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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기록되지 않는 것을 기록하기, 문주화 평론가의 <3학년 2학기>

이란희 감독의 첫 번째 장편 <휴가>에서 재복(이봉하)은 끝이 보이지 않는 농성을 잠시 멈추고 스스로에게 휴가를 내어준다. 그의 휴가는 밀린 집안일, 딸들의 대학 등록 예치금과 패딩 점퍼를 마련하기 위한 노동으로 부지런히 채워진다. <3학년 2학기>는 중소기업 실습생으로 이른 취직을 하면서, 학생으로서의 마지막 학기를 누리지 못하는 창우(유이하)의 이야기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휴가>에는 휴가가 없으며, <3학년 2학기>는 학창 시절의 한 학기가 삭제된 영화다. 일견 감독의 영화들은 제목이 지칭하는 시간을 소유하지 못하는 허구적 인물들을 통해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표출하려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노동을 다루는 르포르타주 형식의 작품들이 간혹 저지르는 과오. 이를테면 육체노동을 그저 곤란한 것으로 격하하거나 노동자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성급하게 재단하여 이들의 불행을 지나치게 전시하려는 시도들처럼 말이다. 지아장커의 <무용>, 혹은 하룬 파로키의 <노동의 싱글 숏>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고귀한 육체들과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프레임에 결박되어 재료로 소진된 이름 없는 노동자들을 떠올려보면, 결국 프레임 안의 노동자들은 연출자의 재현 방식에 따라 존엄을 부여받기도, 박탈당하기도 한다. 이란희 감독은 한국 사회가 직면한, 동시에 손쉽게 외면해온 노동자들의 일상을 관찰해왔다. 90년대 중반 극단에서 활동할 당시,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17살 문송면군의 소식을 접하면서 청소년 노동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이란희 감독은 <휴가>에 이어 <3학년 2학기>에서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들은 이들의 삶을 그저 불행한 것으로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는가?’ 영화는 기록되지 않는 것들, 예컨대 노동하는 사람들이 차곡차곡 쌓아가는 삶의 조각들을 프레임 위로 선명하게 새겨넣으면서 차별 없이 누려야 할 일상을 나직하게 기록하고 증명한다. 이들의 삶 역시 우리와 다를 바 없이 때로는 초라하고, 또 가끔은 아슬아슬하지만 그럼에도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노라고

나 없는 나의 자서전

소음을 내는 기계를 만지는 창우의 쉴 틈 없는 손. <3학년 2학기>의 오프닝 시퀀스는 길거리에서 전단을 나눠주는 재복의 손을 비추던 <휴가>의 첫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눈앞의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수긍하며 살아내는 창우는 재복의 유년 시절 같기도, 그게 아니라면 지금쯤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재복의 둘째 딸이 어울릴 법한 친구의 모습 같기도 하다. 창우는 재복을, 재복은 창우를 비추고 지지하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이 둘을 묶는 것은 노동이라는 행위이다. 농성장의 오랜 동료와 한시적으로 만난 어린 동료, 그리고 두딸이 먹을 소시지 반찬을 살뜰하게 만들던 재복의 손짓처럼, 창우는 어린 동생이 먹고 싶어 하는 요즘 치킨, 연년생 동생의 한쪽밖에 없는 무선 이어폰뿐만 아니라 새로 계약해야 하는 넓은 집을 가능케 하기 위해 매일 아침 작업복을 입는다. 스스로 고백하기를 충분한 자격증도 없고, 내신성적이 좋지도 않은 창우가 자신을 증명하는 방법은 출석률을 높이는 것, 자신의 자리를 그저 우직하게 지켜내는 것이다. 우재(양지운)와 성민(김성국)이 직장을 떠나고, 수호(유명조)가 세상을 떠나는 동안에도 창우는 출근하는 노동의 날들을 이어 나간다. 창우는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자기소개서를 서툴게 작성하고, 계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눌러쓰면서 공장의 일과를 작업일지에 기록한다. 이 어린 청년이 써내려가는 자서전엔 정작 자신만을 위한 이야기가 부재하다. 창우는 한번뿐인 3학년 2학기를 낯설고 차가운 사회에 망설임 없이 내어주면서, 가족들의 얼굴에 그늘이 자리할 수 없게끔 하는 데 여념이 없다. 카메라는 이른 가장의 역할을 해내는 동안 종종 뿌듯함을 내비치는 창우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하면서, 19살 소년이 막 써내려가고 있는 자서전의 행간을 기록한다. 그러므로 <3학년 2학기>는 단순히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탈은폐하는 데에 그치는 정치적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버스를 타고 집과 공장을 오가며 학교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그러면서 수능 소식을 뉴스나 길 건너 현수막으로만 접하는 사회 초년생의 삶을 긍정한다. 언론과 정치인의 현수막이 창우의 삶을 응원하지 않을 때, 영화는 이들의 삶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옹호한다.

미완의 기타 선율을 완성하는 영화

영화는 잠에 빠진 창우를 몇 차례 비춘다. 우재처럼 화장실에서 쪽잠을 청하지도, 휴게실에서 낮잠을 자지도 않았던 성실한 그는 자면서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창우는 자신의 꿈을 고백한 적이 없다. 다르게 말해보자면 그 누구도 창우에게 꿈을 묻지 않으며,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짐작해보자면, 기타 치는 순간만은 그의 온전한 낙인 것 같다. 영화에서 창우는 세번 기타를 친다. 어린 동생의 일과를 확인한 후, 수호의 장례식에 다녀온 후, 그리고 새로 이사한 집으로 가족들이 모두 무사히 귀가한 것을 확인한 후, 그는 조용히 기타를 잡고 헨델의 <울게 하소서>(Lascia ch’ io pianga)를 연주한다. 기타는 그의 내면을 어루만지는 유일한 취미이자 소박한 꿈이다. 그러나 용접 기술에 능숙해지는 동안, 회사가 약속했던 가죽 앞치마와 팔토시를 새로운 실습생들에게 내어주는 동안, 어찌 된 일인지 창우의 기타 솜씨는 그 자리에 맴돌고 있는 것만 같다. 흉터가 여기저기 자리 잡은 창우의 거친 손은 이제 더이상 기타 선율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일까. 안타까운 것은, 유일한 디제틱 사운드이기도 한 세번의 관객 없는 기타 연주는 모두 미완에 그친다는 점이다. 그러나 엔딩크레딧과 함께, 영화는 완성된 기타 선율을 관객에게 들려준다. 지금은 미완에 그칠지라도, 삶과 함께 조금씩 덧대어지고 완숙해질 창우의 기타 선율을 기대해도 좋다는 듯이.

<3학년 2학기>는 <휴가>와 마찬가지로 한 토막의 시간을 그린다. 잠시 머물다가 머지않아 끝내야 하는 한정된 시간. 10일간의 휴가를 마친 재복은 다시 농성장으로 복귀해, 아침 일찍 만든 음식을 밧줄에 매달아 올리면서 늘 그랬던 것처럼 굶주린 동료의 식사를 챙긴다. 거기엔 동료가 좋아한다던 소시지 반찬도 있다. 재복과 마찬가지로, 창우는 마지막 학기를 마친 졸업식 날에도 공장으로 출근해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노동의 현장으로 회귀하는 제자리걸음을 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끝내 긍정하는 도약을 이룬 이들은 타인을 쉽사리 원망하지 않으며, 불완전한 제도에 짓이긴 채 낙담하지 않는다. 창우는 두 차례의 계약서를 작성하기 전 확신 없는 얼굴로 질문하곤 했다. ‘저를 좋게 봐줄까요?’, ‘저를 받아줄까요?’ 이란희 감독의 영화는 그들의 질문과 함께 노동이 이어지는 삶의 현장에 줄곧 있어왔다. 때때로 기록되지 않는 노동자들의 투명한 초상을 기꺼이 기록하고 살펴보는 영화. 이보다 힘찬 대답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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