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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고추잠자리와 분홍 소시지의 코미디, 송경원 편집장의 영화 <어쩔수가없다> 리뷰
송경원 2025-09-25

어쩔 수가 없지, 않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를 보는 내내 당신의 뇌리를 지배할 하나의 질문. 만수(이병헌)는 왜 꼭 저 길을 택해야 했을까. 만수에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극 중 또 다른 실직 가장 범모(이성민)에게 아라(염혜란)는 일갈한다. “실직을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후의 대처가 문제”라고. 관객의 심경을 대변하는 아라의 대사를 들으며 이제 의심은 명확한 질문으로 거듭난다. 만수의 행동들은 정말 재취업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인가. 어디까지가 변명이고 어디부터가 진심인가. 애초에 진심이란 건 어떻게 알 수 있나. 우리를 증명하는 건 우리의 말인가, 생각인가, 행동인가.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늘 그랬듯 ‘어쩔 수 없다고 믿는’ 상황들이 진행될수록 질문은 도리어 두터워진다. 다만 전작 <헤어질 결심>과 차이가 있다면 질문이 안개처럼 흩어져 모든 것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질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기묘한 긴장감이 피어오른다는 데 있다. <어쩔수가없다>는 명쾌하다. 직선의 서사로 관객에게 선명하게 갈 길을 제시하다. 하지만 웬일인지 서사의 명료함과 무관하게 감정적 기묘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 어쩔 수가 없었나.

끝내 영화로 만들어져야 했던 이유

<어쩔수가없다>는 25년 동안 헌신했던 직장에서 해고당한 실직 가장의 종잡을 수 없는, 동시에 예측 가능한 행보를 따라간다. 원안이 된 미국 작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액스>(The Ax)의 뜻처럼 도끼질, 그러니까 직장에서 ‘모가지’를 당한 남자는 재취업을 위해 애쓰지만 이미 업계 전체가 시대의 변화에 맞춰 축소 중인 마당에 같은 업종의 경력직은 만만치 않다. 박찬욱 감독에 따르면 이 소설을 영화로 옮기겠다는 생각은 2009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박찬욱 감독은 “컨셉과 아이디어를 들려줄 때마다 주변 반응이 좋았”던 것이 긴 시간 이 아이템을 포기하지 않고 끝내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밝혔다. 멋대로 짐작해 주변에서 재미있다고 생각한 포인트와 감독 박찬욱이 이끌린 포인트는 결이 다르지 않았을까 싶다.

“다 이루었다”고 자부했던 남자의 삶은 단지 직장을 잃고 수입이 없어지는 것만으로 근본부터 흔들린다. 이유는 하나다. 상황이 변했지만 남자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집을 지키고, (아무도 요구한 적 없는)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지키고, 생활양식을 지키고 싶다. <어쩔수가없다>의 하이컨셉은 실직한 가장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잠정적 경쟁자를 미리 제거하는 것이다. 인물의 선택과 행동이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일지라도 사연(과 동기)에는 공감할 수 있을 법한 설정. 그것이 여느 장르영화로서 이 이야기의 평범한 작동 원리였을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의 과격한 행동은 잘못이 인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있는 것으로 전환시킬 여지를 준다. 개인의 일탈로부터 시작된 파국이 사회적인 풍자로 나아갈 통로를 확보하는 셈이다. 박찬욱 감독(의 미감)은 다르다. 그는 언제나 비틀림 그 자체에 매혹되는 쪽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라고 속삭였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처럼 그는 잘못된 걸 고발하거나 바꿔야 한다고 호소하는 쪽이 아니라 비틀린 형태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외려 외부와의 갈등으로 변형된 형태를 탐미하는 쪽의 창작자다. 이것은 긍정과 부정이라기보다는 이끌림의 문제다. 극 중 만수가 식물을 가꾸고, 특히 분재에 관심이 많은 것처럼 박찬욱 감독은 인위적인 힘이 가해진 부조화, 부조리, 불안정의 상태를 탐닉한다. 부조화스럽게 비틀린 형태에서 끝내 무언가를 발견해내는 건, 박찬욱 감독 영화 전반에 흐르는 아름다움(혹은 즐거움)에 관한 인식인 셈이다. 미추(美醜)의 보편적인 기준이 역전된 그의 영화 세계에 입각해보면 만수의 행보는 교정, 설명, 설득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에 가깝다. 그렇게 묘한 집착으로 일그러져가는 캐릭터의 강박과 이를 미묘한 시선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는 관객은 영화 내내 긴장된 줄다리기를 한다.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또 한번 그 에너지를 동력 삼아 미묘한 웃음을 증폭시킨 끝에 마침내 우리를 ‘어쩔 수가 없다’는 변명 혹은 환영 속에 빠뜨린다.

절박함의 두 얼굴

<어쩔수가없다>는 상황의 절박함으로 인물을 밀어넣는 서사의 영화가 아니다. 차라리 절박한 자신에게 도취되는 인물들을 쓴웃음으로 지켜보는, 관점의 전환을 동력 삼는 영화다. 이야기의 핵심이 될 절박함의 재구성이야말로 박찬욱 감독의 자장 아래 있다. 제지 업계에서 평생 특수지 제작을 관리해온 만수는 사라져가는 것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 이를테면 손으로 만져지는 물성의 대변자다. 그는 열심히 벌어 어린 시절 쫓겨났던 집을 되찾았고 ‘토끼 같은 두 자식’과 ‘여우 같은 마누라’와 함께 그림처럼 ‘행복한 나의 집’을 완성했다. 오프닝에서 ‘그려지는’ 만수의 집은 미디어가 이상적으로 주입한 가스라이팅과 진배없다. 그 모순 속에서 박찬욱의 게임이 시작된다.

재미있는 건 만수뿐 아니라 다른 선택지가 충분히 있었던 또 다른 실직자들이 만수의 거울이자 동조자로서 기능한다는 점이다. 반면교사가 아니라 동조다. 실직한 가장으로서 만수가 쌓아가는 사연은 그가 저지르는 행동에 대한 변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풍자를 위한 거리 두기의 장치에 가깝다. 직장을 잃자마자 만수가 하는 일은 ‘나는 가장’이라고 자기최면을 거는 일이다. ‘멈추고,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공장의 표어는 그 앞에서 무력하다. 그는 생각하길 멈추고, 현재를 붙잡기 위해 뭐라도 행동하는 남자다. 본인 역시 이것이 고집에 불과하다는 걸 희미하게 감지하지만 그때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거 대상이 된 경쟁자들을 보며 ‘이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왜곡된 위안을 얻는다.

원하는 자리를 위해 살인을 결심한 남자가 뽑은 경쟁자들은 당연히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들이고, 어쩌면 만수의 분신이자 또 다른 가능성들이다. 1순위 범모와 2순위 시조(차승원)의 처지를 목격할 때마다 만수는 그들에게 깊이 공감하고, 역설적으로 자신은 절대 저런 처지가 되지 않겠다는 목적 아래 살의를 더욱 확고히 한다. 만수가 재능 없는 살인에 매진할 때마다 관객의 머릿속엔 자연스레 수많은 대안과 다른 가능성이 떠오른다. 마치 이에 대한 반작용처럼 영화는 만수의 처지를 더욱 궁색하게 몰아붙인다. 이윽고 만수의 처지가 이른바 ‘정상’과 ‘상식’에서 멀어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 비로소 비틀린 웃음의 대상이 된다. 특히 영화 속 이들에 의해 “어쩔 수가 없다”는 합리화의 주문이 네 차례 등장하는데, 이 말은 비슷하면서도 제각각의 뉘앙스를 지닌다. 말의 한계로부터 비롯되는 미묘한 오해(혹은 신비)는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어쩔 수가 없다’는 주문이 반복되는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같은 듯 다른 상황에 놓인 인물들 사이의 대화가 되어 작품 전체에 메아리친다. 그 메아리가 흘러넘쳐 스크린 바깥까지 범람할 때, 당신은 여전히 웃을 수 있을 것인가.

고추잠자리와 분홍 소시지의 코미디, 빅 클로즈업의 (불)쾌감

<어쩔수가없다>에 수식어를 더한다면 ‘신자유주의’, 그리고 ‘블랙코미디’ 정도가 적절할 것이다. 이 영화의 웃음은 대개 능력과 소망의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캐릭터가 스스로를 비틀릴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이는 배경, 그러니까 제지업의 변화 같은 시대상은 아이러니를 위한 배양소에 불과하다. 박찬욱 영화의 방향타는 언제나 메시지가 아닌 과정, 이야기가 아닌 장면을 향했고, 이번에도 변함없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해 그릇이 된 메시지 위에 꽃피는 건 형용하기 어려운 묘사들이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와 함께 인물들이 엉겨 붙을 때의 형상은 문자 그대로 필설로 형용하기 어렵다. 언어와 스토리를 건너뛰고 직관적으로 뇌리에 박히는 것들에 굳이 이름표를 붙인다면 쾌감이 아닐까 싶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불쾌감의 쾌감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영화를 온통 뒤덮고 있다. 유난히 강조되는 빅 클로즈업의 얼굴들은 굳이 알고 싶지 않고, 맡고 싶지 않은 상대의 숨결까지 전달한다. 이야기와 정보, 대사 대신 화면이 수다스럽게 떠든다고 해도 좋겠다. 이 역전된 쾌감의 영화가 빚어낸 웃음은 여전히 직관적인가. 보편을 논할 때도 박찬욱의 감성은 여전히 그가 걸어온 궤적과 자장 안에서 고유한 주파수로 진동한다. <어쩔수가없다>는 웃기지만 (쉽사리) 웃을 수 없는 상황을 뒤집어,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끝내 웃음을 관철시키는 쪽에 가깝다. 물론 이 전복적인 웃음의 방향을 어떤 표정으로 마주할지 역시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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