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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의 아주 사소한 사회학] 좀 가르치면 안되나

<쥬라기 공원>(1993)

1993년 7월17일, 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던 나는 대구 아세아 극장에서 <쥬라기 공원>을 보았다. 개봉일 첫 회차였다. 오전 10시 시작이었는데, 7시부터 이미 대기줄이 극장을 몇번 감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대작이었다. 영화에서 공룡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그러니까 거대한 브라키오사우루스가 등장할 때의 순간을 아직 잊지 못한다. 그 순간 관객들은 ‘우와’ 하면서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훗날 아이가 생기면 이 감동을 전해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했다. 하지만 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이런 말이 내 귀에 들렸다. “에이, 좀 어설프네.”

12살인 둘째가 영화를 감상하는 방법은 이렇다. 일단 재미다. 재미가 있으면 좋은 영화다. 그 또래에게는 아마 절대 기준일 거다. 그 재미는 그래픽이 좌우한다. 화려하면 칭찬하고, 정교하면 찬양한다. 반대로 엉성하면 아주 짜증이 제대로다. 조금이라도 어설픈 티가 나면 어떻게 저럴 수 있냐면서 종일 그 얘기다. 내가 <빽 투 더 퓨쳐>를 보여주었을 때도 그랬다. 타임머신이 사라질 때, 마티와 브라운 박사의 다리 사이로 불길이 쫙 이어지는데 그게 너무 합성 티가 난다는 거였다. 2013년에 태어난 친구에게, 1985년 영화는 그렇게 보였다. 세상은 이미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으니 말이다. 부모로서, 자녀의 이런 영화평에 조금도 개입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의 문제일 리가 없으니 당연 하다.

하지만 세상 영화가 아이가 좋아하는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이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처럼만 만들어지지 않으니 때로는 고전적 토론도 유도한다. 무엇이 재미일까? 영화 보는 내내 한번도 웃을 일, 흥분할 일 없어도 재미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영화의 배경과 함의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감독이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을까를 질문할 수도 있다. 배우는 캐릭터를 어떻게 말하고자 하는지를 서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러다보면 아이는 다양한 영화가 있듯이 세상을 보는 시야도 다양하다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거실 어디에 매번 나뒹굴고 있는 <씨네21>이라는 잡지도 언젠가는 읽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부모 마음일 뿐이다. 대화를 한들 아이는 관심 없는 표정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와 너의 진지함이라는 게 같을 세대는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차이에 개입된 시대 정서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게 된 후 걱정이 생겼다. 아이가 평소와는 다른 감상평을 내뱉기 시작했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어투다. 영화나 드라마를 접한 다음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렇게 읊조리는 경우가 잦아졌다. “너무 가르치려고 하지 않아?”

가르치려고 한다는 표현에는 비꼼이 듬뿍 담겨 있지만, 말의 발향에 따라 전혀 다른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권력의 정점을 향해 그런 말을 할 수 된다면, 그건 민주주의다. 왜 국민을 가르치려고 하냐면서 정치인을 다그치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성숙될 것이다. 물론 우리네 일상 안에선 이리 거창하게 사용되진 않았다. 가정에선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다. 어딜 가르치려고 드냐고. 부모가 자녀를 이 이유로 혼내며 고함쳤다. 까불지 말라고. 직장에선 이렇게 부유했다. “김 대리, 대리 주제에 부장을 가르치려고 해요?”

그럼 둘째의 같은 말은 민주주의의 결과일까? 수직적 권위주의를 시민의 힘으로 무너트린 징표일까? 무례한 사람들이 이제는 꼰대 소리를 듣기도 하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과거엔 수많은 꼰대들이, 자신이 꼰대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아무도 원치 않는데 덕담이랍시고 망언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아이는 맞고 자라야 한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 여자는 좀 예뻐야 한다, 남자가 사회생활 하다 보면 술 마시고 실수 좀 할 수 있지 등등. 죄다 그릇된 계몽의 좋은 사례다. 여기에 우리는 맞서고 있다. 감히 누가 누굴 가르치려고 하냐면서.

좋은 시대 정서다. 하지만 요즘 분위기는 조금 수상하다. 꼰대를 발견해, 저 꼰대가 싫다면서 항의하는 수준이 아니다. 꼰대가 아닌 사람에게, 왜 꼰대처럼 구냐면서 조롱하는 모양새다. 이유는 단 하나, 가르치려고 했다는 거다. 아니, 인류의 역사가 배우고 가르치는 것의 무한반복의 역사인데 어떻게 그 이유로 사람이 꼰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은, 된다. 특히 본인의 생각이 조금이라도 잘못되었다는 식의 정보가 들어올 때면 가차 없다.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게 꽉 막힌 태도겠지만 지금은 그걸 비판하면 꼰대가 된다. 외모지상주의를 신뢰하며 사람을 평가하는 게 한심한 자세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순간 훈계만 일삼는 사람이 된다.

몇년 전, 사회성이 짙은 영화에 대해 비판적인 리뷰를 하는 영상을 우연히 접했는데 그는 왜 가르치려고 하냐는 말만 처음부터 끝까지 했다. 무엇은 없었다. 왜 잘못된 것을 가르치려고 하냐면서 따지는 게 아니라 그냥 영화의 진지하고 엄중한 느낌만 문제 삼았다. 물론 답답한 영화도 많다. 사회성과 작품성이 비례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럴 땐 어떻게 반응했을까? 낯간지러운 연출이라면서 아쉬움을 표했다. 좀 잘 가르치라는 탄식도 보태곤 했다. 하지만 가르치려는 것 자체에 지금처럼 정색을 하진 않았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마주한다고 해서 그냥 다 꼰대라고 여겨버리는 간편한 이해를 차마 하지 않았다. 지금은, 한다. 그러고도, 당당하다.

이런 공기가 내 아이만 쏙 피해서 세상을 돌아다니겠는가. 유튜브 쇼츠 영상에는 일타강사가 등장해 사회 탓 하지 말라면서 고함을 지른다. 이게 사람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동기부여 콘텐츠로 소개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다면서 빈정거리는 건 팩트 폭격의 칭호를 얻는다. 많은 이들이 그런 정보만 취합해 간단명료하게 인생의 진리를 규정한다. 특히 이를 비교할 다른 준거점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은 더 그렇다. 인공지능에 물어보면 되는데 힘들게 도서관을 왜 가냐는 효율성의 시대니까 말이다. 그래서 괜히 헷갈리지 말고 원래 생각대로 살아간다. 그게 가장 효율적이니까 말이다. 의견의 다름을 마주할 때마다 왜 가르치려고 하냐면서 어찌 투덜거리지 않겠는가. 나는 둘째에게 말했다. “왜? 좀 가르치면 안돼? 아빠는 하나라도 생각이 틀렸음을 알 때가 제일 짜릿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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