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view
<두개의 방>과 함께 초기작에 속하는 <넋>은 인간의 삶을 불교적 윤회사상에 녹여낸 작품이다. 퉁퉁거리며 장의차가 달려오고 깊게 팬 구덩이에 관을 집어넣는다. 관을 뚫고 들어온 벌레와 쥐, 뱀은 육신을 다 갉아먹고 남은 것은 노란빛의 무언가뿐이다. 그 빛은 나무뿌리 속으로 들어가 열매로 바뀐다. 이때 한 여인이 무덤 앞에서 흐느껴 울고 한 남자가 나타나 그 열매를 여인과 나눠 먹는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단순한 선으로 묘사됐지만, 묵직함이 느껴지는 이야기. 하지만 그의 다른 단편 작품들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기억 속에 거울이 있다. 거울 속에 골목이 있고 그 끝에 그녀가 서 있다’는 말로 시작해 ‘기억 속에 거울이 있다. 그리고 그 끝에 내가 있다’는 이야기로 끝나는 <연인>은 인간의 기억과 자아 정체성에 관한 작품이다. 콘크리트로 가득한 도시, 한 여자 또는 남자가 아스라한 환상에 시달린다. 또는 즐기는지도 모른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 또는 그는 거울을 바라본다. 유채 느낌의 밝은 컬러와 회색빛의 도시 풍경이 대비를 이뤄 더욱 강한 느낌을 전달한다.
3D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우산>은 자살을 앞두고 있는 한 화가의 기억 또는 환상을 다룬다.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도시. 한 남자가 창 밖으로 몸을 빼고 있다. 갑자기 푸른 초원 속의 한 소년이 보인다. 비바람이 심하던 그날, 소년은 버려진 인형을 줍는다. 시냇물 옆의 나무 밑둥에 인형을 집어넣어놓은 그는 물이 불어나 인형이 떠내려갈까봐 우산을 들고 나무를 향한다. 파스텔톤의 색채, 검은 테두리 선이 없는 그림, 어린 날의 순수와 희망 등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이성강 감독 스스로 <마리이야기>와 닮아 있다고 말하는 영화. 98년 히로시마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초청됐던 작품이기도 하다.
인디록 밴드 레이니 선의 뮤직비디오로 제작된 은 다른 작품들보다도 더 내러티브가 아닌 이미지에 치중한다. 음울하면서도 섬뜩한 느낌을 주는 이 밴드의 음악처럼 영화는 바다를 자유롭게 상상하고 헤엄쳐 간다. 정좌한 한 사람이 심해를 탐사하며 생명과 죽음, 그 오묘한 순리를 체험한다. 인디밴드들의 뮤직비디오를 여러 편 제작한 남지웅의 실사화면과 이성강의 그래픽이 어우러진다.
<덤불 속의 재>는 이성강 감독의 명실상부한 대표작. 99년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단편부문에 한국 최초로 초청된 작품이기도 하다. 그가 가장 선호한다는 회색빛의 낮은 채도가 우울하게 마음을 짓누르는 이 작품은 우연히 UFO를 목격한 한 남자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UFO를 본 뒤 자신의 몸의 절반이 찢겨져 버리는 환각에 사로잡힌다. 그의 몸은 거울처럼 산산조각나기도 하고 담뱃재처럼 바람에 날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 환상은 현실로 다가오며 그의 연인에게도 이 증상이 전염된다. 이 작품은 사회라는 시스템에 의해 분열되고 마침내 스스로도 자신을 알지 못하게 된 현대인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냉정한 듯 보이던 회색빛이 어느새 보는 이의 가슴속을 섬뜩하게 파고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문석 ssoon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