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머리)에서 작동해야 하는 프로세스가 점점 여기(가슴)에서 발생하고 있어.” 프로그램대로 움직여야 하는 로봇 로즈는 아기 기러기를 키우면서 발생한 오류에 혼란을 느낀다. ‘느낀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겠다. 로즈는 입력된 명령대로 결괏값을 도출해내는 로봇일 뿐이니까. 섬에 불시착한 도우미 로봇(루피타 뇽오)은 실수로 둥지를 덮쳐 어미 기러기를 죽였다. 이후 불행한 사고에서 우연히 살아남은 아기 기러기를 ‘획득’한 로봇은 기러기를 키우기로 결심한다. 다시, 결심이란 단어도 부적절하다. 무엇이든 임무가 필요했던 로봇은 기러기를 책임지고 키워 무리로 돌려보내는 것을 임무로 설정했을 뿐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억지스럽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기적과 비약은 이 순간에 발생한다. 영화는 로즈가 왜 엄마가 되어야 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대신 어떻게 엄마가 되는지 과정을 성실히 따라간다. 마음을 움직이는 건 정답을 향해 닦인 매끈한 길이 아니다. 오히려 미처 해결하지 못한 구멍, 미지와 불투명이야말로 이 식상한 동화에 생기를 부여하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걱정 많은 수다의 알고리즘
결론부터 고백하자면 화려한 영상과 모범적인 구성에도 불구하고 <와일드 로봇>은 전반적으로 지루했다. 좋은 이야기지만 답을 정해놓고 풀어내는 문제집처럼 정확한 교훈의 모범적인 과정이란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거시적으로는 감정을 가진 로봇이 어린 동물을 키우는 이야기, 미시적으로는 감정이 생성되고 관계가 맺어지는 과정을 함께하도록 디자인된 이성적인 동화. 혹은 감정이 없는 로봇이 ‘느끼고’, ‘결정한다’고 표현하는 게 어색해지지 않도록 감정의 실체를 그려내고자 노력하는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좋겠다. 하지만 그 노력은 전반적으로 실패한다. 너무 수다스럽기 때문이다.
아기 기러기에게 브라이트빌(키트 코너)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섬의 모든 동물에게 따돌림당하는 여우를 핑크라 부를 때 비로소 두 개체 사이의 ‘관계’가 태어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의 적확한 사례. 혹은 “나는 네게 특별한 여우가 되기 위해 네 시간과 관심이 필요해”라며 어린 왕자에게 길들여지길 자청한 여우처럼 시간과 노력을 통해 형성되는 유대감을 전하는 유형의 전개. 언제나 유효할 좋은 이야기지만 달리 보면 결과는 물론 과정까지 예측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빤한 주제이기도 하다.
드림웍스의 30주년 기념작인 이 작품의 구성은 마치 정해진 프로그램처럼 깔끔하다. 장점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설명과 예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본의 아니게) 픽사의 <월·E>(2008)의 대척점에 서버린 이 작품은 비교를 피하기 어렵다. <월·E>가 무성영화의 형식을 빌려 무형의 감정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반면 <와일드 로봇>은 감정의 효능과 의미를 ‘설명’한다. 좋은 이야기를 손실 없이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와일드 로봇>이 목표하는 감동과 메시지는 관객의 마음속에 피어나길 기다리지 못하고 정확하게 제시해버린다. 그게 패착이다. 이 영화의 작동 원리는 여전히 논리와 이성, 그러니까 명확한 알고리즘으로 작동하는 로봇의 세계를 닮았다.
<와일드 로봇>이 남기고자 하는 교훈‘들’은 지나치게 논리적이다. 삶의 의미, 자아의 탐색, 관계의 소중함 등 꽤 많은 명제들이 로즈의 자문자답으로 설명되는데, 정확한 친절함은 오히려 탐색 의욕을 떨어트리는 부작용을 낳는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브라이트빌이 마침내 전달하는 진심, “그 일은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날 위해 해준 모든 일에 감사해요. 사랑해요, 엄마” 같은 대사는 마치 숙제처럼 해야 할 일을 뒤늦게 처리한 기분이 들 정도다. 묵직한 한방이긴 하지만 너무 정확하게 도착한 탓에 이미 단단히 준비하고 있는 마음에 별다른 균열을 내지 못한다. 그렇게 시큰둥하게 지나갈 줄 알았던 작품이건만 설명할 수 없는 몇몇 장면이 끝내 발목을 붙잡고 되돌아보게 만든다.
직유의 서사가 빚어낸 오류의 기적
브라이트빌을 키우기로 결정했던 로즈처럼, 이유 없이 마음을 흔든 건 후반부 로봇 회사의 비행선에 납치되던 로즈가 브라이트빌을 가슴에 품고 뛰어내리는 순간이었다. 동력원처럼 보이는 부품을 떼어내고 브라이트빌을 가슴의 빈 공간에 품은 로즈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한다. 필요한 건 지금 여기 다 있다고. 영화는 아무것도 없음을 목격시킨 뒤 아랑곳하지 않고 그 존재감을 자랑한다. 마치 거기에 보이진 않지만 그 어떤 프로세스(혹은 운명)보다 강력한 의지와 에너지가 존재하는 것처럼. 되짚어보면 로즈가 처음 자신의 가슴 부위를 가리키며 ‘여기서 프로세스가 작동 중’이라고 했을 때 그저 은유의 영역으로 이해했다. 기러기 무리의 리더 롱넥(빌 나이)이 “날개의 약점은 강한 심장으로 극복하면 돼”라고 했을 때 로즈는 물리적인 심장의 크기가 몇 밀리미터밖에 되지 않는다고 답한다. 만담 같은 대화 끝에 롱넥은 웃으며 자신의 표현을 ‘내면의 심장’이라고 정정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심장은 마음의 은유로 다가온다.
그러나 후반부 로즈가 브라이트빌을 가슴에 품고 비행선에서 낙하할 때, 비로소 비논리의 영역에 있는 ‘감정’은 보이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실체를 띤다. 직유의 서사가 빚어낸 오류의 기적이라고 해도 좋겠다. 때론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감각하기 위해 오히려 불투명함이 필요하다. <월·E>가 풍성한 감정으로 넘쳐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월·E’의 표정이 단순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쁘다와 슬프다 사이의 수많은 감정을 그저 짐작의 영역으로 남겨둔 채 보는 이의 해석을 기다리는 것. 어느 정도로 기쁘고 슬픈지 수치화할 수 없는 모호함의 영역이야말로 그 어떤 설명보다 구체적인 이입을 가능하게 하는 교감의 통로다. 비유하자면 감히 너를 완벽히 이해한다고 입 밖으로 꺼내지 말 것.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품어줄 것.
<와일드 로봇>은 로봇과 동물, 죽음과 생명, 주어진 본능과 선택한 감정의 평행 세계 사이에 소통과 교감의 다리를 놓고자 애쓰지만 대체로 실패한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는 50cm도 안되지만 이성과 감정 사이의 거리는 다른 우주만큼이나 멀다. <와일드 로봇>은 그 아득한 평행우주를 건너뛰는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 좋은 이야기가 곧 좋은 작품이 되는 건 아니다. 좋은 이야기와 좋은 영화 사이의 거리 역시 다른 차원이라 해도 좋을 만큼 멀고 험난하다. 좋은 이야기는 설명될 수 있지만 좋은 영화는 오직 목격됨으로써 성립한다. <와일드 로봇>의 화자가 정확한 좌표를 찍으려 할수록 거꾸로 딱딱해지던 감정은 어물쩍 넘어가려던 오류에서 도리어 생기를 되찾는다. <와일드 로봇>의 어떤 지점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나. 그 소통의 계기와 출발점은 관객마다 다를지 몰라도 종착지는 대체로 동일하다. 스크린과 관객 사이. 보여지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 언제나 그렇듯 진실은 막간에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