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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그 자연이 연약한 불순물에게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여행지에 줄곧 머물던 홍상수의 세계에서 ‘집’은 어느덧 주요한 공간적 거점으로 자리해왔다. 근작들을 돌이켜봐도, 집은 불확정적인 길만큼이나 우연과 비밀, 뜻밖의 긴장감을 품거나 일으키며 중의적 활동을 자극하는 곳이다. 떠들썩한 방문객들이 모두 떠난 후, 혼자 남겨진 나이 든 시인이 옥상에 올라 양주를 마시던 집(<우리의 하루>), 엄마와 외국인 애인이 위태롭게 숨바꼭질하듯 드나드는 남자의 집(<여행자의 필요>), 2층으로 올라간 삼촌과 교수의 성적인 교류를 암시하던 집(<수유천>). 지극히 일상적인 터전은 그곳에 불쑥 등장한 존재의 궤적과 기운으로 미지의 구조를 열고 은밀하고 낯선 정념의 활기를 허용한다. 말하자면 그곳은 울타리가 완고하지 않은 집이다. 그러한 속성은 거주자가 대개 이런저런 사연을 안고 혼자 산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의 가장 이례적인 면모는 그 집이 ‘가족’의 것이라는 점이다. 세상을 떠났으나 여전히 또렷이 환기되는 어머니, 어머니를 그리는 아들과 그의 아내, 그리고 이들의 딸들. 이 영화에서 집은 이들 삼대의 초상이자 아들이 뜨거운 효심으로 어머니를 위해 짓고 가꾼 곳으로, 어머니의 수목장을 치른, 거대한 어머니의 무덤이기도 하다. 둘째 딸 준희(강소이)가 이곳에 남자 친구 동화(하성국)를 데려온 날, 첫째 딸은 우울증에 걸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채 방 안에서 가야금만 튕기며, 시인이기도 한 엄마는 여느 날처럼 집을 나서 일터로 향한다. 도입부에서 동화는 집의 위용에 놀라 말한다. “집이 너무 크다. 집이 저런 건 줄 몰랐어. 좋은 집이구나.” 물론 홍상수는 차들이 소음을 내며 달리는 도로의 아슬아슬한 가장자리에서 준희와 동화가 화면 오른편을 향해 시선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응시할 뿐, 그들이 주시하는 집의 규격화된 형상을 보여줄 생각이 없다. 이후에도 이 집의 총체적인 외관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화면을 빠르게 지나가는, 촬영 현장에서 통제했을 리 없는 차들의 실재성은 그 한가운데 놓인 두 인물이 화면 밖,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허구의 대상에 사로잡힌 상태와 조응하며 이 장면에 기묘함을 싣는다. 신기하게도 이 순간, 둘에게만 보이는 프레임 바깥의 집은 화면 속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의 위협적인 실재성의 영향에서 벗어나 그로부터 보호된 ‘안’처럼 감지된다. 그러니까 동화의 말은 단지 집의 크기에 대한 반응이기보다는 그 ‘안’의 견고한 평온함을 향한 감탄처럼 들리기도 한다. “집이 저런 건 줄 몰랐어”라는 알쏭달쏭한 대사로 “저런” 집을 가져본 적 없다는 속내를 털어놓은 동화는 이제, 연인을 따라 도로와 그 집을 가르는 선을 넘어가볼 것이다.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는 동화와 함께 그 ‘안’을, “저런” 집의 토대를 관찰하는 동시에 정체 불분명한 방문객, 30대 중반이 되어서도 변변한 직장 없이 시만 쓰는 남자를 ‘안’의 시점으로 탐색하게 된다.

계획 없이 동화와 마주친 아빠는 딸의 연인을 기꺼이 집 내부로 초대해 집을 둘러싼 자연 곳곳을 소개한다. 언니는 동생과 남자 친구의 여정에 별 저항 없이 동행한다. 일하러 간 엄마는 집에 돌아와 사위에게만 해준다는 닭백숙을 대접하기로 한다. 동화와 이들 사이에 종종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지만, 그런 순간들의 공기는 극적으로 확대되지 않는다. 동화가 새로운 환경을 구경하는 동안, 이 가족은 대체로 동화를 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과정에서 동화에게 던져진 가족들의 질문과 그의 대답, 남자 친구의 성격과 태도에 대해 부연하는 준희의 말로 우리는 ‘하동화’라는 사람 자체보다는 그가 지향하는 인간형에 근접하게 된다. 이를테면, 그는 눈이 좋지 않지만 “약간 흐릿한 것도 괜찮”게 여긴다. 그는 콧수염을 기르는 이유에 대해 준희 아버지와 언니에게 사뭇 다른 뉘앙스로 답한다. 그는 변호사인 부유한 부친으로부터 독립해서 가끔 결혼식 동영상을 찍으며 “살 만큼만 벌며” 산다. 그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죽음이 있어서 삶이 덜 부담스럽다고 여긴다. 그는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니 그저 느끼고 감사하면 된다는 믿음을 설파한다. 무엇보다 그는 시를 쓰며, 중고 자동차를 몬다.

동화가 발화하는 생각이나 표출하는 자의식을 보건대, 그는 그간 홍상수 세계에 등장해온 남자들의 계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지금 그가 놓인 상황이다. 그는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여성에게 구애하거나 홀로 사는 여인의 집에 방문한 것이 아니라, 3년이나 사귄 여자 친구의 (적어도 겉보기에는) 더없이 안정된 뿌리인 단단한 가족제도와 덜컥 마주한 상태다. 이 영화가 단출한 전개에도 우리를 종종 불안하게 한다면 세속에, ‘일반’에 저항하는 제스처를 소심하게 반복하는 한 남자가 예의 바른 미소로 튼튼한 화목을 자랑하는 가족의 형상 안에서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 우리의 호기심을 조마조마하게 건드리기 때문이다. 닭백숙과 다양한 술로 가득 채워진 ‘가족 식탁’을 둘러싸고 드디어 모두 모인 자리, 촘촘히 붙어 앉아 한 공기를 나눌 수밖에 없어진 다섯 사람을 카메라는 눈길을 피하거나 도망갈 틈을 마련하지 않는 프레임 구도에 가두고 지켜본다.

이 대목의 초입에는 숏 하나가 불쑥 끼어든다.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자, 요리를 마치고 동화 옆자리에 앉은 준희의 엄마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누가 왔나 짖고 그래?” 그러자 가족들의 장면은 갑자기 집 밖, 철창 속 개가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짖는 장면으로 이동한 뒤, 별다른 사건 없이 다시 집 안으로 돌아온다(우리는 이 개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다. 영화 초반, 준희의 아빠는 동화에게 산속 집에서 침입자를 감시하는 개의 필요성을 잠시 언급한 적 있다). 이 숏은 다소 농담처럼 삽입되어 금세 잊힐 수도 있겠지만, 뜬금없는 강렬함과 절묘한 위치에 의해 이 집과 그 토대인 자연을 달리 체감하게 만들기도 한다. 가족 장면 사이에 삽입된 개 장면은 이 집의 단란함이란 실은 사나운 방어의 산물임을 새삼 일깨운다. 자연에 대한 사랑을 공언하는 집에서 어쩐 일인지 이 개는 자연의 일부로, 혹은 가족의 일부로 존재하는 대신, 철창에 갇혀 집을 지키는 일에 복무한다. 그 개가 가족들만의 식탁에 출현한 불청객을 감지한 것일까. 개 장면은 목청 높여 이처럼 화기애애한 가정의 폐쇄성을 환기하는 것일까. 닭백숙 만찬 장면의 희극성에는 가족 스릴러의 얼룩이 미약하게, 짓궂게 묻어난다.

둘째 딸의 남자, 이 연약한 불순물은 호의로 치장한 가족 식탁의 공고함을 버텨내지 못한다. 엄마는 동화의 분신과도 같은 중고차가 안전하지 않다고 거듭 주장한다. 그 말은 물론, 동화의 차만이 아니라 동화에게 꽂힌다. 동화가 과장된 음성으로 암송하는 자작시나 고집스레 내세우는 소박함의 가치와 감성에 가족들은 환한 얼굴로 응하지만, 쉽게 수긍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남한테 의지하지 않고 최소의 물적 조건으로 살겠다는 그의 의지는 준희의 언니가 앞선 장면에서도 시종일관 내뱉었던 “아버지가 뒤에 있잖아요”라는 말에 또다시 가로막힌다. 아버지라는 경제적, 혈연적, 정서적 토대. 동화는 이 말을 모욕적으로 받아들이고, 언니는 동화의 이상을 조롱하는 투로 사용하지만, 한때 아버지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으나 지금은 실업자로 부모 집에 얹혀사는 언니나 아버지의 절절한 사랑을 자부하는 준희도 동화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버지가 뒤에 있다’라는 말은 인물들이 얽매인 숨 막히는 덫이자 언제든 돌아갈 안전장치로 이 세계가 떨쳐낼 수 없는 끈질긴 주술처럼 영화를 내내 맴돈다. 홍상수는 이 말이 상기하는 구속력과 안정성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채로, 그것이 고고하고 단란한 인간사의 표면에 일으킨 균열을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며, 점잖은 표면이 잠재하던 경박하고도 일견 솔직한 힘의 흐름을 수면 위로 끌어낸다. 만취한 동화는 오랜 콤플렉스를 자인하듯 폭발하며 가족 장면에서 흉하게 퇴장한 후, 깜깜한 방에서 혼자 깨어난다. 닫힌 창밖에서는 여전히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어둠 속에서 계단을 내려와 두개의 문 앞에서 머뭇대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은 작은 컨테이너 내부에서 준희의 아빠와 엄마 단둘이 이어가는 술자리 장면으로 이행한다. 부부의 술자리 광경은 그러나, 그 속내가 편하지 않다. 이들은 앞선 닭백숙 장면에서 동화에게 보인 친절한 얼굴과 충돌하는 매몰찬 말들로 동화의 면모를 해부하는 중이다. 극단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뿐 삶의 치열함을 모르며, 무엇보다 시인으로서 재능이 없다는 이야기. 동화가 집 현관을 나오는 모습이 잠시 삽입된 후, 그에 대한 부부의 평가가 한층 신랄하게 계속된다. 그가 바람둥이 유형에 들어맞는다는 말은 근거 없는 악담에 가깝고, 변호사 아버지의 역량 중 무엇도 물려받지 못했다는 말에는 부부 자신의 허영과 욕망도 비친다. 그런데 이렇게도 자비 없고 편견에 찬 장면이 어쩌면 이토록 안온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딸의 연인을 잘근잘근 씹는 험담의 강도와 달리, 비좁은 공간에서 부부가 주고받는 말의 리듬과 작은 움직임들과 어떤 습관들은 오래된 관계에서만 나오는 느긋함과 친밀감으로 이 장면을 감싼다. 알코올과 담배 연기에 젖은 이 순간의 신기한 튼실함과 쉽사리 훼손되지 않을 느슨한 활기는 실제 부부인 권해효조윤희가 이들을 연기한다는 영화 밖 사실과도 연관될 것이다. 앞서, 준희의 아빠는 동화에게 이 컨테이너가 자기만의 아지트라며 남자들 공통의 로망을 넌지시 상기하지만, 이 공간이 딸의 못마땅한 연인, 동화를 허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은 집보다도 은근하고 모질게 타자를 소외시키는 가족의 동굴이다. 어두운 숲길을 걷던 동화는 컨테이너에서 새어나오는 빛과 기타 선율에 이끌리지만, 문을 열지 않고 불쌍한 몰골로 그 앞에 가만히 서 있다 자리를 뜬다. 그 빛과 선율의 평온한 기운에 자신을 겨냥한 혹독한 판단의 말들이 녹아들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을까. 영화 초입에서 준희 할머니가 묻힌 나무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절하던 동화의 호기로움은 오간 데 없다.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에서 녹음이 우거진 숲과 노을 지는 하늘은 아름답지만, ‘그 자연’이 세속을 초월한 풍경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자연은 타인이 넘보거나 공유하기 어려운 한 가족의 끈끈한 유대와 문화, 이들의 경제적 여력을 증명하는 커다란 가족 정원이며, ‘자연’스럽게 기세를 뻗으며 확장된 ‘안’이기도 하다. 숲속을 헤매던 동화가 핸드폰 조명으로 초록빛 나무에 핀 꽃을 골똘히 들여다보던 대목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자연의 순수한 생명력을 화면에 전파하고, 벤치에 누워 밤하늘로 향한 그의 얼굴에 과감하게 다가간 줌의 신묘함은 분명 촬영 현장에서 자연이 일으킨 감흥일 것이다. 다만 영화는 자연 자체보다 그 안에 자리한 사람들의 실루엣, 실은 무엇을 보고 느끼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옆모습과 뒷모습, 이들 관계의 거리와 각자가 놓인 심리적, 물리적 상태에 시선을 둔다. 그 자연은 인간사와 결속된 것이다.

요컨대, <수유천>에서 오롯이 빛나던 달의 자태는 복잡다단한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의연히 일깨우는 자연이며 인간과 분리된 장면으로 영험한 존재감을 발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결말, 어딘가에서 나타난 전임(김민희)이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지시하던 비가시적인 영역은 그에게만 열린 자연의 지속성을 신비롭게 암시한다. 그러나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에서 산행 말미, 자연이 동화에게 준 건 준희가 재차 말하던 달의 어여쁨도, 닭백숙 장면의 수치를 씻어낼 해방감도 아니라, 팔에 돋은 시뻘건 염증이다. 산길을 내려오던 동화가 프레임을 빠져나가자마자, 컴컴한 화면은 그가 넘어지며 내지른 고함으로 요동한다. 카메라는 이에 무심한 자연처럼, 혹은 이 사고를 모른 채 편히 잠들었을 준희의 가족처럼, 동화가 일으킨 소란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수유천>에서 우리가 볼 수 없던 프레임 너머의 자연이 전임에게 충만함을 안겨 그를 다시 화면 안으로 불러들인다면,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의 그곳은 동화를 밀어내 쉽게 아물지 않을 육체적 상처를 남긴다.

팔에 난 상흔이 밝은 빛 아래 선명하게 각인된 이른 아침, 동화는 ‘그 자연’으로부터, 강고한 가족성의 울타리로부터 도망친다. ‘그 자연’과 가족성을 함께 굴러가는 톱니바퀴로 바라보는 영화의 통찰력, 그 둘을 맞물려 인간과 제도를 다면적으로 꿰뚫는 영화의 시선은 유머러스한데, 판단을 배제하고 통렬함을 유지하는 그 눈의 감각은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도망친 동화는 이제 어디로 향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가 준희의 집을 서둘러 떠나는 모습에 이어 우리가 마주하는 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중고차가 도로에 선 장면이다. 한 남자의 자의식을 대변하던 낡은 차가 사각의 프레임에 막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차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자가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중얼댄다. “이제 이 차는 좀 팔아야겠다.” 가족들의 의구심에 차의 의미와 가치를 떳떳이 주장하던 동화에게 이보다 처량한 순간은 없을 것이다. 가난하지만 나름의 자부심으로 버티던 그의 기동력이 한순간 힘을 잃고 주저앉은 것만 같은 이 대목에서 카메라는 이미 좁아진 그의 지평을 더 축소하려는 것처럼, 앞좌석에 앉은 그를 향해 줌을 당겨 시간을 정지시킨다. 동화는 닭백숙 장면에서 언니의 비아냥에 맞서 화면을 휘젓던 운동성과 목소리를 잃고, 흐릿한 입자로 화면에 흩어진다.

<수유천>의 결말에서 프리즈프레임된 전임의 환한 이미지는 그의 활동성을 영원히 보존하려는 시도로 느껴지지만,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에서 고장난 차 안에 덩그러니, 뿌옇게 붙박인 동화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애인의 가족에게도, ‘뒤에 있는 아버지’에게도 갈 수 없는 도로 위에 고립되어, 유약하고 희미한 존재감으로 움츠러든 개별자의 초상. 준희의 부모가 동화에 대해 자기 것이 아닌 생각을 마치 자신에게 나온 것인 양 떠든다고 평할 때, 그 힐난에 얼마간 동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연인의 집에서 동화가 지나온 성기고 고단한 행로를 정교한 밀도와 예리한 직관으로 따라온 영화는 그 끝에서 비로소 동화의 것일 수밖에 없는, 그가 홀로 곱씹을 삶의 곤궁함과 쓸쓸함을 길어내고 만다. 그 감정의 파고에 깊이 동화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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