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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사라져가는 제지 공장의 장인과 영화 공장의 작가 감독, 김소영 평론가의 <어쩔수가없다>

유만수(이병헌)와 그의 잠재적 경쟁자들은 장인에 근접한 숙련 노동자들이며 관리직이다. 특수 제지 생산 라인을 관리한다. 그들이 제지 생산 마지막 단계에서 막대기로 종이를 두들기는 행위는 종이의 밀도, 결, 수분 함량을 확인하는 기술이다. 손과 귀, 막대기의 반향만으로 그들은 종이의 상태를 진단한다. 종이는 두드림 속에서, 악기가 연주자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듯, 숙련공만이 이해하는 리듬, 소리를 전달한다. 이때 두들김은 종이를 “죽은 물질”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으로 다루는 몸짓이다. 막대기는 단순한 검사 도구가 아니라, 세대를 이어온 장인 문화의 매개, 촉각과 청각을 타격, 확장하는 감각의 연장, 보철이 된다. 25년간 “종이 밥”을 먹는 것은, 이 감각들을 동시에 극대화하는 일이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지난 25년간의 노동문화가 양생한 이들의 감각에 미학적으로 전력을 다해 반응하고 감응한다. 영화의 작가론은 영화산업의 요구와 어느 정도 불화하며 성취하는 감독의 기술적 역량과 시각적 스타일, 세계관을 숭앙해왔다. 장인에 근접한 작가. 장인에 근접한 산업노동자. 이들은 관리를 한다.

제지 공장의 장인 노동자와 영화 공장의 작가 감독. AI 시대에 둘 다 존재를 위협받고 있다. 지금처럼 예측 불가능한 영화의 기후와 지형과 지질학 속에서 영화감독은 AI가 아직 충분히 시연해 보이지 못한 감각의 향연과 사투를 벌인다. 감각은 단순 수용이 아니라 몸의 지각이 세계와 얽히는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긴 시간이 빚어내는 숙련의 세계에서 만수의 손은 제지 공장을 떠나면 전정(가지치기)과 철사 감기를 통해 식물의 가지와 줄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휘게 하여 형태를 만든다. 그에겐 자신만의 온실이 있다.

부드러운 습자지와 연인의 입술을 견주는 범모(이성민)의 오감은 그 촉각을 넘어 청각, 음악을 향한다. 그는 아내로부터 수집한 LP 음반으로 실직 후 음악 카페를 내라는 권유를 받는다. 클래식, 재즈, 가요. 음악, 음향을 절창하는 이 영화의 진정한 짝패는 범모다. 그의 마지막이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라는 음향 이미지, 수려한 사운드스케이프에서 몸짓과 액션의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치러지는 신은 감각적이다. 그러나 이 감각은 죽음으로 향한다.

감각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진단들이 있다. 세계의 현상 이전에 ‘살아 있음’(life) 자체가 스스로를 감각하는 자기-현현이며, 미디어는 감각 비율(sense ratios)을 재편성하는 장치라는 것이다. 이때 활자, 전자매체 각각이 지각 구조를 변형시켜왔고 감각은 형식(form)이나 표상(representation)이 아니라 힘(force)으로 제시된다. 공장에 어둠을 가져오는 “소등라인”을 구사하는 AI 제어시스템, 디지털플랫폼의 스트리밍서비스에 대비되는 영화라는 빛의 수행, 제지 장인들의 열린 감각들은 형식과 표상만이 아니라 힘으로 수행된다. 그것은 감각의 총력전이다. 그래서 <어쩔수가없다>에서 진심으로 연대하는 것은 노동자들 서로가 아니라 이 두 장인의 세력이다. 영화업과 제지업은 중첩되고, 분기하며,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때 생산되는 것은 미학(Aesthetics)일까, 둔화(Anesthesia)일까.

중산층, 사회적으로 부서지기 쉬운 만족감

영화의 시작, 초가을 황홀한 햇살, 절정의 색, 단풍으로 향하는 나뭇잎들, 장어 굽는 냄새, 모차르트의 음악, 순종하는 개들, 포옹하는 가족들, 시간의 흔적이 묻어 있는 집, 만수의 다 이루었다는 만족감. 이 감정들은 단순히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권력이 정한 규칙에 따라 배치되고 규정된다. 제지 공장 관리직이자 가장인 만수는 이러한 감각, 감정, 정동, 지각의 관리자이기도 하다. 미리(손예진)는 아내에게 할당된 그 감정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장애가 있는 딸 리원(최소율)과 아들 시원(김우승)은 떨떠름하기만 하다.

이후 영화는 사회적으로 부서지기 쉬운 실체인 이 만족감을 실직, 재취업의 과정을 통해 일종의 아포리아로 이끈다. 길 없음, 막힘, 난관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아포리아(a-poros)는 단순히 ‘해답 없음’, ‘어쩔 수 없음’이 아니라, 정의와 윤리에 대한 생각을 더 깊이 끌어내는 생산적 난관을 지칭한다. <어쩔수가없다>는 이 아포리아 속에서 약간의 슬랩스틱을 곁들여 블랙코미디로 향한다. 일상적 질서와 극단적 부조리가 충돌하고 웃음은 즐거움이 아니라, 모순적 상황(죽음과 유머, 절망과 희극, 폭력과 일상)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려고 한다. 블랙코미디는 아포리아를 드러내는 미학적 조건이 되고, 아포리아는 블랙코미디가 서 있는 생각의 토대가 된다.

이 블랙코미디의 중간에는 흥미로운 미메시스가 있다. 만수는 경쟁자 범모를 죽이려고 관찰하면서 그의 감각과 생활을 가늠하고 학습하고 모방하고 개입한다는 것이다. 이 미메시스의 끝 단계에서 만수와 더불어 관객은 한국 사회의 구조조정, 해고라는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재구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감의 장’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미메시스의 순환으로 가는 대신 아포리아로 돌아간다. 범모는 오인과 오해 속에서 죽어가고, 만수는 예의 와이어링의 기술을 발휘해 시조(차승원)의 시체를 처리한다. 미메시스 강세에서 다시 블랙코미디로. 폭력은 점차 강화되며 선출(박희순)의 죽음의 사인은 위장되기에 이른다. 선출은 사악한 방식으로 충격적 죽임을 당한다. 만수는 이 모든 것을 “어쩔 수가 없다”로 되새김할 뿐이다. “어쩔 수가 없다”는 발언은 만수를 해고하는 가해자들과 피해자들이 번갈아가며 내뱉어지고, 이를 통해 언어 실행이나 수행성의 강도 자체는 강화되지만 재맥락화 과정에서 미심쩍은 알리바이, 핑계, 저주가 남는다.

감각의 과잉 끝에 무감각으로 향하다

이 와중에 “어쩔 수가 없다”를 누르는 과거의 무게는 만수 아버지의 것이다. 그는 베트남전 참전 시 습득한,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교훈을 안고 살았다. 북한제 총을 보유하고 있으며 큰 돼지 농장을 운영하다가 돼지 20만 마리를 묻은 후 자살했다. 만수가 사는 집도 아버지가 살던 곳이다. 만수가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사실 만수 아버지의 비극이 집을 포획하고 있던 셈이다. 이쯤에서 이 영화가 정향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다. 만수는 법과 정의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살인으로 내몰린 인물이 아니라, 애초에 법이라는 체계 자체를 신뢰하거나 선택지로 고려하지 않은 인물이란 사실을. 태양 제지 회사에 노조가 없고 미국 회사로 변한 것이 전제되고 있지만 노동청 중재, 행정소송 등은 삭제되어 있다. 경찰이 등장하지만 만수에 관한 한 사건을 헛짚고 있으며, 만수는 법망을 기름장어처럼 빠져나간다.

아포리아는 예컨대 정의를 실현하려 할 때 법을 따르는 것이 오히려 정의롭지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모순적 상황이기도 하며 진정한 책임은 이러한 불가능성 속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라는 발언은 이런 아포리아의 테제와 어디쯤에선가 결별한다. 연쇄살인, 감각 과잉, 예의 미학과 마비의 긴장을 붕괴시키고, 무감각에 가까운 어떤 것이 남는다.

붕괴 속에서 영화는 희귀한 모멘트를 제공한다. 일종의 노스탤지어다. 숙련 노동자가 공장에서 사적 공간에서 장인으로 제2의 삶, 감각적 취향을 향유할 수도 있었던 어떤 시기.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불가능해 보이는, 혹은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매우 소수일 한국 노동문화의 어떤 장. 즉,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이것이 영화적 사변의 세계, 이야기 만들기의 세계일 것이다. 여기에 노동과 노동의 가상적 외부가 기량 출중한 영화감독에 의해 스크린에 옮겨지는 것이 근미래에도 과연 가능할까 의문 이다.

사라져가는 남성 장인들, 가부장의 세계에서, 손녀 리원은 마치 할아버지의 트라우마. 그 격세유전의 표식처럼 언어장애를 84앓는다. 아버지 만수의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의 반복처럼 타인의 말을 반복한다. 20만 마리의 돼지들을 살처분한 끝에 자살한 할아버지, 집 마당 사과나무 아래에 돼지 묶기, 쇠줄로 묻혀 있는 시조, 블랙코미디 장르가 아니었다면 귀신이나 돼지의 혼령들이 출몰할 법한 으스스한 집에서 개들의 귀환을 반기며 리원은 마랭 마레의 곡을 첼로로 연주한다. 악보의 기호들이나 경청하는 골든 리트리버들이 문자나 언어로 이루어지는 소통이 아닌 다른 형태의 소통을 슬쩍 보여준다. 여기에 감각을 정치적, 젠더적으로 구성된 ‘위치지어진 지식’ (situated knowledges) 속에서 이해하는 관점, 감각을 신체-세계의 미세한 변조와 움직임의 잠재성으로 보는 견해를 참조해도 좋을 것이다.

AI의 도래와 지배가 초래할 감각의 기술적 매개(테크네) 문제는 만수가 재취업 후 소등 라인에서도 여전히 종이 롤 위로 막대기를 두드리고, AI 장비도 유사한 동작을 하면서 종이를 자르는 것으로 시사된다. 이것은 AI와 인간의 공진화일 수도 있지만, 인간은 만수 하나, 혼자다. 위태롭다.영화는 인간과 동물, 식물의 얽힘, 타자, 비인간에 대한 폭력을 환기시키며 환경을 근심하며 생명윤리를 시사하기도 하고, 감각의 절묘, 절창의 순간을 구성한다. 영화의 기후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이 세계를 여는 감각적, 정치적 잠재력을 지향하는 문인가에 관해서는 의문이다. 기후 위기 속 노동의 위태로운 불안정 속에서, 영화의 기후는 향연과 사투, 미학적 성취와 감각의 마비를 넘어 잔존하는 빛, 사멸하지 않은 무엇의 안부를 묻는 것이다. 기후라는 말 속의 ‘후’(候)는 단지 대기의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안부를 묻는 행위, 생명의 상태를 살피는 몸짓을 포함한다. 따라서 영화의 기후를 말한다는 것은, 곧 생명의 안부를 묻는 행위이기도 하다(후(候)는 기후를 뜻할 뿐 아니라 살피고 안부를 묻는다는 뜻도 있다.-편집자).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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