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영화 <풀>(2024)에 대한 나의 호감은 하나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 다큐멘터리스트가 대상에 대해 취하는 입장 혹은 그것에 대한 헌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왕도가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연출자 이수정(<시 읽는 시간>(2016), <재춘언니>(2020))은 다큐멘터리스트가 현실에 개입하고, 또 그것을 증언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흥미로운 성취에 도달하였다. 여기서 대상이란 인격화된 존재로서 ‘풀’(대마초)이다. 지난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통해 최초로 공개된 이래 크고 작은 수정을 거친 <풀>은 최종적으로 화자가 풀과 주고받는 대화의 형식을 띠게 되었다.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아닌 긴 자막 텍스트로 진행하는 대화는 풀에 전해지는 말이자, 서사의 주인공 격인 전직 의사 권용현을 향하고 있다. 견딜 수 없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환자에게 대마초를 줬다가 감옥에 다녀온 권용현은 이 이야기의 끝에서 한국을 떠나게 된다.
대화의 양식에 대하여
다큐멘터리영화에서 대화의 양식이 왜 특별한가? 이수정은 대마관리법이 제정된 1977년 이래 물경 50년 가까이 한국 사회에서 대마가 터부시되어온 내력, 그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반성하는 고백으로 시작하여 다양한 차원에서 풀이 가지고 있는 효용, 풀에 매혹된 이들의 초상 그리고 대안적 삶의 방식에 대한 시각으로 의제를 확장한다. 무엇보다 풀은 간자(間者)의 표상이다. 극 중 권용현의 표현을 따르자면 간자(인도, 동남아시아에서 대마를 가리키는 용어라고도 한다)란 경계에 있는 사람들, 기존의 틀에 고착되지 않은 시스템 바깥의 사람들을 말한다. 대마초가 합법화된 국가에서 그것을 처음 피우고, 재배까지 하게 된 귀농 청년 보리, 히피문화의 지류로 대마를 경험한 천문학자 이명현, 음악을 통해 대마의 인식 개선, 보급을 도모하는 힙합 가수 빌 스택스, 대마가 불경시되어온 역사를 탐구하는 대마 연구가 제이제이, 금기의 논리를 읽는 예술가 원브로까지, 간자들의 대안적 라이프스타일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제이다. <풀>은 권용현으로 대변되는 간자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과 병증, 그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조건을 숙고하는 대화를 제안한다.
위 주제와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한 것은 풀의 인격화를 위해 연출된 신들이다. <풀> 이 묘사하는 대마는 아름답다. 평범하고, 나아가 쓸모가 있다. 영화의 프롤로그를 보자. 화면이 열리면 땅바닥에 널브러진 퇴색한 풀들이 초점 잃은 이미지로 재생되고, 초록색 풀들이 흐느적거리는 짧은 몽타주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선 풀의 이미지 위에 대마초를 재배하거나, 판매하고, 피워 구속되거나 수감된 재벌가 자제, 연예인, 유학생에 대한 사건 보도가 얹힌다. 대마와 범죄를 동일시하는 이 시청각 몽타주는 비실비실 균형을 잃은 듯 흔들리던 이미지가 철창에 갇힌 풀의 모습으로 커팅하는 구간에서 명확하게 주제를 세팅한다. 시각적으로 가장 높은 밀도를 보여주는 풀들의 숏은 한국 현대사에서 대마가 통과해야 했던 역정의 태피스트리를 환유한다. 우리는 이 풀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무지했으며, 창살에 가두었다. 풀을 가둔 흐릿한 창살 위로 누군가의 한숨이 얹힌다. 권용현이다. 창살 바깥으로 절박하게 메시지를 흔드는 한 남자의 일러스트레이션을 표지 이미지로 한 ‘살고 싶다’라는 제목의 책 출간을 앞둔 권용현은 창살에 갇힌 풀과 동일시된다. 경계에 있다는 이유로 간자들을 가둔 사람들, 가둔 이데올로기, 금(禁)한 역사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풀>은 정치적이다.
정치적으로 세상을 묘사한다는 것은 세상을 새롭게 또는 대안적으로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예술의 사명과도 통한다. <풀>이 세상을 창조하는 방식은 기존의 체제와 시스템 요구하는 방향으로 조율되어 있지 않다. 풀의 생명 의지는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확장된다. 추락한 명예를 복원해야 하는 풀은 기후 위기 시대의 비상 행동을 위한 무기이다. 시스템 바깥에서 살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수록하고자 한 대화의 양식 안에는 제도와 역사, 문화의 맥락을 초월하여 21세기 전 지구적 화두가 되고 있는 생태주의가 포함된다. 따라서 <풀>은 자연의 경이로움과 생명에 깃든 위험을 인지하지 않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영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권용현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영화의 주인공은 농부들이다. 통일, 생태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대마를 재배하는 저들은 ‘815 대마 광복의 날’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대마의 매력을 역설한다. 그러나 농부들 역시 그 소출을 땅에 묻어야만 한다. 겨우내 꽝꽝 얼어붙은 땅을 뚫고 솟아오른 대마 싹들은 권용현처럼 외친다. 살려 달라.
바깥에 살고자 하는 이들을 위하여
풀은 인격이며, 자신의 삶을 통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대상과 인물, 풍경에 대한 작자의 헌신은 시스템 바깥에 머물 자유, 대안적 삶의 양식에 대한 희귀한 모델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대마의 독립적인 존재 양식을 수호하기 위해 <풀>이 주장하는 것은 대마의 비(非)범죄화(Decriminalization) 이다. 합법화와 다른 맥락으로 해석되는 비범죄화는 대마와 관련한 일체의 행위와 개인을 국가의 통제 아래 두지 않으며 범죄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거나 침해하지 않음에 기초한 이 개념은 재차 급진적인 정치적 맥락을 포함하게 된다. 다큐멘터리스트의 역할 중 하나는 존재하는 것을 찾고, 관찰하고,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 풀에 매혹된 사람들과의 인터뷰는 그들 자신의 역사, 삶의 굴곡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이들은 때로 불안하고 격앙되어 보이거나 자기성찰적인 모습을 보인다. 대화 양식을 통해 <풀>은 대상과 자아의 분리, 인간과 비(非)인간의 분리가 아닌 그들과의 평등한 관계, 지식의 교정, 연민으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감각을 주창한다. <풀> 은 주류의 헤게모니적 영화 담론에 대항하기 위해 주제와 대상을 다루는 관습적인 형식, 시각의 범위를 독점하고 단일한 시각 체계를 조장하는 스타일을 거부한다.
하나의 숏은 이어지는 숏을 불러내고 대화한다. <풀>의 에필로그는 또 하나의 몽타주이다. 이 몽타주는 전쟁과 참사를 대비한다. ‘마약, 뿌리째 뽑겠습니다!’라는 호전적인 구호가 적인 플래카드 위로 ‘자유’를 강조하며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전직 대통령 윤석열, 이 전쟁을 빌미로 하여 능멸당한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 유족들이 나란히 배열된다. 두 가지 사태를 바라보는 풀은 눈물을 흘린다. 가차 없는 작두질 소리에 누워 있던 풀이 일어난다. 권용현은 떠났고, 귀농 청년 보리는 체포되었다. 작자도 풀에 안녕을 고한다. 이수정 감독은 편지 대화를 경유하여 바깥에 살 수밖에 없고, 살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제공하며, 대마에 대한 극단적인 인식들 사이를 헤쳐나갈 길을 찾고, 그 너머로 추정되는 진실을 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