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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페촐트의 시네마일까. 우리의 인생일까, <미러 넘버 3>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원소 3부작’을 완성하는 마지막 작품. 베를린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라우라(파울라 베어)는 남자 친구와 함께 내키지 않는 여정에 오른다. 그녀는 길 한가운데에 서 있던 이방인 베티(바르바라 아우어)와 시선을 주고받는다. 이윽고 불의의 사고로 남자 친구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라우라는 베티의 손길에 의식을 되찾는다. 라우라가 베티와 함께 머물기를 간청하면서, 그리고 베티는 마치 그녀를 오랜 시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라우라를 집 안으로 들이면서 둘은 기묘한 돌봄의 관계를 맺는다. 그녀는 베티의 보살핌 속에 먹고, 입고, 자전거를 타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새로운 삶에 정착하려 한다. 그러나 그곳의 가구들은 어딘가 늘 고장 나며, 베티의 남편과 아들이 라우라를 대하는 태도는 이 임시적 모녀 관계에 숨겨진 다른 의도가 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미러 넘버 3>는 사고에서 깨어난 라우라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표층의 서사와 베티 가족이 비밀스레 공유하는 상실의 기억이 촉발한 불안의 기류가 팽팽하게 공존하는 영화다. 죽음이 남긴 공백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낯선 이들이 인력과 척력을 오가며 빚어내는 미묘한 긴장감은 미니멀한 서사에 무한의 깊이감을 더한다. 전작 <운디네>와 <어파이어>에서 물과 불의 형상을 각각 설화적, 우화적으로 치환하여 자연의 섭리를 되짚어보려 했던 페촐트는, 모리스 라벨의 음악을 제목 삼아 바람과 공기를 두 여인의 인생 속으로 불어넣는 실험을 감행했다. 신체의 재활과 기억의 재림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 위로 피아노의 선율이 청아하게 울려 퍼진다. 미지의 순간에서 오랜 시간 염원해온 사건으로의 도약. 이것은 페촐트의 시네마일까, 우리의 인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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