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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증, 바다를 만나다 - <바다호랑이> 배우 이지훈 인터뷰
남선우 사진 백종헌 2025-06-24

사방이 검은 세트. 수십명의 배우가 일상복 차림으로 모여 있다. 앞으로 이곳에서 한편의 영화를 작업하리라는 안내 직후 감독이 한 남자를 소개한다. “여기 우리 주인공 역할을 맡을 배우가 계시네요.” 등을 보이고 있던 이지훈이 카메라를 향해 돌아선다. 그가 <바다호랑이>의 나경수로 불리는 첫 순간이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나경수, 즉 세월호 실종자들을 수습한 민간 잠수사 고 김관홍을 모델로 한 인물에게 접속한다. 2014년 4월 이후 각인된 국민 공통의 트라우마를 가진 채로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 환상 속 미래를 오가며 타인이 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끊임없이 상상하는 것. ‘내가 그였다면… 내가 그였다면….’ 배우 이지훈은 자신을 투명하게 만든 뒤 그날의 바다를 비춤으로써 영화 <롤러코스터> 속 코믹한 단발머리 안과 의사로 자신을 회자하는 관객의 기억마저 덮었다.

- 정윤철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전달했다고.

처음으로 이야기하는 건데, 실은 감독님과 오랜 인연이 있다. 내가 초등학생, 중학생이었을 때 정윤철 감독님을 같은 동네에 사는 형으로서 알고 지냈다. 그때 감독님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었을 텐데, 나는 어려서 그분이 무얼 하는지 몰랐다. 형보다는 삼촌처럼 여겼던 것도 같다. (웃음) 그런 과거를 잊고 지내다 6, 7년 전쯤 모 영화 뒤풀이 자리에서 낯익은 얼굴과 재회한 거다. 감독님은 내가 배우가 되었다는 걸 이미 알고 계셨더라. ‘그 꼬마가 배우가 됐구나!’ 하는 인사를 시작으로 다시 연락하고 지내던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보내셨다. 실험적으로 찍어보려는 작품이 있다면서.

- 작품의 배경이나 원작에 대한 언급도 있었나.

전혀. 우리끼리 편하게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말씀과 함께 무심하게 툭 던지셨는데… 이게 보통 시나리오가 아닌 거다. 한장 한장 넘기기가 너무 힘들었다. 글자만 봐도 영상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래서 배우로서 욕심이 났다. 내가 시나리오를 보며 느낀 수많은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더라.

- 고 김관홍 잠수사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주인공 경수가 거의 모든 신에 등장한다. 주연으로서 영화 한편을 채워야 한다는 과제 앞에서는 어떤 기분이었나.

조·단역 배우라면 공감할 고충이 있다. 관객은 극의 뼈대가 되는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은데 잔가지가 계속 치고 나가면 중심이 무너지지 않겠나. 하고 싶은 표현을 다 할 수 없는 배역을 주로 맡아왔기 때문에 나만의 히스토리와 감정선을 가진 캐릭터를 맡아 연기해보고 싶은 갈망이 컸다. 그런 갈증이 있는 상황에서 <바다호랑이>라는 무겁고 어려운 작품을 만난 거다. 처음에는 내가 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감독님이 이제 관객이 바라는 내 모습보다 진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지금도 내게서 그 면모가 얼핏 보인다고 용기를 심어주셨다. 결국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 그게 무엇이었나.

정말로 나라면 어땠을까 질문하며 연기하는 것. 누구나 말로는 김관홍 잠수사의 경험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분은 그보다 큰일을 겪으셨을 것이라 그 고통을 차마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니 배우가 아닌 인간 이지훈이 잠수사라는 직업을 가진 상태로 그곳에 갔다면 얼마나 괴롭고 아팠을지를 질문하며 그분의 경험에 다가서는 방법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한 가지 방법에 기대어,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 연극무대와 같은 촬영 환경이 인물에 온전히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듯하다.

그게 참 희한했다. 극단에서 활동하며 연극을 종종 했지만 현실과 타협하면서 드라마, 영화 위주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매체 연기에 적응해버린 사람이라서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연기하는 게 굉장히 어렵기도 했다. 그런데 소품 하나 없는 까만 벽 앞에 서니 연기의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부분을 생각하게 되더라.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나 자신뿐이니 모든 시선과 행동에 확신을 가지기로 했다. 그래야 보는 사람도 설득될 테니까.

- 관객 각자가 가진 이미지로 여백을 채워야 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물 한 방울 없는 수중 신도 그 예다. 푸른 조명을 받으며 허공을 안고 헤엄치는 동작은 어떻게 준비했나.

원작자인 김탁환 작가가 김관홍 잠수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잠수사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바다에 들어가면 거센 물결과 모래 먼지로 인해 눈앞에서 한뼘 정도의 시야만 확보된다더라. 그러다 순간적으로 눈앞에 시신이 온다는 거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수중에서 울면 큰일 난다던데…. 나의 상상과 관객의 상상이 교집합을 이룰 수 있도록 잠수사들이 아이들의 시신을 수습할 때 취했던 자세를 익혔다. 한쪽 팔은 아이의 겨드랑이쪽으로 넣어 아이를 나의 가슴팍으로 밀착해 끌어안고, 다른 팔로는 아이의 뒤춤을 꼭 잡아당겨 아이가 내 품에서 빠져나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동작을 최대한 정중하게, 천천히 구현하려고 했다. 그 장면을 10시간 가까이 찍었다. 잠수복 안에 땀이 차서 중간에 지퍼를 한번 내리면 땀이 수돗물처럼 주르륵 흘렀던 기억이 있다.

- 반면 충혈된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절대 흘리지 않는 순간도 있다. 경수가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말하는 신이다.

감독님의 디렉션 중 하나였다. 고통을 얘기하는 동안 눈물이 나도 절대 흘리지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분향소에서 나래 엄마와 만나는 장면에서도 거의 같은 맥락의 디렉션을 받았다. “네가 울면 안돼. 꾸역꾸역 참아야 해. 대신 안 슬프면 안돼.” 경수가 마지막에 다시 나래 엄마를 만나 용서를 구하기까지의 감정을 생각해보고 나 또한 그전에 울어버리면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 경수는 비탄에 잠기는 것조차 죄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감히 슬퍼해도 되는 걸까 자문하면서.

나 또한 정확히 그런 지점을 표현하고 싶었다. 나래 엄마를 만나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경수 입장에서 해서는 안될 말이었을 수도 있다. 그저 죄송하다는 말로 인사를 끝내야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자신이 죽을 것 같으니까 용서해달라는 말이라도 하게 됐을 것이다. 경수가 눈물을 꾸역꾸역 참은 데에도 그런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 바다는 경수에게 참 복합적인 장소다. 터전과도 같았으나 흉터를 남겼다. 그럼에도 잠수사 후배는 말한다. “아직 바다가 있다, 형 눈에는.” 경수에게 바다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일과 삶이 있는 또 하나의 집이었을 것이다. 참사 이후 경수는 가족이 있는 진짜 집에 잘 못 돌아간다. 바다도 그렇게 돌아갈 수 없는 집이 되었다. 친한 후배가 그 마음을 알아준 것이지 않을까. 그 감정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보려고 해도 덤덤해지기가 어렵다.

- <바다호랑이> 전국 상영회를 찾은 관객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일부러 상영관 분위기를 알고 싶어서 여러 번 들어가봤다. 영화를 보기 힘들 것 같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시더라. 그러다 영화가 시작되면 모두가 조용히 울었다. 소리내서 울지 못한다. 영화가 끝나면 관객들이 제작진에게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하신다. 사실 배우로서 걱정 어린 시선도 종종 받았다. 너무 정치색이 짙은 영화를 찍은 것이 아니냐는. 하지만 나는 그 부분에 대한 우려는 하나도 없었다. 이 영화는 좌우를 떠나 한 인간이 겪은 트라우마에 공감하고, 치유해나가는 휴먼 스토리니까. 그래서 관객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때마다 배우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

- 김관홍 잠수사의 아내와 자녀들도 영화를 봤다고 하던데.

사모님이 영화 속 내 행동과 말투가 생전 남편과 닮았다고, 아이들에게 아빠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좋았다고 말씀하시더라. 그 말씀을 듣는데 보람이라는 표현을 뛰어넘는 단어가 뭐가 있을까 고민하게 될 정도로 연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뿌듯함 이상의 보람찬 감정이 느껴졌다.

- 그것이 곧 주연배우로서 <바다호랑이>라는 작품을 통과한 소감일까.

그렇다. 앞으로 이 영화를 볼 관객들도 치유를 경험하며 극장을 빠져나올 거라고 확신한다. <바다호랑이>는 단순히 먹먹한 작품이 아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우리 모두를 어루만져주는 영화다. 힘든 영화일 것 같아 보지 못하겠다는 분들에게 꼭 그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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