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반드시 무언가를 놓친다. 그렇게 생긴 공백을 내러티브에 기대어 빠르게 메꾸면서 영화 보기를 다시 이어 나간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회성의 체험이 때론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관객이 시간을 통제할 수 없는 수동성의 상태에서 감독이 만든 시간의 리듬에 온몸을 맡기는 체험은 영화관에서 최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조희영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가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심지어 이 영화는 내러티브에 온전히 기대지 않고 실험성을 지녔으며 시간은 파편화되어 있다. 벌어진 시간의 틈새에 이야기를 채우는 것은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이 영화를 아직 안 본 관객이라면 최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이 보길 바랄 뿐이다. 한번의 관람으로 인해 놓치거나 알아채지 못하는 부분에서 영화는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낳게 마련이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는 관객을 속이려 드는 영화는 아니다. 그저 보여줬을 뿐인데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조희영 감독이 설계한 덫은 아닌 것 같다. 영화가 완성되고 관객에게 공개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영화가 품은 또 다른 가능성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많은 부분을 놓쳤다. 한눈팔지 않고, 졸지도 않고 영화에 완전히 빠져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글은 영화를 다시 보며 놓친 부분을 확인하고 왜 그렇게 지각했는지 생각하며 쓴 것이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의 첫 장면부터 놓쳤다. 첫 장면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것이다. ‘카메라는 어디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일까.’ 해당 장면에서 얻었던 정보는 이곳이 한국이 아니라 외국이라는 것뿐이었다. 놓친 것은 정호(감동환)라는 피사체다. 그는 이미 걷고 있었다. 그를 지각하지 못한 사이에 그는 풍경과 하나가 되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런 식의 지각은 검은 개를 보면서 인물들이 보이는 반응과 엇비슷하다. 누군가는 개를 목격하고 같이 있던 사람은 그 사람의 말 때문에 그것이 방금 전에 그곳에 존재했음을 인식한다. 불현듯 찾아와 스치듯 사라지는 존재로서 검은 개는 정호와 유비적 관계를 맺는다. 둘 다 유령적인 속성을 지닌 셈이다. 정면으로 마주친 인주(정보람)의 경우를 제외하고선 모두 거리감이 있는 상태에서 검은 개를 목격한다. 옆에서 듣고 있는 연인이 그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관객에게도 해당한다. 인주와 정호가 처음 만난 날 봤던 커다란 달은 두 사람만이 공유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달을 보지 않았다고 해서, 영화에 달을 담은 숏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상상한 달의 이미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말과 이미지 사이를 믿음이란 조건으로 느슨하게 이어놓는다. 영화 카피 문구처럼 보이는 것과 믿는 것, 그 사이에 정호가 있다.
영화는 정호라는 인물을 독특하게 빚어낸다. 정호를 그리는 회화적인 여정처럼 느껴질 정도다. 영화의 두 번째 장면에서 정호는 집 안으로 들어온다. 현관문에 난 불투명한 유리창에 정호의 얼굴이 비친다. 스치듯 그가 지나간다. 이후 벽에 걸린 액자, 거울 순으로 정호의 모습이 맺힌다. 그렇게 카메라가 회전하며 창가에 서서 커피를 마시는 그의 뒷모습을 담아낸다. 그리고 영화의 시작을 선언하는 일종의 신호음 같은 음악이 나온다. 다음 장면에서 정호는 캔버스를 뜯는다. 카메라는 정호의 여러 면을 담아냈지만 핵심은 뒷모습이다. 뒷모습과 그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의 말들이 더해져 정호의 모습이 완성된다.
그렇게 정호를 인식한 상태에서 영화는 끝 무렵에 두 번째 정호를 보여준다. 영화가 숨기지 않는다고 말했듯이 엔딩크레딧에 동명이인의 정호가 표기되어 있다. 엔딩크레딧을 안 보고 영화관을 나선 관객에게 두명의 정호는 중첩된 상태로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채 미스터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마저도 좋은 감상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여기서 내가 놓친 것은 두 번째 정호다. 그가 영화에 등장했는가? 영화는 사진을 통해 두 번째 정호를 보여준다. 두 번째 정호는 앞모습이 중요하다. 하지만 빛에 과다 노출되어 찍힌 사진 속에서 정호의 얼굴은 허옇게 번져 지워진 상태다. 이가라시 고헤이의 <슈퍼 해피 포에버>에도 비슷한 사진이 등장하지만 거기서는 잃어버린 빨간 모자를 찾아 헤매는 과정이라면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에선 정호의 얼굴을 찾아 헤맨다. 등장인물이 아니라 우리가 말이다. 빛으로 얼굴이 지워진 사진에서 얻을 수 있는 건 후경인 실루엣이다. 단연코 첫 번째 정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을까? 얼굴을 확실히 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의구심은 해소되지 않는다. 사진을 보기 전에 우리는 정은(이진하)과 유정(정회린)의 통화를 듣는다. 정은은 유정에게 사진을 본떠 만든 그림을 발견했다고 알린다. 그 사진은 유정이 정호와 사귈 때 직접 찍은 것이었다. 정은은 정호의 실물을 알기에 회화로 재현된 얼굴을 봐도 누군지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관객인 우리의 인식의 과정은 거꾸로다. 빛으로 번진 사진 속 실루엣(후경), 회화로 재현된 얼굴(전경) 순으로 본다. 그리고 그림을 바라보는 유정의 클로즈업이 등장한다. 이후에 카메라는 갤러리 창문에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갤러리 내부를 훑으며 유리 조각들이 파편화된 인주의 작품을 줌인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전 애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정념에 사로잡힌 유정의 얼굴을 뒤로하고 갤러리 창문에 잡힌 한 무리 속에 두 번째 정호가 있다. 관객 중 일부는 나처럼 두 번째 정호를 알아보지 못한 채 위에서 언급한 외국의 풍경 속에서 놓친 첫 번째 정호처럼 그저 갤러리의 풍경을 담은 인서트 컷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정호의 실물을 본 적 없는 상태에서 사진과 회화를 접한 후 합성한 정호의 이미지를 토대로 그를 바라본 셈이다. <식물성의 유혹: 사진 들린 영화>에서 유운성 평론가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 후>에서 사진과 얼굴의 기묘한 관계에 대한 통찰을 발견한다. 여기서 그 부분을 재인용하고자 한다. “사진이란 묘한 것으로, 먼저 사람을 알고 나서 사진에서 그 사람의 모습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지만 그 반대로 사진에서 본 사람을 직접 알아보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그것을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죽음에서 삶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삶에서 죽음으로 옮겨가는 것은 자연의 순리라는 진리에 귀착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얼굴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지 따져 물을 수 있다. 지엽적인 문제 혹은 개인적인 감상에 국한된 영화적 체험에 불과할 수 있다. 파편적으로 흩어진 단서들을 조합하며 완성한 두 번째 정호의 이미지는 결국은 그의 실존 앞에서 처참히 부서진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림 속 얼굴이 정호의 얼굴은 맞는 것일까. 우리가 들은 것은 정은의 추측뿐이다. 사진을 근거로 정은이 단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믿음이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른다. 처음 보는 정호의 얼굴보다 그림을 바라보는 유정의 얼굴에서 우리는 감정의 균열을 발견하게 된다. 정호의 자살 시도에 대한 죄책감과 동시에 그가 잘 살고 있다는 안도감이 유정의 얼굴에서 교차한다. 다시 말해, 그녀의 얼굴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두명의 정호 모두 자살을 통해 죽음을 시도했고, 그것이 실패하고 삶을 다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나쓰메 소세키가 죽음에서 삶으로의 이행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문장에 사로잡힌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의 인물들이 겪는 시간의 방향이 그렇기 때문이다. 정호뿐만 아니라 인주도 죽음을 앞두고 있었던 인물이다. 인주는 자신의 걱정과 달리 수술을 받으면 다시 살 수 있다는 진단을 받는다. 죽음에서 삶으로 시간이 다시 그녀에게 주어진 것이다. 인주는 그런 상황에 당황한 상태에 놓인다. 순서가 뒤바뀐 형태. 엔트로피가 역전된 상태로 죽음을 지나서 삶을 다시 사는 인물들이 이 영화에 다수를 차지한다. 영화의 구조 역시 그런 상태로 진행된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주의 작품은 영화의 구조를 형상화한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파편화된 기억의 조각들로 두개의 타임라인을 구성한다. 여기서 두 가지의 힘이 작용한다. 하나는 정호라는 미스터리한 인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두명의 정호를 처음에는 하나의 인물처럼 그린다. 그렇게 영화는 두개의 독립된 세계를 잇는다. 인물들은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이중인화를 한 듯이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된다. 특히 유정이 카페에서 정호를 마주쳤을 때가 그렇다. 첫 번째 정호가 우리가 아는 정호의 전부였기에 해당 장면을 보면 왜 서로를 몰라보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유정이 정호의 글씨체는 알아보더라도 정호 자체를 못 알아보는 것에서 정호는 주변을 맴도는 유령처럼 비치기도 한다. 과묵한 첫 번째 정호는 우리에게 각인된 실체고, 두 번째 정호는 흔적으로 등장한다. 두명의 정호는 공집합을 만들면서 하나의 정호로 합쳐진다.
공집합을 만들게끔 밀어붙이는 것이 바로 말이다. 결과적으로 공집합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두 번째 정호는 못 알아보고, 첫 번째 정호는 사라진다. 영화는 일종의 공백을 만들어버린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는 한 인물의 얼굴을 추적하는 영화이자, 그 추적을 돕는 말의 위력을 체험하는 영화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택배기사의 실수로 박살난 인주의 작품처럼 말이다. 말은 누군가에 의해서 옮겨진다. 말이 지닌 특유의 전염성은 ‘비밀’일수록 타인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을 샘솟게 한다. 또한 옮겨지는 과정에서 자신의 견해가 첨가되면서 처음과는 다른 모양이 되기도 한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의 특이한 점은 말이 픽션을 경유한다는 것이다. 인물들이 문화예술계 종사자들로 구성한 이유도 아마 그럴 것이다. 정호에 한하자면 그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의 대화가 아니라 가공된 말, 픽션의 형태로 먼저 접한다. 무명 배우인 유정은 두번의 대사를 한다. 처음은 오디션 현장에서 한다. 주어진 역할의 대사일 것이다. 이후 유정은 애인 우석(류세일)의 동생 집에서 고양이를 돌보다가 손을 할퀸다. 손에 난 피를 보며 유정은 대사를 하는데 처음만 비슷하고 뒤에는 전혀 다른 대사를 한다. 어떤 슬픔은 감지되지만,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다. 그 맥락은 친구 정은과 카페에서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다. 영화는 결과를 먼저 보여주고 이유를 나중에 붙이는 식의 구성을 펼친다.
수진(공민정)이 정호 몰래 만나는 훈성(유의태)과 헤어지게 된 이유 역시 말을 옮겨서였다. 공공연하게 애인 있는 여자와 사귀는 중이라고 훈성은 떠벌리고 다녔다. 동시에 수진이 말했던 정호의 이야기를 훈성은 마치 자기 이야기인 양 글을 써서 연재하고 있었다. 수진이 훈성과 나눈 정호의 이야기에 ‘우리’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흥미롭다. 여기서 수진에게 ‘우리’는 공유해서는 안되는 둘만의 비밀일 텐데 훈성에겐 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불분명한 것은 훈성이 정호의 이야기를 어떻게 각색했냐는 것이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정호가 자살 시도했다는 것으로 연결이 되지만 그것은 우리의 관성이다. 그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돌이켜보면 1부와 2부로 나뉜 이 영화를 시간순으로 배열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모든 것이 맞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 속 수진의 고장난 시계처럼 무언가 어긋난 지점들이 다수 존재한다. 하지만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영화는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정호는 어디에 있는가. 그저 해외로 떠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파편화된 영화의 조각 중 영화의 첫 번째, 두 번째 숏(조각)은 시공간을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의 금붕어처럼 어딘가로 불시착한 정호. 누가 정호를 그곳으로 옮긴 것일까. 연극무대에서 유정은 개가 하늘을 날고 있다고 대사를 한다. 다른 배우들은 유정의 대사를 비웃는다. 픽션이란 무대와 무대 밖 현실 그리고 그것을 가르는 문. 밖을 한참 내다보는 유정은 무엇을 본 것일까.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을 열어젖히기 위해선 그녀의 말을 믿어야 한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는 그 문지방, 그 경계선으로 우리를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