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인터뷰] 간절하게 절실하게 처절하게, <어쩔수가없다> 배우 이병헌
남선우 2025-10-03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배우 이병헌은 <공동경비구역 JSA> <쓰리, 몬스터>에 속한 단편 <컷> 이후 20여년 만에 박찬욱 월드로 회귀했다. 그가 <어쩔수가없다>에서 받아든 배역 유만수는 어쩐지 “오늘만 대충 수습”하기로 했던 <올드보이>의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이름을 가졌다. 각본도 그 말장난의 충동을 참지 않는다. 기어코 만수와 오랜 라이벌 관계에 놓인 동네 친구의 입을 빌려 “유지 보수만 수차례”라는 농담을 한다.

그 말이 웃기지만은 않은 까닭은 유만수라는 남자가 과연 인생의 유지 보수를 필요로 하는 계절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아내와 두 아이를 건사해야 하는 가장이 직업을 잃었다. 25년을 바쳐가며 나름대로 자부심을 키운 회사에서 쫓겨났다. 가족에게 나눠줄 장어를 바싹 구워 먹으며 정력을 발휘해보려 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남편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형편없어졌다. ‘어쩔 수가 없다’는 변명을 등에 업고, 경쟁자들을 살해해서라도 경력직으로 재취업하고 싶어질 정도다.

배우 이병헌에게도 만수의 계획은 황당하게 들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납득해야 하는지, 납득시켜야 하는지 헷갈렸다. <악마를 보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심지어 <오징어 게임> 시리즈에서도 이런 식의 살인자를 연기해본 적은 없었다. 인물이 타인을 살해하기까지, 혹은 그에 준하는 범죄에 가담하기까지 어떤 비극을 통과했는지 표현해내는 것은 그에게 익숙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만수에게는 ‘당위’라는 개념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병헌은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것은 영화적 설정이자 은유적 선택이라고. 그러자 <어쩔수가없다>라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는 핵심 정서가 살아 숨 쉬기 시작했다. 만수가 잘려야만 했던 이유가 없는데 만수가 죽여서는 안될 이유란 또 뭐란 말인가. 그 치가 떨리는 뻔뻔함으로, 이병헌은 자주 우스꽝스러워지되 가끔 불쌍해져가며 의문을 도끼질한다. 영화 속 실직자의 아내도 말하지 않았나. “실직이 아니라 실직에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문제다.” 이병헌은 이제 관객에게 그 도끼를 건넨다.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어떻게 독해하느냐가 문제로 남았다.

- 박찬욱 감독의 숙원 프로젝트였던 만큼 주연으로 합류하기 전부터 <어쩔수가없다>에 관한 비전을 들었을 테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접한 때를 기억하나.

10년도 더 된 과거에 감독님과 미국에서 차 한잔하다가 짧게 전해 들었다. <도끼>(국내에서는 원제 <The Ax>를 음차한 <액스>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편집자)라는 소설이 있는데, 미국에서 영화로 만들 거라고. 그때는 어떤 내용인지도 몰랐고, 어떤 배우가 물망에 올라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세월이 한참 흘러 감독님이 이 영화를 한국에서 만들 계획이니 시나리오를 한번 읽어봐달라고 요청하셨다.

- 그게 언제쯤인가.

크랭크인 3개월 전쯤이었다.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기대를 안고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다가 당황했다. 내가 처음 읽은 것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문 시나리오를 한글로 번역한 버전이었기 때문이다. 어딘지 현실감이 잘 느껴지지 않았고, 전체적인 정서를 파악하기에도 어려웠다. 한국화된 시나리오가 완성되기까지 기다렸고, 그걸 읽은 후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 바뀐 시나리오에서 체감한 변화는 무엇이었나.

문화적인 변화가 컸다. 덕분에 현실에 발 붙인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감각이 생겨 글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각색 과정에서 지금 대두되는 사회적 쟁점들도 첨가돼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문제들이 더 잘 드러나는 각본이 되었다. 많은 관객이 좋아할 수 있는 블랙코미디가 될 것 같았다.

- 새 시나리오를 읽는 동안 블랙코미디의 매력도 더 크게 다가왔나 보다.

내가 작가의 의도대로 읽은 게 맞나 싶어 감독님에게 물었다. 웃기는 부분이 많던데, 그게 다 의도된 지점이었냐고. 그랬더니 감독님도 의도한 게 맞는 거라고, 웃겨주면 좋겠다고 하셨다. 실제로 촬영하면서도 많이 웃었다. 감독님과 나는 작품을 함께하지 않는 동안에도 친구 사이로 지내왔기에 서로 유머 쿵짝이 잘 맞았다. 대놓고 웃을 수만은 없는, 제3자의 입장에서만 우스꽝스럽지 당사자로서는 웃긴 장면 하나 없는 아이러니를 이 영화만의 묘한 정서로 이해했다. 사실 만수가 정말 모든 것을 다 잃은 무(無)의 상태는 아니지 않나. 중산층 가장으로서 지키고 싶은 것들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였으니 최악의 선택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때의 처절함, 비참함, 연민이 블랙코미디로 느껴지게끔 표현하고 싶었다.

- 배우로서 그 “최악의 선택”에 얼마큼의 현실감을 부여할 것인지가 관건이었을 텐데.

가장 큰 딜레마였다. 만수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을 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감독님과도 이게 괜찮은 건지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결국에는 나 자신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건 영화적 설정이라고. 만수가 살인을 결심하는 과정을 일일이 설명하려면 10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만수의 감정으로부터 너무 튕겨져 나오지는 않게 하고 싶은 마음에 디테일을 잡아갔다. 만수의 절실함을 더 보여줬으면 해서 여러 아이디어도 냈고.

- 예를 든다면.

딸 리원(최소율)이 강아지 집에 들어가 강아지들의 이름을 반복해 부르며 울지 않나. 그때 만수의 표정은 정말이지 모든 것을 다 잃은 표정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것을 잃기 전에 커다란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다는 마음이 그 표정에서 읽혀야 했다. 그래서 그 장면에서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탁 들면서, 평범한 사람이 아픈 와중에도 내릴 수 있는 독한 결심이 읽히게끔 연기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상태에서 그 신이 끝나더라. (웃음) 감독님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그다음 장면인 화장실 신에서도 만수가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연결감을 주고 싶으셨다고 한다. 아무튼 관객이 조금이나마 주인공 편에서 영화를 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노력들을 했지만, 영화적 설정 자체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웃음)

- <어쩔수가없다>는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그런 영화적 설정을 선전포고한다. 꽃잎이 미친 듯이 흩날리는 가운데 만수네 가족이 ‘행복’이라는 악보를 불협화음으로 연주하는 듯하달까. 그 끝에 “와라, 가을아!”라는 만수의 한마디가 꽂히는데, 대사 톤을 잡아가기까지 어떤 논의가 있었나.

거기서부터 어떤 암시를 줘야 한다는 감독님의 요청은 없었다. ‘나 이제 좀 살만 한 것 같다’라는, 행복에 겨운 가장의 마음이 느껴지는 말투 정도만 염두에 뒀다. 그 안에 슬쩍, 만수 자신도 잘 모르는 그만의 마초적인 느낌이 났으면 했다.

- 그 마초 냄새가 만수의 콧수염에도 배어 있다.

그게 만수만의 멋과 여유 아니었을까. 누군가에게는 액세서리나 말총머리 같은 헤어스타일이 그러하듯 만수는 자기가 좀 살만 해졌을 때 콧수염을 길러보고 싶었을 거다. 수염과 머리 분장도 두 가지 버전으로 테스트했다. 레퍼런스 중에 배우 스티브 매퀸의 사진이 있었고, 결국 그의 곱슬곱슬한 헤어스타일에 콧수염이 추가된 버전이 채택되었다. 곱슬머리 가발을 쓰고, 오프닝 시퀀스의 복장인 하와이안 셔츠 같은 것을 입고 카메라 테스트를 했는데, 감독님이 아주 좋아하셨다. 내 눈에는 약간 라틴 아메리카 범죄 조직원처럼 보였지만. (웃음) 그 분장이 해외 평론가들에게는 찰리 채플린을 연상시키기도 한 모양이더라. 후반부 공장 신을 <모던 타임즈>와 엮어 이 영화가 슬랩스틱코미디 같다고 평한 이들이 있었다.

- 만수가 노리는 세명의 타깃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범모(이성민), 시조(차승원), 선출(박희순)은 언뜻 만수의 분신처럼도 보이는데, 만수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미묘하게 다르다. 범모에게는 연민을, 시조에게는 위화감을, 선출에게는 부러움을 느끼는 것 같았는데 배우로서는 어떻게 접근했나.

만수는 세 사람에게서 자신을 볼 수밖에 없다. 감독님이 그런 장치를 처음부터 심어두었고, 특히 선출은 캐스팅에서부터 그 점을 고려했다고 들었다. 박찬욱 감독님이 이전부터 이병헌과 박희순의 마스크가 닮았다고 생각해 선출 역으로 박희순 배우를 떠올렸다고 한다. 만수 입장에서는 자기가 더 잘 풀렸더라면 선출처럼 됐을 거라고 여기지 않았을까. 범모를 보면서는 인간적인 갈등을 느꼈을 거다. 그의 아내인 아라(염혜란)가 젊은 남자와 바람피우는 모습을 보며 범모를 동정하고, 자기 와이프 미리(손예진)까지 의심하지 않나. 자기가 죽일 사람에게 감정 이입하는 셈이다. 한편 시조와 만수는 딸에 대한 부성애로 통한다. 만수는 리원이 남들이 하는 말을 반복할 뿐이라는 걱정을 시조에게 처음으로 털어놓는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다가도 동요하는 것이다. 부산에서 만난 한 관객도 만수가 타깃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갈 때마다 그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더라. 옳은 해석이라고 본다.

- <어쩔수가없다>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은 만수만이 아니다. 그의 아들 시원(김우승)이 절도 혐의로 경찰서에 갈 때 만수가 시원을 붙잡고 하는 이야기는 그가 자신에게 거는 주문처럼도 들린다.

감독님이 제일 좋아한 신 중 하나다. 내게 직접 칭찬하지는 않으셨는데, 백지선 모호필름 대표에게 “어제 경찰서 신에서 병헌이가 너무 잘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잘했지 그럼! (웃음) 나와 감독님은 그 장면을 보며 많이 웃었는데, 확실히 관객과는 웃음 포인트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 관객 입장에서는 착잡한 순간이었다. (웃음)

우리끼리는 웃었다. 그러니까 그때 만수가 아들에게 하는 대사는 사실상 자기 얘기다. “혼자서 범죄를 저지른다는 건 외로운 일”이라는 말을 하면서 아들 따귀를 살짝 때리고, 서로 머리를 콩콩 부딪치고, 아이는 아파하고. 그 상황 자체가 웃길 수밖에.

- 그런 웃음을 공유할 수 있는 박찬욱 세계에 다시 다녀온 소감은.

감독님과의 작업이 매우 오랜만이었지만 그와 함께하는 현장에서의 감각을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루이틀 만에 ‘맞아, 박 감독님 스타일이 이랬지!’라고 했다. 벽지 색깔부터 의상 패턴, 조명 위치까지 디테일하게 주문하는 감독님과 있으니 나 또한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느 영화건 ‘여기가 가장 관건이다’ 싶은 대목이 있기 마련인데, <어쩔수가없다> 시나리오에는 그런 부분이 너무 많았다. 가끔은 끔찍하기까지 했다. (웃음) 새삼 내가 진짜 ‘영화’를 찍고 있구나 싶었다.

빛을 피해 저글링하기

범모, 아라와의 <고추잠자리> 소동, 선출과의 마지막 대면 등 관객이 반한 베스트 신도 만만치 않게 까다로웠지만 배우 이병헌이 가장 고생스럽게 촬영한 것으로 꼽은 건 만수의 첫 면접 신이다. 건물 건너편에서 비추는 햇빛 때문에 상당히 불편한 와중에도 만수가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애쓰는 장면 말이다. “만수가 빛을 피해 조금씩 그늘쪽으로 움직이는데, 긴장한 상태로 다리를 계속 떨고, 그러다 그 떨림을 의식해 한손으로 다리를 누른다. 치통이 밀려와 평상시처럼 손을 턱으로 올리다가도 면접 자리라는 걸 떠올리고는 손을 내린다…. 대사를 치면서 해야 하는 모든 행동이 지문에 적혀 있었다. 외발자전거를 타면서 저글링하는 기분이었다.” 현장에서 실제로 조명을 쐬면서 연기해야 했기에 얼굴이 심하게 뜨거워지기까지 했다고.

관련영화

관련인물

사진제공 BH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