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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한국영화는 현재 ‘부모 찾기’ 중이다, 오진우 평론가의 <은빛살구>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미키 17> <부모 바보>
오진우(평론가) 2025-08-27

<은빛살구>

정서(나애진)는 자신이 그리는 웹툰에서나 가능했던 일을 현실에서 감행한다. 정서는 뱀파이어처럼 애인 경현(강봉성)의 목을 사정없이 물어버린다. 입에 피가 흥건히 묻은 채로 그녀는 치욕적인 장소를 떠나 공용자전거를 타고 한강으로 향한다. 장만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 <은빛살구>는 피와 돈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로 바라본다. 정서의 여정은 혈육인 아버지를 오랜만에 찾아가는 여정이자 부모의 피를 빨아 생존하기 위한 자식의 욕망을 그린 흡혈의 여정이기도 하다. 정서가 상상했던 계획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진 빚을 대신 받아 아파트 계약금으로 지급하고 애인과 결혼하여 그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미래의 청사진을 위해서 그녀는 가족의 과거를 들춰야만 했고 겉과 다르게 품은 내밀한 욕망을 목격해야만 했다. 가족 구성원뿐만 아니라 자신의 추악한 욕망마저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서의 마지막 모습은 남다르다. 그것은 욕망을 끊어내는 의지의 표출이다. 당연히 출혈은 피할 수 없다. 그렇게 그녀는 뱀파이어 대신 인간이기를 택한다. <은빛살구>는 과거를 들춰 미래를 상상하는 와중에 잃어버린 현재를 비추는 영화다.

이렇듯 2025년 상반기에 개봉한 한국영화에서 찾은 묘한 공통점은 ‘부모’를 찾는다는 것이다. 부모를 찾는 이유는 현재의 삶이 버겁기 때문이다. 마땅히 받아야 할 보호를 받지 못했거나 궁핍한 삶에 기댈 구석으로 부모가 있고 그들의 존재감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과 같다. 영화에서 부모는 피를 나눈 사이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부모 찾기란 공통점을 겨우 발견하고서 다시 영화들을 보며 찾은 또 다른 공통점은 부모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새로운 길을 나선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상반기 전체를 일별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공통으로 추구하는 무언가가 부재한 채 각자도생을 실천하듯 달려가는 올해 개봉작들을 바라보는 와중에 부모를 찾는 몇편의 한국영화는 오히려 영화 밖 현실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 혹은 보전받기 위해 한국영화도 부모를 찾고 있었다. 한국영화의 부모란 무엇일까. 부모란 게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자식은 현재 미아일까 고아일까 아니면 애초에 부모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피 냄새가 진동하지도 않는데도, 혈연관계가 아닌데도 한국영화는 부모를 찾고 있다. 한국영화의 역사 속에서 눈부신 여러 시도가 있었고 전수되지 못하고 흘려보냈던 시절들이 존재했다. 이런 불투명한 상황에서도 위 세대의 저명한 비평가들은 한국영화의 명맥을 이으려고 ‘아버지’를 찾는 시도를 비평적 과업으로 수행했다. 하지만 역사의 풍파 속에서 한국영화의 타임라인은 중간마다 끊어졌고 그 불연속을 이으려는 비평적 시도와 무관하게 불현듯 누군가가 등장하여 한국영화의 지도를 새롭게 그려나갔다. 현재 여기저기서 ‘30년’을 기념하는 축제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지금의 한국영화를 길러낸 시스템, 즉 ‘부모’라 칭할 수 있겠다. 한국영화의 안팎, 둘을 이어내는 건 순전히 그 사이에 존재하는, 정확히는 그 안에 끼지 못한 채 장(場) 밖에서 바라보며 그려본 일개 영화평론가의 비평적 망상일 것이다.

1995년, 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영국영화협회(British Film Institute, BFI)는 ‘영화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세계 각국의 감독들에게 의뢰한다. 한국에선 장선우 감독이 이를 수락하여 <한국영화 씻김>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완성한다. 동명의 책자도 같이 출간한다. 2025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영화로 영화쓰기’라는 기획전에서 이 영화의 30주년 기념 상영을 진행했다. 영화 속 인터뷰 장면에서 김홍준 감독은 당시 동시다발적으로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는 한국영화계를 예리하게 진단한다. 상영관에서 들렸던 실소는 아마도 지금 한국영화가 처한 상황과 오버랩되면서 나오는 탄식이었을 것이다. 스크린과 관객석 사이에 30년이란 시간의 격차가 체감된 것이다. 비대해진 지금의 한국영화라는 ‘공룡’이 부화하기 직전의 불안과 흥분을 짧은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영화는 박광수 감독의 연출부 출신의 여균동 감독의 데뷔작 <세상 밖으로>에 희망을 건다. 인터뷰에서 여균동은 제도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하기에 영화가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한다. <한국영화 씻김>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을 이끈 ‘코리안 뉴웨이브’ 감독들의 시선을 일면 대변한다. 이 영화가 공개된 이듬해 코리안 뉴웨이브가 매달렸던 역사와 리얼리즘과는 결이 다른 누군가가 대를 잇는 방식이 아니라 별안간 섬광처럼 등장한다. 그는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한 홍상수다. 생존했다면 30주년을 맞이했을 영화잡지 <키노>에서 2001년에 정성일 평론가의 진행으로 임권택, 박광수, 이창동, 홍상수 감독이 모여 21세기를 맞아 좌담을 가졌다. 이때 이창은 “홍상수의 전략은 ‘과연 내가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인 것 같아요. 그 전략이 계속 성공할 수 있을까?”라고 날 선 평을 남긴다.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2025년, 홍상수는 33번째 장편영화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를 내놓았다. 위에 언급한 인터뷰 속 홍상수의 모습에서 영화 주인공인 시인 동화(하성국)가 겹쳐 보인다. 회고적이며 에세이적인 경향이 다분히 묻어나는 이번 신작에서 홍상수가 자신의 과거를 반추한 것은 우연이었을까. 영화의 마지막에서 동화의 96년식 자동차는 고장나고 멈춰 선다. 그가 머물렀던 자연의 영향이었을까. 그날 밤 그가 봤던 꽃과 달은 무엇을 이야기했을까. 자연은 그에게 시상도 주지만 몸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도 했다. 멈춘 차 안에서 ‘생각’을 고쳐먹고 담배 하나를 피우는 동화. 그렇게 영화는 얼어붙으며 끝이 난다. 이 사진적인 이미지로부터 영화는 다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차가 다시 움직이면 그는 차를 몰고 부모를 찾았을까. 주위의 온갖 비난 속에서 보란 듯이 자신의 예술을 이어 나갔을까. 셈법이 맞다면 홍상수 역시 데뷔 30주년을 맞이했다. 이번 신작은 한국영화라는 부모의 기대에 반하여 성장해온 홍상수 본인의 영화적 자화상을 그린 작업에 가깝다.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의 화두 역시 부모 찾기다. 시인 동화가 아버지를 찾는 게 아니다. 주위에서 그를 들들 볶는다. 그 장본인은 동화의 거울상인 능희(박미소)다. 그녀는 누구의 딸도 아닌 능희일까. 능희는 동화의 아버지를 동화의 든든한 뒷배로 인식한다. 속뜻은 시인 동화에 대한 전면 부정이다. 능희가 돈 많은 남자에게 흔들리지 않았던 동생 준희(강소이)의 강단을 자랑했던 것은 어쩌면 은근슬쩍 동생을 깎아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도 별수 없는 속물이라는 것을 저변에 깔고서 말이다. 그렇게 부모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는 동화와 달리 준희는 부모의 내리사랑을 받으며 모나지 않게 성장했다. 그녀는 동화를 지지하는 수호천사로서 그의 곁에 머문다. 언뜻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공존. 완전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준희는 2000년에 등장한 한국영화 시스템의 최대 수혜자인 봉준호 감독을 연상시킨다.

미키 부모의 행방과 <부모 바보>의 사례

봉준호는 <기생충> 이후 <미키 17>로 오랜만에 돌아왔다. 그의 영화는 주로 계급을 다뤘고 그렇다고 늘 체제 전복적이진 않았다. 전작인 <기생충>에서 평창동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주인만 바뀌고 아버지는 그 안에 갇혀 있다. 집은 부자 사이를 가르는 하나의 장벽이다. 부자는 서로 마주 보기보다는 망원경으로 훔쳐보며 코드화된 암호로 소통을 이어 나간다. 세상에서 증발한 아버지를 되살리는 방법은 그 집을 사는 것뿐이다. 아버지를 위해서 아들은 끊임없이 미래를 상상해야만 한다. 설령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망상에 불과할지라도.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계급 우화인 <기생충>에 비하면 <미키 17>은 낭만이 가득한 SF영화다. 미키(로버트 패틴슨)는 사채업자를 피해 얼음 행성으로 향하는 식민 행성 원정에 지원한다. 그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익스펜더블’에 지원하여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죽음이 삶이 된 사나이의 이야기인 이 영화에서 미키의 부모는 누구일까. 미키에겐 가족이 없었기에 가벼운 몸으로 지구를 쉽게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미키 2부터 부모가 존재한다. 바로 인간 프린트기다. 이 프린트기를 소유한 독재자인 우주선 사령관 케네스(마크 러펄로)도 부모라 할 수 있겠다. 이때 부모란 체제 그 자체이자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같은 것을 복제 생산하는 기계다. 그렇게 탄생한 미키(들)는 우주선 바깥으로 내밀려 공동체가 영위할 영토를 확장하는 데 자기 목숨을 계속해서 바친다. 미키는 자기를 살리고 죽였던 부모를 두번의 폭파를 통해 없애버린다. 두 폭파 사이에 미키 17의 꿈이 인상적이다. 꿈에서 죽었던 케네스의 부인인 일파(토니 콜레트)가 등장해 자신의 남편을 프린트하려고 한다. 언제든 이들의 체제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공포 혹은 내면화된 파시즘. <미키 17>은 그것에 대한 각성으로 깨어남을 중요한 몸짓으로 제시한다. 영화도 미키 17이 눈을 뜨면서 시작했다.

하지만 왜 미키 18이 아니고 17이여만 했을까. 17과 18은 자기동일성이 깨진 엄연히 다른 존재다. 18은 자신의 몸을 희생해 혁명을 완수하지만 17은 누구라도 눌러도 될 버튼을 누르고 기계장치를 폭파시킴으로써 행복한 삶을 보장받는다. 과연 그럴까. 이용철 평론가는 “<미키 17>은 동질성을 지닌 사람끼리 따로 뭉쳐 사는 게 편하다고 말하는 듯하다”고 지적했다. 미키는 이제 부모가 없기에 더이상 삶을 보장받진 못한다. 그는 다른 인간처럼 유한한 삶을 보내며 늙어갈 것이다. 그것이 봉준호가 그린 유토피아일까 아니면 또 다른 디스토피아의 시작일까.

<부모 바보>

한편 지구에선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한 장소에 모여 부대끼며 살아간다. 이종수 감독의 장편 데뷔작 <부모 바보>는 복지관에서 인물들이 충돌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딸 바보’라는 말과 달리 <부모 바보>는 부모만 바라보는 순진한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부모(세대)에 대한 애증이 한가득이다. 이 애증은 부재를 통해서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도 부모는 없다. 정확히는 있는데 없는 것에 가깝다. 영진(안은수)은 훈련소를 다녀온 후 아버지가 이사 간 사실을 알게 된다. 영진이 아버지에게 쫓겨나 다리 밑에서 노숙하는 것을 안쓰럽게 여긴 사회복지사 진현(윤혁진)은 자신의 집에서 지내라고 호의를 베푼다. 그렇게 그는 영진의 임시적인 부모가 된다. 영진은 진현의 죽은 동생이 된다. 눈여겨볼 투숏이 있다. 진현은 게임을 할 때 영진이 동생처럼 옆에 앉아 구경하는 익숙한 구조에서 안정감을 얻는다. 누군가의 빈자리를 보여주는 것으로 공허함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오면서 드러난다. 하지만 대체할 수는 없다. 관계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미스터리함만 남긴 채 다시 더 큰 구멍을 마음에 내고 사라진다. 영진이 동생의 빈자리를 차지하면서 진현은 자연스레 부모에 대해 이야기한다. 독립했지만 여전히 부모에게 배운 가치관이 그를 정신적으로 옭아맨다. 자신의 삶을 ‘평타치’라며 높게 값을 매겼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진현은 더 높은 곳을 꿈꾸며 비교라는 늪에 빠진 상태다. 부모 세대의 말은 마치 유령처럼 그의 곁을 떠돈다. 영진의 부모 역시 유령처럼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서류상으로 잡힌 아버지의 재산 때문에 영진은 사회복무요원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복지관에 다니는 순례(나호숙)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도 아들 때문에 복지관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녀는 부모를 자처하지만 자식이 거부함으로써 부모가 될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다. <부모 바보>에서 부모는 가시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식 세대를 괴롭히는 물질적 유령이다. 영진도 마지막에 유령처럼 사라진다. 그가 남긴 캠코더에 기록된 영상들은 어떤 관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개봉 지원을 받아야만 개봉이 가능한 구조 속에서 <부모 바보>가 택했던 방법은 자체 개봉. 이종수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인서트>가 비(非)개봉-상영회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파격이 아니라 나름의 생존 방법이다. 불현듯 프레임 내부로 틈입하여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는 <인서트>의 마추현(문혜인)처럼 한국영화는 자신도 모르는 새 자신의 바깥에서 영토를 넓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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