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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발이 푹푹 빠지는 늪을 닮은 사람, 감정, <홍이> 배우 장선, 변중희
유선아 사진 박종덕(객원기자) 2025-09-25

“이렇게 된 거 네 잘못 없어, 근데 내 잘못도 아니야.”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가끔씩 서글퍼지는 삶도 있다. 이홍(장선)은 서희(변중희)의 딸로 제 앞가림 하나 못하면서 치매 초기 증세를 보이는 엄마의 통장을 노리고 무작정 동거를 시작한다. 배우 장선이 연기한 홍이의 눈길에는 내뱉지 않은 말들이 지나가고, 배우 변중희가 연기한 서희의 시선에서는 서서히 지워져가는 기억 저편의 날들이 흘러가고 있음이 어렴풋이 보인다. <홍이>에서 딸 홍이와 엄마 서희를 살아낸 장선, 변중희 두 배우에게 엄마와 딸로서 마주한 순간에 대해 다시 떠올려보기를 청했다.

장선, 변중희(왼쪽부터).

- 모두가 어머니는 아니어도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딸이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은 뒤의 감상이 궁금하다.

장선 치매 증상을 보이는 엄마와 살게 된 딸이라고 생각하면 상상하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영화는 시작부터 홍이가 다른 마음을 품고 요양원에서 엄마를 퇴원시킨 사실을 드러내서 다른 매력을 가진다. 홍이처럼 살고 있는 누군가가 분명히 있을 텐데 지금까지 영화의 주인공으로 많이 다뤄지지 않기도 했고. 보통 관객이 주인공 편에 쉽게 설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홍이>는 그렇지 않다. 내가 홍이에게 애정을 갖고 시나리오를 읽었음에도 모순적이고 비겁한 모습들이 가감 없이 나오니 이 인물의 솔직함을 보는 작업도 의미 있겠다 생각했다.

변중희 딸과 엄마의 관계에 대해 경험으로 아는 게 다였다. 서희에 대해 가능한 여러 생각을 했을 뿐이다. 영화 초반, 서희가 요양원에서 나와 딸과 기념사진을 찍을 때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딸하고 같이 살게 됐다는 기대와 기쁨이 있었던 것 같다. 서희는 외로운 엄마지만 외로움에 지배당하지 않는 엄마, 강한 엄마라는 인상이 남았다.

- 서희는 딸 홍이에게 “그래야 잘 살아. 그렇게 하면 복 달아나” 같은 말을 자주 한다. 모녀 사이에서 전승되는 이런 미신적인 말들은 대체 뭘까 싶었는데 <홍이>를 통해 보이는 건 결국 솔직하게 전하지 못하는 마음인 것 같더라.

변중희 엄마가 그렇다. 내게도 딸이 있는데 말은 모질게 해도 네가 조금 더 잘 살았으면, 편안했으면 좋겠어, 덜 힘들면 좋겠어, 이런 속마음이 있는 거다.

장선 정말 신기했던 게 촬영 현장에서 엄마 서희가 쌀쌀맞다고 생각했다. 하는 말마다 비수처럼 꽂히고 말도 안 통하는 것 같고. 그런데 영화로 보니 엄마가 눈으로 홍이를 계속 응원하고 있더라. 촬영 때 나를 후벼팠던 말도 사실은 엄마의 위로였는데 홍이는 볼 수 없었던 거다. 가까이 있어도 서로 보지 못하는 무언가가 그 사이에 있었겠구나 싶었다.

- 변중희 배우는 39년간 교직에 몸담았다고. 배우의 꿈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나.

변중희 중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쳤다. 49살에 집단 상담 프로그램에서 연상화 그리기를 했는데 다시 뭘 한다면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었다. 1999년 무렵 연극 동호회 참여를 시작으로 선생님끼리 교육극단 푸른숲을 만들어 해마다 공연을 올렸다. 그러다 안선경 감독의 <파스카>에 단역을 구한다고 해서 영화에 처음 출연했는데 스크린 속 내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영화배우는 너무 먼 꿈이라 ‘퇴직하면 MBC 탤런트 해야지’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영화를 하고 있다. (웃음).

- 이홍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과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다 있는 캐릭터다. 황슬기 감독이 A4 용지에 인물의 전사를 적어주었다고 하던데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장선 공감할 수 있는 부분과 정말 왜 저럴까 하는 부분이 홍이에게 공존하는 게 너무 매력적이라 느껴졌다. 그 입체적 면모가 각본 안의 인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한 사람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황슬기 감독은 첫 만남에서 홍이가 미워 보이지도, 너무 가여워 보이지도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나 역시 동의했다. 언제 눈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이지만 그런 해소조차도 허락되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최대한 눈물을 아끼고 감정을 덜어내는 방향으로 가자고 정했다. 한여름의 김 빠진 미지근한 맥주, 아니면 발이 푹푹 빠지는 늪 같은 것이 우리가 떠올린 홍이의 이미지다.

- 집 안에서 촬영한 장면이 많은데 두 사람 사이의 역사를 드러내는 말과 감정 표현에 기댄 연기 비중이 커 보인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마주 보지 않는 가족을 연기하는 장면은 어떻게 임했나.

장선 촬영 장소는 황슬기 감독의 예전 집이다. 다행히도 서사 순으로 촬영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엄마와 나란히 앉아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엄마를 바라보고 싶지 않았거나 바라볼 용기가 없었거나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영화처럼 홍이의 삶이 차곡차곡 쌓일 수 있도록 순서대로 촬영했던 게 연기에 도움이 많이 됐다.

변중희 집에서의 생활은 서희에게서 끝없이 어떤 면모를 보여주게 만든다. 이를테면 서희는 문을 열어두고 화장실을 사용하고 문을 닫으려는 딸에게 그러지 못하게 한다든지, 홍이에게 계속 매니큐어를 발라달라고 조르곤 하는 엄마의 외로움 같은 것들 말이다. 시선을 딸의 얼굴에 두지 않고 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지금 돌이켜보면 자책하는 마음으로 연기했던 것도 같다.

- 황슬기 감독이 원인과 결과로 홍이를 이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듯 영화는 설명이 많지 않다. 홍이와 서희는 어떻게 서로를 바라볼까. 또 각자가 연기한 인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달라.

변중희 서희는 지금의 내 미래이기도 하니까 연기하다 보면 ‘서희의 이런 부분을 닮지 말아야지’ 다짐하기도 한다. 홍이를 볼 땐 이런 딸을 내가 낳았다는 생각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진짜 딸 같으니 어떤 때 보면 한심하고 쥐어박고 싶기도 하지만 딸을 지켜주고자 하는 엄마의 마음이 있었다. 그게 잘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장선 “홍이는 엄마를 무서워하니까”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변중희 선배님이 “홍이가 엄마를 왜 무서워 해”라고 하셨다. 홍이는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은데 지금은 조금 멋있게 살지 못하니 그게 부끄럽고 미안하고 죄책감도 있었을 거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나한테 이 정도는 해줘도 되잖아’ 하는 배짱도 부리고픈 마음도 있었을 거고. 홍이를 떠올리면 참 가슴이 아픈데 촬영 때 우리가 정말 많이 했던 말이 “아이고, 홍이야”였다. 현장 스태프도, 홍이를 연기한 나도 홍이를 향해서는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 엄마와 딸이라는 혈연관계를 타인과 연기한다는 건 어떤 일일까. 연기 전이나 후에 어떤 감정이나 생각이 불려나오는 작업이었을지 <홍이>를 보고 나서 궁금해졌다.

장선 정말 어려운 일이다. 오랜 연인 혹은 가족을 연기하는 일은 특히 까다롭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변중희 선배님에게서는 첫 촬영부터 나를 딸로 바라봐주고 있다는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상황에 더 자연스럽게 들어설 수 있었다. 모녀가 나오는 작품은 몇번 했는데 내가 엄마가 된 적도, 딸이 된 적도 있다. 연기한 후에 확실히 달라지는 건 분명히 있다. 정말 모녀 사이는 아니어도 촬영하며 주고받은 마음이 쌓여서 서로가 각별하게 느껴진다. 다른 관계나 역할로 만났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마음이 생겨난다.

변중희 일방통행은 없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마음이 있지. 장선 배우는 표정에서 속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로 연기를 할 때마다 깜짝 놀란다. 그 후로 스크린에서 장선 배우의 얼굴을 봤는데 안 예쁜 데가 없는 배우라고 느꼈다. 내가 많이 배웠다. 홍이를 연기한 장선 배우를 보면서 내 딸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나는 스태프든 누구든 보기만 하면 전부 딸 같고, 제자 같고 그렇다. 황슬기 감독도 우리와 함께하는 관객과의 대화에 한번도 빠지지 않았는데 정말 잘 챙겨준다. 그런 모습에서 연기뿐만 아니라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과의 진정성을 새삼 느끼게 된다.

- <홍이>에서 맡은 역할을 통과하면서 문득 떠올려본 엄마와의 일화가 있나.

장선 사실 홍이와 엄마 관계는 우리 모녀와 굉장히 다르다. 엄마는 소녀 같아서 친구 사이처럼 자랐다. 연기하는 동안에는 홍이와 닮은 면이 있는 남동생을 떠올렸다. 남동생은 내가 유일하게 잔소리를 하는 사람인데 동생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있었다. 내가 이해 못할 선택을 내리는 게 반드시 생각이 짧아서가 아닐 수 있겠구나 하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변중희 나는 어머니를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곤 했다. 어머니가 직접 심어 만들어준 머위 쌈 때문에 머위를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90대였을 때 당신께서 한번은 얘야, 하고 부르시더니 조금 더 넓은 텃밭에 조금 더 많이 심고 가꾸는 것이 당신 꿈이라고 말씀하셔서 꼭 안아드렸다. 90대가 된 노인이 꿈을 갖고 있다는 게 그저 대견하고 기특하고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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