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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은의 RECORDER] 혁명은 파도처럼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 중 최대 제작비가 투여된 블록버스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거대 자본과 할리우드 스타 배우들의 독보적인 연기, 무엇보다도 감독의 장르적 세공력이 놀라운 수준에서 결속한다는 찬사는 단지 오락적 성취만을 지시하지 않고, 감독이 그간 천착해온 과거의 문화나 신화 대신, 사회정치의 층위에서 미국의 현재성을 응시한다는 평가로 모인다. 혁명가 집단을 내세운 서사로 동시대 미국, 트럼프 집권하의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는 점, 악화 일로를 걷는 세상에서도 혁명 이후 세대에게 낙관적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점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반면 혁명을 대하는 이 영화의 서사적 엉성함이나 모호한 시선을 지적하는 평들도 간혹 눈에 띈다. 이러한 견해의 저변에는 앞선 호평의 논리와 반대로 혁명의 화두가 오락을 위해 느슨하게 소재화되었다는 감상이 자리할 것이다.

그 불만의 원인을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영화 속에서 혁명가 집단, 프렌치 75가 싸우는 대상이 공권력으로 뭉뚱그려 지시된다고 해도 그들이 “혁명 만세”를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쥘 때, 그 싸움의 맥락은 아리송하거나 구체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행동력의 기반이 될 이들의 사회적 토대나 내면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가 이를 보여주는 일에 의도적으로 힘을 들이지 않는다는 설명이 정확할 것이다. 혁명은 액션의 결과로 그려지며 그것이 놓인 인과의 차원은 별반 살펴지지 않는다. 이 영화의 캐릭터들도 감독의 지난 작품들에서 분열, 모순, 강박으로 점철된 존재들의 집요하고 기이한 결들과 비교하자면 일견 허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요컨대 시놉시스나 홍보 문구에서 밥 퍼거슨(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은 폭발물 제조가로 활약하다 16년이 지나 무력하고 체념적인 상태로 변한 과거의 ‘혁명가’로 언급되지만, 이는 부풀려진 묘사다. 영화 초반부터 우리 눈에 비친 그는 애초 혁명가로서의 자의식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과거나 현재나 자신이 놓인 상황은 물론, 수행해야 할 일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혁명이라는 용어는 영화 전반에서 반복되지만, 그것의 뿌리와 방향성은 애매하다. 한편 이 영화의 명징한 안타고니스트이자 반혁명론자로 불릴 스티븐 록조(숀 펜)는 백인 우익의 극단적이고 상투적인 면모들의 종합 세트다. 희화화를 위한 설정이라고 해도 창의적으로 생동하는 배우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일차원적으로 느껴졌을 확률도 배제할 수 없다.

나는 이 영화에 완전히 사로잡힌 관객 중 하나다. 다만, 도입부에서 이미 고양된 그 감흥의 정체가 영화가 환기하는 급박한 현실이나 혁명의 서사와는 좀 다른 지점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여긴다. 근사한 걸음걸이로 다리 위를 활보하는 여전사의 장면은 그 아래 이민자 수용소로 이어지고, 작전을 세우는 혁명가 무리의 모습은 그들이 한밤 수용소를 급습해서 군인들을 제압하며 이민자들을 구출해내고 마침내 폭탄 빛이 밤하늘을 수놓는 광경에 이른다. 숏의 진행과 교차는 빠르고 그 경로에 불명료한 요소는 없다. 이민자들을 가두던 철창 안이 어느새 군인들이 갇힌 장소로 급변해 눈 깜짝할 새 역전된 상황을 맞이할 때, 이 전환이 일으키는 흥분은 혁명가들이 거둔 승리의 의미에 기인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의미를 돌아볼 의지 없이 돌진해 제도의 이미지를 단숨에 전복해버리며 환희의 빛으로 날려버리는 혁명의 산발적이고도 화려한 이미지, 그 이미지의 추동력으로 수용소를 격파하고 마는 영화의 편집술, 속도, 통제력이 우리를 압도한다. 화면 안으로 우리의 눈을 빨아들여 이미지 바깥을 의식할 틈을 마련하지 않는 그 솜씨가 너무도 매끄럽고 강력해서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속임수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뒤늦게 안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행여 돋아날 그러한 의심의 가능성에 움츠리거나 거리끼지 않는 운동의 기세로 영화 끝까지 쾌속의 길을 개척하는 세계다. 그 기세에 올라탄 자만이 이 영화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밥이 술과 약에 취해 텔레비전으로 쳐다보던 <알제리 전투>(감독 질로 폰테코르보)는 이 영화와 실은 별 관계가 없다. 그 작품이 밥에게는 사라진 아내를 추억하는 몽롱한 잔상 같은 것일 수는 있겠으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알제리 전투>의 혁명 정신을 계승하지도 동경하지도 않는다. 폴 토머스 앤더슨이 이 영화에 불러들인 ‘혁명’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의 차원에서 작동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혁명은 유동의 욕망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영화 속 백인 엘리트 극우 집단인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은 아무런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는 밀실에 틀어박혀 아무런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길 원하며 아무런 움직임도 직접 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험하지 않는다. 이들이 등장하는 장면만큼 ‘반혁명적’인 이미지도 없을 것이다. 혁명은 단절을 감행하고, 다시 연결을 시도하는 운동, 말하자면 파도의 흐름 같은 것이다. 윌라의 가라테 스승인 세르지오(베니치오 델 토로)가 다급한 상황일수록 평정심을 찾으라며 ‘파도’를 떠올리라고 할 때, 그 말은 움직임을 멈추지 말고 가볍게 만들어 변동성을 지속하라는 뜻으로 들린다. 황량한 도로 위에서 경찰에 잡힌 그가 몸을 활짝 펴서 뜬금없이 새처럼 춤추는 몸짓은 이 영화에서 가장 침착하면서도 단단한 혁명가인 그가 “수백년째 당하는 신세”를 견디며 오랜 시간 내면화한 ‘파도’의 형식일 것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좇는 혁명의 형식은 상승과 하강의 운동을 시도하고 수용하는 육체성을 응시하며, 그것이 고통보다는 욕망과 쾌감의 영역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혁명의 이미지를 섹스의 이미지와 연루하는 방식은 그러므로 이 영화로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영화 초반, 관공서 폭파 장면과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와 밥의 섹스 장면은 숨 가쁜 긴장감으로 엮여 혁명의 속도를 높인다. 폭탄이 터지기 일보 직전은 이들이 성적으로 가장 흥분하는 순간이다. 앞서 언급한 도입부에서도 우리는 혁명에의 욕망과 성적인 욕망이 괴이한 상태로 접속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퍼피디아는 스티븐과 이민자 수용소에서 처음 마주한 날, 무방비한 스티븐에게 총을 겨누며 ‘일어나’(get up)라고 명령한다. 이 말은 스티븐의 단순한 투항만이 아닌 성적인 복종 또한 강제하는 이중의 용어가 되어 제압된 군인의 이미지를 희극적이고도 거북하게 그야말로 새삼스레 ‘일으킨다’. 의자에 앉은 스티븐은 별다른 저항 없이 자신의 성기를 세운다. 카메라는 성욕의 발현이라고도 성적인 굴복이라고도 판단하기 애매한, 솟은 성기를 자랑하듯 교묘한 표정을 짓는 권력자의 형상과 이를 의기양양한 자세로 짜릿하게 지켜보는 퍼피디아를 담는다. 진압과 항복의 운동으로 직진하던 긴급한 행로에 정치적으로 충돌하는 두 사람 사이의 끈적하고 은밀한 반응의 기류가 형성된다는 인상이 여기 이물감을 더한다. 이어지는 영화 전반부는 혁명 조직과 이를 저지하는 세력의 대립보다는 이 장면에서 성과 혁명의 기운이 얽혀 잉태된 씨앗이 발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퍼피디아와 스티븐은 욕망의 맹목적인 추종자로서 면모를 공유한다. 다만, 스티븐의 욕망이 권력욕과 페티시적 성욕으로 가시화되는 데 비해 퍼피디아의 그것은 불투명하다. 남편과 아기를 두고 혁명을 위해 집을 떠난다며 자율성을 운운할 때, 퍼피디아는 사회변혁과 같은 대의를 목표로 말하지 않는다. 그를 거듭 거리로 끌어내는 욕망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 초반, 이민자 수용소 공격을 앞두고 밥이 수제 폭탄으로 자신이 무얼 하면 되는지 어수룩하게 묻자, 퍼피디아는 시원하게 대답한다. “화려한 볼거리를 보여줘!” 밤하늘에 터뜨린 폭탄, 관공서를 부수는 화염, 한순간 눈부시게 펼쳐졌다 사라지는 빛, 그러니까 거대한 불꽃놀이와 다름없는 스펙터클이 퍼피디아에게는 혁명의 원천이자 양식이다. 영화는 누추하게 망가진 미국 사회의 풍경에 고개를 돌려 혁명의 원인으로 제시하지 않고, 혁명의 스펙터클을 주관하고 창조한 자들의 나르시시즘적인 희열과 거침없는 행보에 동참한다. 퍼피디아에게 흐르는 혁명가의 피는 그러한 스펙터클을 향한 본능이다. 그의 부모가 밥에게 한 말처럼 그 스펙터클을 향해 ‘달려가는’ 딸과 그의 ‘발목을 잡는’ 사위는 애초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인 셈이다. 퍼피디아가 혁명의 스펙터클이 폭발하기 전후로 도로를 가로질러 담대하게 걷고 뛰는 동작은 이 영화가 빚어낸 가장 멋진 리듬 중 하나다.

하나 영원한 스펙터클은 없다. 프렌치 75가 은행을 터는 장면에서 그 사실은 뼈저리게 각인되며 이들 조직이 와해되는 결정적 국면으로 작용한다. 이들은 복면도 쓰지 않고 대낮에 은행에 침투해, 마치 무대 위에서 존재감을 뽐내는 뮤지션처럼 직원들의 책상에 올라 “이것이 권력”이라며 스스로 새로운 권력의 스펙터클이 되길 자처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시적 이미지는 화면 바깥에서 갑작스레 들리는 총성에 의해 일순간 정지한다. 거듭된 경고에도 임무를 다하려던 은행 경비원이 퍼피디아가 쏜 총에 죽는다. 방아쇠를 당겨버린 퍼피디아나 이 광경을 지켜보던 동료들의 모습은 마치 이제야 혁명의 민낯을 마주하고 어찌할 바 모르는 자들처럼 얼어붙는다. 혁명가들의 자기도취적인 이미지를 멈추는 총소리, 참혹하게 널브러진 시체는 이전 장면들에서 이들이 열망하던 혁명의 아름다운 환영을 찢어버리는 구체적인 결과로 화면을 흔든다. 은행 장면은 피 흘리는 시신의 이미지를 동반하지 않던 폭탄 테러의 통쾌한 불꽃 광경과 같지 않다. 이 대목은 물론 여전히 장르적이지만, 자신만만하게 쾌감을 뽐내지 못한다.

은행에서 빠져나온 조직원들이 경찰과 벌이는 추격 장면은 프렌치 75에 남은 마지막 힘을 모조리 투여하듯 대단한 화력으로 전개되는데, 가장 인상적인 광경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화력의 소진을 알리는 후반부에 나온다. 차에서 빠져나와 맨몸으로 도로 위를 내달리는 퍼피디아는 경찰차들에 서서히 포위되고 어느새 지상의 움직임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헬리콥터의 시야 속에 놓인다. 퍼피디아는 더이상 스펙터클을 만들고 누리는 혁명가가 아니라, 공권력의 시선 안에 포박된 수동적인 스펙터클의 대상으로서 익명의 초라하고 무력한 좌표점으로 전락한다. 영화 전후반에 걸쳐 이미지와 함께 활발히 흘러넘치던 음악은 헬리콥터 시선과 시야의 위세, 헬리콥터 모터와 경찰차 사이렌 소리의 위력에 눌려 아예 증발해버린다(이 영화는 음악을 그저 과하게 소비하지 않는다!). 공권력의 눈이 혁명(가)을 무력화하며 장악하는 장면으로 이 이상의 방식을 상상하긴 어려울 것이다. 체포된 퍼피디아는 다음 장면에서 휠체어에 앉아 얼굴을 가린 채, 그를 둘러싼 백인 경찰들의 수치스러운 환호를 감내하고 있다. 겁 없이 혁명의 순간을 만끽하며 화면을 꽉 채우던 얼굴의 밀도는 오간 데 없다. 전반부 끝에 사라져버린 퍼피디아는 그 얼굴을 되찾지 못하고 영화 결말, 편지 속 평면적인 음성으로 돌아와 화면을 부유한다.

결국 혁명의 스펙터클이란 기만적이고 허망한 것인가. 16년 뒤, 밥과 윌라(체이스 인피니티)의 작은 오두막에 이른 후반부에서 한결 다층화된 리듬과 활동성으로 무장한 장면들은 한편의 영화로서 이러한 회의 섞인 자문에 굴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제 프렌치 75는 조직의 기동력과 스펙터클 모두 상실한 세계에서 어렴풋한 암호를 둘러싼 소모적인 퀴즈로만 과거의 존재감을 간신히 증명한다. 밥은 과거에서 건너온 암호에 화답해 죽은 혁명의 불씨를 현재에 되살릴 위치에 있지만, 이 수신인은 딸이 실종된 순간에도 시종일관 멍한 정신으로 엉뚱한 데서 무용한 실마리를 붙잡고 갈팡질팡한다. 그가 암호를 기억하지 못하고 핸드폰 충전기 콘센트를 찾아 헤매고 넘어지고 추락하는 동안, 목적지에 이르는 길은 지연된다.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밥이 낭비하는 시간은 이 영화의 재기 넘치는 유머와 베니치오 델 토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뛰어난 코미디 감각을 펼쳐내는 데에만 복무하지 않는다.

밥이 허비하는 시간의 동선에는 전반부에는 등장한 적 없는 하층계급 이민자 공동체의 풍경이 뿌리내려 있다. 그 풍경은 밥이 끝내 답하지 못한 프렌치 75의 집요한 질문, “몇시인가요?”에 대한 영화적 응답이다. 어두운 거리로 나선 시위대는 경찰들에 맞서 저항의 파동을 일으키는 중이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도로를 횡단하며 시위 행렬에 동참한 히스패닉 청년은 3차대전이 일어난 것 같다며 들뜬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밥에게 비밀 행로를 터주려는 청년들이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부리는 묘기의 실루엣은 활기찬 그림자놀이의 역동성을 닮았다. 이들 각각은 모두 이 밤, 혁명의 스펙터클을 이루는 주인공이다. 한편 공동체의 믿음직한 조력자 세르지오의 집 내부 곳곳에는 바깥의 소란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평온한 자태로 자기 공간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가족들이 있다. 그 집을 피난처 삼은 미등록 이주민들도 별다른 동요 없이 자리를 지킨다. 그 광경들을 쭉 따라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그저 야단스러운 기법이 아니라 이 집이 오래도록 굳건히 지켜낸 삶의 조건을 화면에 새기는 방식일 것이다. 세르지오의 집 안팎을 오가는 장면들은 혁명은 여전히 즐거운 것이라는 기조를 확장하면서, 전반부의 스펙터클이 포착하지 못한 혁명의 일상성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단 한번도 상황을 주도한 적 없는 인물인 밥이 신기하게도 영화의 중심축으로 점차 설득된다면, 그가 소모한 시간과 몸짓에 혁명의 강령이 미치지 못한 이야기들이 어느새 깃들고 비치기 때문일 것이다. 밥이 헤매는 시간은 평범한 생활인의 모습으로 곳곳에 숨은 동지들이 혁명의 맥으로 일순간 반짝이며 깨어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호흡을 해야 해.” 10대가 된 윌라의 얼굴로 후반부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에서 가라테를 연마하는 그를 향해 세르지오 “센세”는 말했다. 움직임의 굴곡을 느끼는 일, 그것이야말로 혁명의 호흡이며 영화 후반부를 지탱하는 믿음이다. 세르지오의 가르침이 마침내 극적으로 구현되는 순간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추격 장면에서다. 센세의 호흡을 습득하고 물려받은 윌라가 그 일을 해낸다. 그가 스티븐에게 고용된 용병들로부터 탈출해 두손에 수갑을 찬 채 운전대를 돌리는 동안,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일원으로 방금 스티븐을 제거한 남자의 차가 그 뒤를 쫓는다. 많은 이들이 상찬하는 이 대목의 빼어남은 벌판을 가로지르는, 장애물 하나 없는 도로의 굴곡진 지형에서 자동차 세대와 거울만으로 추격의 속도, 시야, 시점을 조율하는 독창적인 감각에 기인한다. 영화는 서퍼가 보드에 올라타기 위해 적절한 파도의 타이밍을 예리하게 주시하는 것처럼, 이 시퀀스를 설계한다. 기술과 스피드가 아니라 이 도로에 잠재된 운동성을 겸허히 체감하는 레이서가 추격전에 승리할 자격을 가질 것이다. 윌라는 도로의 곡절을 호흡하며 그 기류를 거스르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움직임을 멈출 순간을 터득해 수세적인 방법으로 공세를 취하는 데 성공한다. ‘크리스마스 모험가’는 목표를 향해 그저 속력을 높이는 전형적인 추격전의 자세로 무지하게 임하므로 애초 패배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파도’를 떠올리라는 센세의 조언이 여기서 비로소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것 같다.

부서진 차에서 피투성이로 내린 남자를 향해 윌라는 프렌치 75의 오래된 암호를 외친다. 그는 즉각 답하지 못하고 윌라가 쏜 총에 즉사한다. 아마도 윌라는 끝내 그의 정체를 알지 못하겠지만, 이 순간, 16년 동안 먼지 속에 잠자던 낡은 혁명의 기표는 건재함과 유효함을 선언하며 감격적으로 부활한다. 윌라는 의식하지 못한 채로 혁명의 경이로운 스펙터클을 본능적으로 창조한 것이며, 그때 봉인이 열리듯 “믿음의 장비”에서도 선율이 흘러나온다. 사태가 해결된 후 여지없이 뒤늦게 헐레벌떡 도착한 밥이 그 선율의 반쪽이 되어 비로소 음악을 완성하는 이 대목에는 이상한 울림이 있다. 투사라고 부르기 어려운 두 사람 사이, 바람 소리만 들리는 사막의 길에서 혁명의 음악이 그 어떤 수사보다 투명하고 잔잔한 결기로 살아남아 흐른다. 그 선율의 단순한 견고함은 윌라와 밥이 맞이하는 결말부에서 소리 없이, 영화의 태도로서 다시 상기된다. 소파에 널브러진 밥은 윌라에게 셀카 찍는 법을 배우고, 윌라는 오클랜드에서 일어난 시위에 동참하겠다며 집을 나선다.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감상적인 목소리로 귀환한 퍼피디아나 액션영화의 주인공처럼 죽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되살아나 가스실에서 살해되는 스티븐의 최후에는 다분히 극적인 기운이 깃들지만, 윌라와 밥의 이미지는 범상하기만 하다. 영화는 혁명의 장엄한 여운이나 아련한 기억, 혹은 주인공의 특별한 분위기로 결말에 힘을 실을 생각이 없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윌라가 향할 시위 집결지는 영화가 더는 닿을 수 없는 곳이라는 듯 그가 차에 올라 운전대를 잡는 찰나에서 카메라를 끈다. 장대한 여정의 유희와 임무를 거쳐 차분하게 ‘호흡’을 고르는 이 끝은 지금 우리의 현실이 어스름히 비치는 작은 창문을 열어둔 것일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마지막 장면은 앞선 혁명의 스펙터클이 도착한 정박지로서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그 소박한 이미지가 속삭인다. 이곳이야말로 미지의 활동을 다시 꿈꿀 새로운 출발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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