 주인은 곧 농담처럼 진실을 눙친다. 명랑한 주인공의 표피와 그 안에서 비죽 솟아나온 어느 진실의 괴리를 영화가 담담히 제시할 때 서스펜스도 고조된다.
<세계의 주인>이 결정적 서정을 형성하고 관객의 마음을 풀어헤치는 요소는 괴력에 가까운 캐릭터의 생명력에 있다. 이 활기찬 여성의 사정 중에는 그가 친족 성폭행 피해자라는 정체성이 있는데, 주인은 그것을 조각보 같은 인생의 여러 단면 중 하나로 삼고자 한다. 성폭행 피해 당사자로서 주인은 서명문에 적힌 유구한 몰이해 앞에서 존엄을 찾기 위해 응수한 것이다. <세계의 주인>은 타인에게 쉽게 이해받기 힘든 자신의 진실을 위해 이른바 대의를 거부하고 버텨내는 실로 숭고한 형상을 전형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외려 우리가 보는 것은 울컥해서 떨리고 마는 목소리나 치밀어오는 열기를 이기지 못해 달려드는 어떤 몸, 미성숙하기에 비로소 성장할 날들이 남아 있는 사람의 지극한 형상이다.
주인공의 자기 고백과 익명의 쪽지라는 장치를 활용해 미스터리를 구사하는 이야기가 힘차게 박동하는 한편 영화의 내밀한 진심이 향하는 곳은 따로 있다. 주인과 그의 세계를 둘러싼 사람들의 내면, 안방의 꽃병, 숨길 수 없어 터지고 마는 응어리의 순간과 하루에도 수십번씩 바뀌는 사람의 마음이란 장소다. 삶에 남겨진 상흔을 일상의 파도 위에서 기꺼이 올라타버린 생존자들의 자세에 영화는 섬세히 다가가고자 한다. 매일같이 집에 꽃을 사오는 사람과 그 꽃이 말라 비틀어 죽을 때까지 돌보지 않는 사람은 하나일 수 있다. 잘 살고 싶은 마음으로 힘껏 웃는 얼굴과 죽지 못해 겨우 사느라 시들어가는 얼굴도 한 사람의 것일 수 있다. 남자 친구를 사귀고, 키스하기 좋아하고, 마음이 내킨다면 자보고도 싶은 혈기왕성한 10대가 성폭행 피해자일 수 있고, 그런 친구를 눈곱만큼도 헤아리지 못했던 무심한 남자애가 자신의 여동생을 잘 돌보고 싶은 책임감 때문에 어쩔 줄 몰라 엉엉 울 수도 있다. <세계의 주인>은 말을 건다. 자기와의 불화 없이, 타인에 대한 부끄러운 오해 없이 어떻게 살아 있겠습니까. 영화의 시선은 그 끝나지 않는 숙제 앞에서 가끔 실의에 빠지고 마는 중년에게도 향한다. 도무지 말이 없어 답답한 아버지의 초상과 딸의 포효 앞에 짐짓 건조한 얼굴을 짓는 어머니의 초상도 여기에 포함된다. 온화한 유치원 원장 선생님 태선(장혜진)은 술에 취해 자기 집 현관에 토하는 것으로 겨우 슬픔을 꺼내놓는다. 가장 절친한 이의 비극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 야속하고 서러워서 덜컥 회피하는 유라(강채윤)의 마음도 이 영화는 끌어안는다. 현관 모서리를 닦고 친구를 불러 세우는 주인의 안간힘은 물론 더욱 세게 끌어안는다.
복잡한 것을쉽게 풀어내지 않는다
‘주인’의 자리를 주인공에서 주변부로 넓힐 때 <세계의 주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리는 타인과 어떻게 함께 아플 수 있는가. 영화는 비일상적인 비극을 고백한 인물을 둘러싼 세간의 반응들에도 정확히 닻을 내린다. 두려움과 불편함이 내재된 배려가, 의구심과 혼란함이 뒤섞인 온정이 주인의 주위를 둥둥 떠다닌다. 묵음 처리되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익명의 쪽지는 소외된 당사자가 도달하기 쉬운 가슴 아픈 자기부정의 또 다른 형태일 것이다. 이 무렵 주인이 의지하는 자조 모임의 일원 중 미도(고민시)가 법정에 서서 아버지의 성폭력을 진술하는데, 피해 이후에도 아버지에게 용돈을 요구하고 받았다는 사실이 냉정히 추궁된다. 이때 윤가은의 영화가 믿는 세계의 얼굴이 커뮤니티의 맏언니 ‘인주’의 이름을 달고 뛰쳐나온다. 그녀가 법정의 제지를 무릅쓰고 하는 역할이란 용기를 내어 미도가 있는 곳까지 앞으로 걸어나오는 일, 말없이 한장의 손수건을 쥐어주는 일로 묘사된다.
<세계의 주인>이 정체를 질문하는 대상이 주인의 삶에 상흔을 남긴 과거의 가해자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대신 영화는 당면한 현재에 범인 찾기라는 과제를 만든다. 수호의 동생 목에 남겨진 상처는 누구의 소행인가, 쪽지의 주인은 어떤 저의를 가졌는가. 요컨대 윤가은 감독은 추리를 책임지는 이야기꾼이다. 어린이집 CCTV 속에서 주인은 유달리 내성적인 소녀에게 신체적 괴롭힘 앞에서 소리내어 아프다고 말할 것을 위악까지 마다않고 가르친다. 쪽지의 주인은 당신의 용기가 곧 자신의 용기가 되었노라고 고백한 뒤 마침내 교실 속 여러 얼굴들로 확장된다. <세계의 주인>이라는 성장과 생존의 미스터리는 이 아름답고 절실한 연루의 몽타주를 그리기 위한 여정이 되고야 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