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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경계에서 중심까지, <국보>로 부산 찾은 이상일 감독의 작품세계
김소미 사진 백종헌 2025-10-03

이상일 감독, <국보>를 말하다

“네 피를 마시고 싶다.” 야쿠자의 아들로 태어난 주인공 기쿠오(요시자와 료)가 일본 전통극 가부키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적통을 이어받은 라이벌 스케(요코하마 류세이)와 50년의 요동치는 관계를 이어간다. 일본영화계에서는 오랫동안 소재로 삼기 어려운 분야로 여겨졌던 가부키의 주인공들을 내세워 천만 관객 돌파라는 흥행 기록을 세운 이상일 감독은 기자회견 자리에서 <국보>에 대해 “고도의 예술을 추구하며 사람만이 보여주는 풍경을 그리고자 했다”라고 말했다. <패왕별희>(1993)의 충격을 머금은 후 20년. 가부키 세계의 찬란한 환희와 비애를 175분에 달하는 영화로 완성한 이상일 감독에게 해운대 인근에서 다시 만남을 청했다.

원작자 요시다 슈이치와의 협업

<악인>을 계기로 작가 요시다 슈이치와 협업을 시작한 이상일 감독은 2010년대 초 무렵부터 여러 해에 걸쳐 그와 함께 온나가타(가부키에서 여성 역할을 연기하는 남자배우)에 관한 자료를 찾고 이야기를 구상해왔다. 그사이 <분노>를 거쳐 <국보>로 맺어진 두 사람의 질긴 인연에 대해 이상일은 “인간을 향한 허무와 애정이 공존하는 시선”이 닮았다고 자평한다. 냉혹함과 뜨거움의 공존이 두 이야기꾼의 정서적 지지대임은 확실해 보인다. 2018년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발표 이후 본격적인 영화 각본 개발에만 추가로 2년을 쏟은 후, “최소 예산 10억엔, 러닝타임 최소 3시간”으로 작품 성립에 필요한 구체적인 요건들을 세웠다.

왜 3시간인가

단순히 소설의 정보량을 빼곡히 담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원작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면 “OTT에서 8화 분량도 채울 수 있는” 이야기를 이상일 감독은 “3시간이 어렵다면 전편 2시간, 후편 2시간으로 조율해서라도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3시간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려면 직감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는 게 감독의 전언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등 내가 흡수한 명작들의 길이와 리듬이 있다. 반드시 시간을 견뎌야만 체험되는 충격이 있다. 고전적 영화들의 흐름과 비슷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실제 가부키 무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과 같은 감각 역시 추구했다.”

예술가의 업과 혼

국보로서의 삶과 자기를 일치한 예술가의 숙명은 <국보>에서 피를 토하듯 긁어내는 통곡의 목소리처럼 찢어지는 감정으로 전달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사람에게는 헌신만큼 오만함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다. 원하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살아감에 있어 사실상 불가능하다. 분별하고 선택하는 것 또한 용기다. 결말에 이르러 예술가의 삶에 대한 이러한 가치도 녹이고자 했다.”

공상적 생물, 온나가타

호흡과 발성, 어깨와 고개의 움직임, 손짓 하나까지 엄격하고 세밀한 양식이 정해진 온나가타의 연기를 배우들이 체화하는 과정에서 이상일 감독은 실제 가부키 배우들의 지도로 철저한 정확성을 추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보다 한층 복잡한 쪽은 온나가타의 정신을 갖는 일이다. 이상일 감독은 “남자배우가 여성을 연기하는 가부키 속 온나가타를 현실의 여성성과 온전히 빗대기는 힘들고, <국보>가 통과하는 시대적 배경상 현대적 여성성과도 다르다. 한마디로 공상적 생물이 지닌 정념을 파낸다는 어려움을 느꼈다. 이는 극 중 가부키 명문가 당주인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겐)가 말하는, 사랑하는 남자와 죽고 싶은 온나가타의 마음이라는 특유의 정념과도 연결된다.”

텅 비어 있는 아름다움

이상일이 요시자와 료를 만난 것은 그가 대하드라마 <청천을 찔러라>로 국민적 인기를 구가하기 전이었다. 이상일 감독은 <국보>의 출발점이 요시자와 료가 될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그런 특질을 가진 배우는 많지 않다.” 감독은 단박에 짚어 말했다. “아름다운 얼굴도 뛰어났지만, 도자기 인형 같다고 할까. 내부에 깊은 영역이 자리 잡고 있어 무엇이든 들어갈 수 있고, 동시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듯한 공동(空洞)감 같은 것을 느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로 국내 관객에게 먼저 눈도장을 찍은 구로카와 소야가 기쿠오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다.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투명하고 순수한 눈빛만으로 충분해서 요시자와 료와 그다지 닮지 않았음에도 캐스팅했다.” 한편 스케 역에 요코하마 류세이가 합류하면서 <국보>의 조합은 비로소 완성형으로 거듭났다. 이상일 감독이 극 중 캐릭터와도 결부된 두 배우의 개성을 절묘히 묘사했다. “정말로 신기하다. 요코하마에게선 요시자와의 공동감과는 정반대의, 가득 차 있기에 특별한 사람의 느낌이 난다.”

영화, 그리고 가부키 사이의 경계인

“아직도 좋은 대답을 찾고 있다.” 영화와 가부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국보>와 이상일 감독이 있다. 이 경계 위의 정체성이 <국보>에 남긴 흔적을 묻자, 부산에 도착한 이후 비슷한 질문을 끝말잇기처럼 되돌려받는 중인 감독이 초연히 웃는다. “고등학생 때까지 조선 학교에 다녔고 재일 한국인 커뮤니티의 폐쇄성을 피부로 경험했다. 학교 안의 세계, 거기서 한 발짝만 나가면 존재하는 일본 사회의 차이를 느끼는 것이 곧 내 삶이었다. 경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서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내게 경계 양쪽의 세계는 대립 항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한 다름, 둘 사이의 오고 감을 피부감각처럼 체화했다. 내 영화 만들기는 이러한 구분을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몰두하는 초상

<유랑의 달>이후 <국보>를 선보였다는 점이 이상일 감독을 향한 지금의 감탄사에 더욱 신기함을 불어넣는다. 가만 살펴보면 어긋난 사랑, 복수심, 순진한 악의, 파국적인 예술혼을 아우르는 그의 영화를 지나치게 몰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수렴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감독은 이것을 “개인이 지닌 에고이즘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드러내는 이야기”라고 바꿔 말한다. 이어서 그는 테이크를 집요하게 반복하는 것으로 알려진 자신의 연기 연출 방식을 언급했다. “내게는 배우에게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드러내게 요구하는 습성이 있는데 그것 또한 에고이즘의 발로가 아닐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를 몰아세우지 않고 곁에서 고난을 함께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한다. 내 인물들이 그러한 것처럼 나 또한 언제나 양면성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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