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노 뒤몽의 영화는 대부분 한 마을에서 일어난 폐쇄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삼는다. 분쟁 지역을 발로 누비는 뉴스 진행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근작 <프랑스>(2021) 정도가 한정된 장소를 벗어난 점에서 두드러지는 예외에 속한다. 뒤몽의 영화는 자연의 풍광과 함께 그 일부인 인간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묘사해왔다. 한적한 어촌을 배경으로 삼은 <엠파이어>는 가장 현실적인 공간에서 낯선 감각을 뽑아낸다. 오프닝 장면에서 헐벗은 땅이 화면 가득 담긴다. 희뿌옇게 드러난 땅은 녹색을 띤 후면의 땅과 대조되며 마치 살갗이 벗겨져 내부가 드러난 것처럼 보인다. 곧이어 화면 속 누군가의 말소리가 무인의 풍경을 깨뜨린다. 목소리의 주인을 식별하기까지 약간의 혼동이 수반된다. 카메라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에 화면에 담긴 세부를 일일이 식별할 수 없는 데다 인물의 헐벗은 몸이 황량한 땅과 보호색을 띤 채 드러나기 때문이다. 인물의 몸은 마치 땅에서 떼어낸 일부분처럼 보인다. 몸을 포함해 다시 풍경을 바라보면 황량한 바닷가를 일종의 우주라고 인식하게 된다. 화면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통화를 지속하는 린(리나 쿠드리)은 우주에서 지구를 향해 끝없이 교신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거의 헐벗은 상태인 린의 맨살은 일종의 우주복이다. 그는 미지의 공간 위에 지금 막 도착한(혹은 태어난) 것 같다.
도입부에서 잠시 소리와 이미지 사이에 혼란을 겪은 관람자의 경험은 인간의 몸이 필요한 외계 존재라는 서사와 맞물린다. 맨살이 곧 의복이라는 말은 단지 비유가 아니다. 외계 존재는 인간의 몸을 때때로 입고 벗을 수 있는 의복처럼 다룬다. 0의 황제인 벨제부트(파브리스 뤼키니)는 침투할 인간을 물색하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지역을 소개하는 해설사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인간을 입기 전, 그의 몸 상태는 반짝이는 표면을 지닌 검은색의 가변적인 물질의 덩어리다. 다만 그 물질은 언어로 인간과 소통한다. 그에 대적하는 존재인 1의 여왕 역시 마찬가지로 본래 목소리-존재이며, 후에 다른 인간의 몸을 빌려 마을 사람들과 소통한다. 이들이 존재하는 공간은 숲속 어귀와 바닷속에 숨겨져 있으며, 각각 왕정 국가와 성당을 연상시키는 건축물의 형태를 띤다. 공간을 구성하는 돌은 때때로 공중에 떠올라 부유하며 무거움과 가벼움의 관성을 흔든다. 평범한 마을처럼 보이는 이 장소가 실은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우주이거나 우주와 가까운 공간임을 드러내는 것 같다.
인간의 탈을 쓰고서
외계 존재가 인간의 신체를 강탈한다는 설정은 침투하는 미지의 존재에 맞선 인간의 분투나 고통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엠파이어>는 외계인과 차별화되는 존재로서 인간을 그리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다. 경찰과 몇몇 마을 사람들을 제외하면 영화 속 중심 캐릭터들은 외계인과 인간의 중간자이거나 중간자가 될 잠재성을 지닌 인물이다. 이들을 통해 외계 세력은 이미 안정적으로 인간계에 침투해 있다. 주된 갈등의 원인은 ‘선택된 자’라고 불리는 웨인의 탄생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를 두고, 고개를 조아리며 메시아로 떠받드는 0의 행태도 우스꽝스럽지만, 악의 존재라는 1의 인식도 과장된 것처럼 느껴지긴 마찬가지다.
0과 1은 간단히 말하면 악과 선이다. 지구를 지키려는 자와 파괴하려는 자로 칭해지는 선악은 인간을 기준으로 분류된다. 0과 1이라는 숫자는 달리 말해 인간에 대한 희망의 존재 여부를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다. 0은 인간에게 희망이 없다고 여기지만, 1은 인간에게 희망을 품는다. 이러한 분류에서 관객은 당연히 선의 편에 마음이 기울어야 하지만, 그 이면에 정착과 이주를 둘러싼 혼동이 수반된다. 관객에게 먼저 소개되는 인물은 악의 편에 선, 린과 조니(브랜던 블리에)다. 바다에서 배를 몰며 등장한 조니는 고기를 낚는 성실한 어부처럼 보인다. 물론 SF의 맥락에서 린의 첫 등장과 마찬가지로 어딘가 기이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조니의 작업복은 우주 정비사의 복장과 유사하고, 그가 배를 육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탈것과 연결하는 모습은 마치 도킹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린과 조니가 일상을 기반으로 낯선 시공간을 상상하게 만드는 인물이라면, 이들과 반대편에 선 제인(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과 루디(쥘리앵 마니에르)는 외양에서부터 비현실성이 강조된다. 이들이 수련할 때 사용하는 광선검은 물론이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장발의 루디는 고전 SF 시리즈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상을 준다. 몸에 붙는 옷에 망토를 두른 제인의 옷차림은 슈퍼히어로의 착장을 닮았다. 이들은 나아가 선을 표방한다는 말로는 양해되지 않는 과도한 행위를 벌인다. 루디가 아기가 보는 앞에서 그의 친모인 루(마리 바세즈)를 참수하는 장면은 악을 막기 위한 행위라고 해도 과도하게 느껴진다. 루를 가리켜 ‘반은 악이고, 반은 악마’라는 제인의 설명도 터무니없게 들린다.
한편 외계인이라는 장르적 설정은 뒤몽의 영화 세계를 뒤적였을 때 가장 현실적인 맥락과 맞붙는다. 뒤몽은 데뷔작부터 마을의 무리와 차별화되며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소수자를 그려왔다. 그 대상은 이주민이거나 성소수자, 장애인 등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엠파이어>의 외계 존재 역시 일종의 소수자로 볼 수 있다. <예수의 삶>(1997)의 주인공 프레디와 시리즈 영화 <릴 퀸퀸>(2014)의 주인공 소년은 각각 아랍계와 아프리카계 또래에게 적대를 드러낸다. 반면 적대의 대상이 된 이들은 복수를 꿈꾸는 대신 이성과의 사랑을 꿈꾼다. 시대극을 표방한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2016, 이하 <슬랙 베이>)에 이르러서는 마을 사람들이 외지인들에 의해 대상화되거나 조롱받는 상황과 사랑과 폭력이 교차하는 복수를 그리며 절대적인 차이가 작동하는 두 층위 사이에서 기이한 균형을 찾아간다.
한편 외계 존재가 인간 내부에 침투한다는 설정은 뒤몽의 영화가 다뤄온 범죄 사건과 관련된다. <릴 퀸퀸>에서 마을에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은 인간의 신체 일부분이 소의 내장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슬랙 베이>에서는 외지인들을 대상으로 한 실종 사건에 연루된 식인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동물화된 인간을 그린다. 동물화는 범죄와 연루된 비판의 대상이기보다는 하나의 극단적 양태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0이 동물에 가까운 상태에 관한 지향을 의미한다면, 1은 이상적인 인간을 의미한다. 0과 1은 상대에게 깃든 1과 0을 각각 꺼내고 싶어 한다. 이러한 욕망은 제인과 조니의 성행위를 통해 표출된다. 말을 탄 조니가 제인을 뒤쫓는 장면에서 걷는 제인의 발과 말의 발굽을 교차하면서 마치 동물이 인간을 쫓는 듯한 인상을 준다. 조니와 제인이 성행위를 벌일 때, 카메라는 원경으로 빠지며 이들 옆에 선 백마에 시선을 두게 하는데, 말은 이힝 하고 울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보인다. 이러한 말의 반응을 통해 동물조차 멋쩍어 물러설 정도의 강렬한 동물화를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걸어도 걸어도
몸의 가치를 드러내는 다른 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훼손된 몸을 그릴 때다. 신체에 대한 훼손과 공격은 공교롭게도 선을 표방한 이들에 의해서만 이뤄진다. 루디와 자동차를 몰고 나타나 아기를 데려간 조니의 아내는 교통사고로 위장된 현장에서 목이 잘린 채 발견된다. 루디에 의해 행해진 이같은 살인은 그가 선을 표방하는 인물이라는 설정과 충돌한다. 살인을 위해 꺼내든 도구가 광선검이라는 사실 역시 황당함을 더한다. 루의 죽음은 인간의 몸을 일종의 자원으로 삼는 설정과도 어긋난다. 이러한 어긋남이 오히려 몸에 깃든 잉여적 가치를 가정하게 한다. 목이 잘린 시신은 표면적인 차원에서 브뤼노 뒤몽의 전작에서 파생된 표징이다. 한 마을에서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릴 퀸퀸>에서 실종된 부인이 토막난 시신으로 발견된다. <엠파이어>에서 참수 사건은 이에 대한 반영일 수 있다. 분리되고 훼손된 신체는 서사를 작동시키는 강렬한 이미지로만 소비되지 않는다. 분절된 신체는 무언가의 단절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사건의 주변을 둘러싼 무수한 발자국들은 이같은 단절을 보완하려는 몸짓을 표시한다.
살인사건은 필연적으로 형사 캐릭터를 필요로 하는데, 뒤몽의 영화 속 형사는 여느 영화와는 다른 독특한 역할을 한다. 형사 캐릭터는 사건 해결의 맥락에 갇히지 않은 감초나 잉여에 가깝다. 형사는 사건을 해결하는 존재이기보다는 사건을 보여주고 소개하기 위한 존재처럼 보인다. 이들의 동선이 놀거리를 찾아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아이들의 동선과 겹친다는 사실도 우연이 아니다. <엠파이어>에서 콤비로 등장한 두 형사는 전작 <릴 퀸퀸>에 이어 동일한 캐릭터를 담당하며 연속성에 기반한 자기 패러디를 보여준다. <릴 퀸퀸>에서 두 형사는 사건 주변에 출몰하며 때로는 사건 현장을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지켜보기도 한다. 뒤몽은 <휴머니티>에서 범죄로 인해 희생된 어린 여성의 신체 일부를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을 연상시키는 구도로 포갠 전적이 있다. 이는 분명 문제적이지만, 짐짓 분노하는 형사 캐릭터를 통해 죽음의 묘사가 주는 불경함을 중화하려는 자기기만과 견주었을 때 전자가 더 나쁘다고 단정하기 힘들다. 주인공의 직업이 형사인 <휴머니티>는 뒤몽의 영화 중 형사 캐릭터가 사건의 수사라는 맥락에서 정석에 가깝게 그려진 축에 속한다. 하지만 <휴머니티>의 가장 다채로운 사건은 주인공의 얼굴이다. 우울한 채도를 장착한 주인공의 얼굴에는 형사뿐만 아니라, 피해자나 주변인, 심지어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범죄자의 상까지 녹아 있다.
브뤼노 뒤몽이 언급한 것처럼 <엠파이어>는 그의 장편 데뷔작 <예수의 삶>의 프리퀄 격인 작품이다. <예수의 삶>의 또래 아랍 청년을 살해한 주인공 프레디는 <엠파이어>에서 같은 이름을 지닌 아기로 부활했다. 선과 악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아기의 천진난만한 얼굴은 그가 악마의 씨앗이라는 불길한 설정을 무화한다. 결국 <예수의 삶>에서 드러난 프레디의 범행이 그의 미래라고 해도 현재의 존재를 파괴하거나 단죄하기 힘들다는 결론에 이른다. 영화는 이미지와 개념 사이의 충돌을 유도하며 뒤섞임을 향해 나아간다. 0과 1의 전쟁은 양자가 거리를 두고 상대를 공격하는 전투가 아니라 공통의 소용돌이 속에 같은 몸짓으로 휩쓸리는 것으로 표현된다.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조니와 제인의 벌어진 입과 내지르는 비명에는 공포와 희열이 얽혀든다. 이는 몸 바깥에서 몸을 뒤섞는 궁극의 행위처럼 보인다. 0과 1, 악과 선이라는 선명한 분리는 어쩌면 뒤섞임의 쾌감을 위한 전제인지도 모른다.
* 조금 긴 추신: 제목 ‘침략과 산책’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 (2017)에서 착안한 것이다. 최초의 구상은 <산책하는 침략자>를 비롯해 외계 존재와 산책에 관한 몇편의 영화를 연결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엠파이어>를 브뤼노 뒤몽의 영화 세계 속에서 조망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침략과 산책이라는 대조적인 행위의 양태를 나란히 생각해보도록 유도한다. 침략이 목적적인 행위라면, 산책은 탈목적적인 행위다. 침략이 일탈적인 행위라면, 산책은 일상적인 행위다. 이러한 맥락에서 침략과 산책은 서로를 보완한다. 뒤몽의 마을 영화라는 독특한 이미지는 산책하는 사람들을 통해 강화된다. 이때 산책은 걷기만이 아니라 자동차나 자전거, 말과 같은 탈것을 활용한 이동 역시 포함한다. 이들의 이동에는 어슬렁거림과 한눈팔기에 의한 뒤얽힘이 포함된다. 폐쇄된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현실적인 SF영화라는 맥락에서는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행복한 라짜로>(2018)와 통한다. 라짜로가 보여준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를 잇는 긴 산책은 비현실적인 설정마저 현실적인 것으로 바꿔내는 주문이다. 산책하는 영화들은 궁극적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침략하며 사이를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