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망상, 강박증, 불안증, 우울증, 분노 조절 장애, 그러니까 온갖 어둠을 끌어안고 광적으로 폭발하는 팬지(메리앤 장밥티스트)는 <내 말 좀 들어줘>가 골똘히 주목하는 한 세계다. 주변을 고통과 피로로 물들이면서도 수치심보다 자기 연민에 먼저 반응하는 이 어둠의 전파자는 마이크 리의 전작들에서 자주 접한 인물형이기도 하다. <비밀과 거짓말>에서 내내 애정결핍을 호소하던 엄마 신시아(브렌다 블레신)나 <세상의 모든 계절>에서 외로움을 어쩌지 못해 불청객이 되어버린 메리(레슬리 맨빌)와 켄(피터 와이트)처럼 마이크 리의 영화는 감정의 민낯을 보이는 방식으로 소통을 갈구하는 얼굴들의 가련한 동시에 뻔뻔한, 거부하기도 포용하기도 어려운 초상을 주시해왔다. 마이크 리가 인간사에서 길어낸, 쉽게 극복되거나 구해질 수 없는 그 끈질긴 그늘은 워낙 예리하고 강렬하게 빚어져서 그의 영화를 지탱하는 필수적인 얼룩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과도한 어둠을 그릴 때, 그 어둠에 비친 ‘과도한 밝음’ 또한 수면 위로 드러난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내 말 좀 들어줘>의 도입부, 먼지 한톨도 용납하지 않을 집 내부에서 각종 기행을 일삼는 팬지, 귀가 후에도 집 밖 오두막으로 회피하는 남편 커틀리(데이비드 웨버), 방 안에서 종일 이어폰을 끼고 사는 아들 모지스(투웨인 배럿)의 삭막한 관계가 나온 후, 동생 샨텔(미셸 오스틴)의 집이 뒤늦게 등장한다. 이 집은 팬지의 가정과 모든 면에서 대비된다. 작지만 온기 넘치게 꾸며진 이곳은 두딸의 장난과 이에 동참하는 엄마의 활기로 들썩인다. 문을 닫고 각자의 방에 고립된 팬지의 가족과 달리, 이들은 비좁은 소파에 비집고 앉아 사사로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연신 깔깔댄다. 일차적으로 이 장면의 의도는 팬지의 집이 결핍한 평범한 일상의 생기를 부각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샨텔 모녀의 놀이에 짧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는 동안, 이들의 몸짓과 음성과 표정으로 요란하게 구현된 활력은 어쩐 일인지 우리에게 전이되지 않고 세 인물에게만 통용되는 감흥처럼 전시된다. 이 장면의 쾌활함은 어딘지 과시적이다. 물론 그들이 제삼자를 앞에 두고 자신의 화목함을 연기하는 건 아니지만, 마이크 리가 팬지의 장면과 샨텔의 장면을 나란히 두고 면밀하게 지켜보는 것은 불행의 표피만이 아니라, 행복의 과시적 속성이기도 하다.
샨텔의 딸들인 케일라(에니 넬슨)와 알레샤(소피아 브라운)가 각자의 일터에서 어려움을 겪은 후, 함께 샴페인을 마시는 장면은 어떤가. 자매는 한낮 카페의 손님들이 돌아볼 정도로 큰 웃음을 터뜨리며 떠들썩한 광경을 만든다. 이들은 관계의 다정함을 한껏 연출하지만 정작 직전 장면을 채우던 직장에서의 좌절과 곤란은 서로에게 토로하지 않고 얼버무린다. 이 장면의 명랑함은 뼛속까지 명랑한 게 아니다. 이 대목이 넌지시 보여주는 것은 얼룩에 물들지 않은 행복한 표면에의 집착이다. 앞서 말했듯, 마이크 리의 세계에서 불행에 빠진 인물들의 다른 편엔 그 집착을 내면화한 인물들의 형상이 존재해왔다. 요컨대 <해피 고 럭키>에서 자신의 행복을 설파하고 다니는 포피(샐리 호킨스)의 더없이 낙천적인 기운에 기꺼이 동화하기 어렵다면, <세상의 모든 계절>에서 시종일관 징징대는 메리보다 과장된 호의의 제스처와 미소로 이타심과 호쾌함을 자랑하는 케이티(카리나 페르난데스)가 더 불편하다면 그 때문일 것이다. 마이크 리는 행복을 신뢰하는 얼굴과 행복에 도취한 얼굴 그리고 행복을 가장하는 얼굴을 명징하게 구별하지 않고 묘하게 겹쳐둔다. <내 말 좀 들어줘>에서 그 얼굴(들)은 케일라와 알레샤 자매에게서 비친다. “왜 인생을 즐기지 못해?” 묘지 앞, 샨텔이 고인이 된 엄마의 말을 빌려 팬지에게 던지는 물음은 행복의 당위를 단번에 주장하지만, 이 영화는 샨텔의 가치관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당위의 허약함, 강박, 모순 또한 은밀히 짚어낸다.
그러니 과도한 밝음과 과도한 어둠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그리 멀리 있지 않은지 모른다. <내 말 좀 들어줘>는 그 두 계열을 샨텔의 거실에 한데 모은다. 샨텔의 딸들이 역시나 친절과 선의를 부산하게 표현하며 음식을 대접하는 동안, 팬지의 남편과 아들은 역시나 말없이 먹을 뿐이며, 팬지는 지친 듯 그저 앉아 있고, 샨텔은 그런 언니를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마이크 리는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눈에 들어오는 넓지 않은 공간 안에서 과도한 밝음과 과도한 어둠을 충돌시키지 않고 부자연스럽게 공존시키는 길을 택한다. ‘어색함’을 지속해내는 방식으로 장면의 역동성을, 인간 내면의 우물과 관계의 파고를 발견하는 마이크 리의 역량은 여기서도 날카롭게 발현된다. 그는 여섯 사람의 동선과 시선을 조금씩 움직이며 그에 따라 흔들리는 공기의 흐름을 포착해 눈물과 소란, 활발함과 소심함, 애정과 원망을 오가며 장면에 변화를 도모한다. 그 끝에서 샨텔과 모지스, 다른 누구보다도 팬지는 이들이 거실에서 마주하던 시작점으로부터 심리적으로 달라진 자리에 와 있다. 팬지는 그간 억누르던 심정을 서럽게 분출하고 아들을 향해 ‘고맙다’라는 말을 꺼내기에 이른다. 문제의 해결이나 안온한 엔딩을 보장하지 않을지라도, 단 한 걸음의 차이일지라도, 영화는 그 오후의 시공간과 인물이 겪는 변화를 구체화한다. 그 세밀한 변화가 이 대목이 구축한 감동의 요체다. 그러나 이러한 파동 속에서도 속내를 알 수 없는 한 사람, 시종일관 침묵을 고수하며 끝끝내 움직이지 않는 단 한 사람이 있다. 영화 도입부, 팬지의 독설에 시달리는 과묵한 남편 커틀리를 보며 그가 후반부의 정념을 짊어질 인물이 되리라고 예감한 이는 없을 것이다.
동생 집에서 진짜 감정을 폭발한 팬지는 귀가 후, 그간 습관적이고 강박적으로 몰두하던 가사노동이 아니라, ‘다른’ 행동에 돌입한다. 우선 옷장에 걸린 커틀리의 옷을 방 밖으로 거침없이 내다버린다. 동물들이 들어올지 몰라서 내내 불안에 떨며 닫아두던 부엌 창을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레 열고는 급기야 맨발로 마당에 나간다. 평소라면 불결하다고 손도 대지 않았겠지만, 모지스가 어머니날 선물로 사다놓은 꽃다발도 겨우겨우 만져본다. 이 지점에서 팬지는 앞선 장면에서 경험한 심리적 변화에 행동의 변화로 응답하며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수세적 독설이 아닌 자립적인 액션이라는 것을 취해본다. 그가 부엌에서 아무도 모르게 행한 작은 동작의 연쇄는 <내 말 좀 들어줘>에서 가장 멀리 나간, 가장 큰 액션일 것이다. 팬지의 새로운 시도를 의미화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도 모르는 건 아니다. 팬지의 역정에 여느 날처럼 입을 닫고 침실에 우두커니 선 커틀리의 얼굴과 홀로 침대에 앉은 뒷모습을 영화는 여느 날과는 다른 무게로 응시한 후, 팬지의 결단이 이루어질 부엌으로 이동하는데, 어느새 커틀리가 부엌 입구에 서서 아내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마침내 대면한 팬지의 괄목할 만한 움직임은 커틀리의 시야 안에서 펼쳐진 것이기도 하다. 그가 이 변화의 목격자다. 커틀리의 심경을 알 길은 없어도, 적어도 여기서 주인공은 뜻밖의 행동을 무릅쓴 팬지이므로 커틀리의 속내는 부차적이라고 우리는 먼저 생각하게 된다. 창문을 열어둔 채 부엌으로 돌아온 팬지는 남편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아무 대응도 하지 않고 꽃다발을 화병에 꽂은 뒤 그를 그대로 지나쳐 다시 방으로 올라간다. 팬지처럼 우리도 이 장면에 투영된 커틀리의 마음에 별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부엌 초입에서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커틀리의 얼굴이 뒤늦게 다시 생생히 떠올라 <내 말 좀 들어줘>에서 결국 가장 잊을 수 없는 숏이 되어버리는 건, 영화가 부엌에 남겨진 그에게 시선을 두면서부터다. 팬지의 결단보다 훨씬 더 예측하기도 의미화하기도 어려운 커틀리의 행위를 대면하면서부터다.
꽃병을 내려다보던 커틀리가 꽃다발을 집어들어 마당쪽으로 걸어가 던져버린다. 그리고 창문을 닫는다. 이 몸짓이 단지 아내에게 쏟아내는 노여움으로 보이지 않는 건, 그의 얼굴에 팬 심연과 그가 견지하는 느린 호흡 때문일까. 아내가 가까스로 힘을 내 바깥으로 열어낸 문을 남편이 다시 안으로 걸어 잠근다. 무뚝뚝한 아들이 가까스로 용기를 내 엄마에게 준 꽃을, 엄마가 아들의 마음에 가까스로 화답하며 화병에 꽂아둔 꽃을, 그가 집 바깥으로 내던진다. 아내의 귀한 액션의 가능성을 남편의 리액션이 폐쇄한다. 아내가 일으킨 작은 변화를 원점으로 돌리는 남편의 과격한 행동이 정작 아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아내 모르게 일어난다는 사실이 이 장면에 고독을 더한다. 저항과 체념, 분노와 슬픔 사이 어딘가에 놓일 이 기이한 반응의 이유에 영화는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어둠이 내릴 때까지 그가 부엌에서 홀로 감내하는 시간에 한참이나 머문다. 마이크 리는 그 시간을 존중하기로 한다. 팬지의 행동으로 시작하지만 커틀리의 마음으로 끝나므로, 이 시퀀스만큼은 커틀리의 존재감이 깊이 새겨진 커틀리의 것이라고 우리의 연민은 어느새 그에게로 향한다. 어렵게 열린 문을 미련 없이 닫아버린 이 남자가 이내 치르게 될 대가를 미처 알지 못한 채로.
이어지는 일터 장면에서 커틀리는 조수와 함께 커다란 욕조를 계단 아래로 내리는 작업을 하는 중이다. 두 사람이 경사 위에서 욕조의 무게를 간신히 버티며 걸음을 떼는 모습은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이 장면이 무사히 지나갈 리 없으며, 커틀리에게 불운이 닥치리라고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를 다치게 하려고 설계된 상황임은 한눈에도 알아챌 수 있다. 마이크 리는 신기하게도 이 모진 장면을 작위적인 설정이 아니라 영화의 필연적인 선택으로 설득해낸다. 영화 도입부로 돌아가보자. 커틀리가 집을 나와 조수와 함께 차를 타고 현장으로 향하는 일상적이고 고요한 풍경을 바라보던 카메라가 집쪽으로 다시 패닝할 때, 커튼이 쳐진 집 안에는 바깥에 나가길 두려워하는 팬지와 아들이 있다. 카메라의 이러한 운동은 영화 후반에 유사하게 반복된다. 커틀리가 부축을 받아 집에 돌아온 뒤, 카메라는 조수가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쳐다보다가 집 앞으로 패닝해 멈춘다. 도입부와 같은 집은 그러나 더 이상 ‘같은’ 집이 아니다. 지금 이 집 부엌에는 의지대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커틀리와 방에서 그런 남편의 상태를 인지한 채 주저하는 팬지가 있다. 늘 방 안에서 지내던 모지스, 아버지를 도울 수 있는 아들은 여기 없다. 그 시간, 모지스는 광장의 인파 틈에 제 발로 이르러, 낯선 이의 선심을 받아들이며 수줍게 입을 연다. 이례적으로 평온하게 트인 광경 안에서 모지스에게도 주인공의 아름다운 자리가 허락된다. 그를 현실의 온갖 소음으로부터 차단하던 둔탁한 이어폰이 타인의 소박한 손짓 하나만으로 이토록 쉽게 거둬질 수 있다는 깨달음이 이 장면에 퍼진다. 영화는 아들을 병든 집으로 불러들이지 않는다.
상황은 역전된다. 집 안팎을 드나드는 데 거리낌 없던 커틀리는 가동성을 잃고 그가 꽃을 버리고 창을 닫았던 그 부엌에 붙박인다. 팬지는 여전히 침실에 있지만, 도움이 필요한 자가 아니라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는 자가 된다. 마이크 리는 모지스가 미지의 세상과 만나는 가능성의 지평은 롱숏으로 품지만, 동떨어진 공간에 자리한 부부의 초상은 클로즈업 속에 가둬 교차시키며, 피하거나 덮을 수 없는 이들의 현재성을 다른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오직 둘의 얼굴로 연결한다. 그 끝에서 커틀리는 가장 무기력한 처지로 추락해 고립된 자다. 커다란 욕조를 들고 위태롭게 계단을 하강하던 그의 이미지는 초라한 바닥으로 떨어진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민낯을 내보이는 사람의 운명을 예비한 것인지 모른다. 영화는 눈물이 흐르는 커틀리의 얼굴에서 여전히 방 안에 머무르는 팬지의 얼굴로 이행하며 끝난다.
팬지에게 커틀리의 사고 소식을 전하던 조수는 방문을 완전히 닫지 않은 채 떠났다. 1, 2층에 분리된 커틀리와 팬지의 얼굴을 하나의 숏 안으로 부를 힘은 이제 팬지의 몫으로 남겨진다. 부엌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듯, 그는 방문턱을 넘게 될까. 이 결말이 희망의 여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숨 고르기인지, 절망을 확인하는 구두점인지는 모호하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팬지가 온전히 떠안아야 하는 그 힘의 잠재성은 커틀리에게 닥친 부동성만큼이나 가혹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 말 좀 들어줘>의 결말은 각자의 벼랑 끝에 선 두 사람의 얼굴로 그 가혹함을 끌어안고 곱씹으며, 이들을 잇는 희미한 선을 더듬는다. 부부가 아직은 놓지 않았을지 모를, 마지막 남은 더없이 연약한 하나의 선을 이보다 더 절실히 심장에 새길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