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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충돌,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이룬 현대영화의 이상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우리 시야에 드물게 잡혔던 현대영화의 이상을 이뤄냈다. 신화적 스토리텔링의 기대 지평과는 담쌓고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찬 아이러니 모드의 화술로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경이적으로 접합해 비극의 다면도를 보여주는 재능이다. 감독 조너선 글레이저는 아우슈비츠수용소 옆 관사에 살았던 독일군 장교 가족의 일상 루틴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가운데 고소한 빵 맛을 음미하며 세계의 비극을 잊는다는 우리 시대의 무도함을 상기시킨다. 이 영화에 본다는 것의 기쁨은 없다. 첫 장면을 블랙아웃으로 길게 처리한 것은 그런 기쁨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감독의 도발적인 선언이며 동시에 깔리는 불길한 음악은 공포영화에 맞먹는 전율의 화면들이 이어질 것을 암시하는데 회스 소령 가족의 단란한 강가 피크닉으로 이어지는 후속 장면에서도 그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본다는 것의 기쁨 대신에 영화 내내 관객의 시각과 청각 신경을 자극하는 이 긴장의 밀도는 한치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파국은 이미 도달해 있다

주인공 로돌프 회스 소령(크리스티안 프리델) 가족의 일상 루틴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장면들은 전방위로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만들어진(making) 것이 아니라 포착한(taking)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연출했다기보다 우연히 기록된 듯 교묘하게 외관을 꾸미는 이 접근방식은 풍부한 사운드 연출과 조정을 통해 억제된 활기를 내뿜는다. 화면은 억제됐으나 소리는 둑에서 봇물 터지듯 새어나오는 이 대위법적 활기는 가공할 정도인데 극적이지 않은 내러티브에 조금씩 소용돌이를 일으켜 그 내부에서 충돌하는 에너지만으로 후반부에는 거대한 윤리적 동요의 파도를 만들어낸다. 회스 소령의 생일을 맞아 가족들이 정원에서 카누를 선물하는 초반 장면 이후 우리는 이 가족의 단란한 기쁨이 누군가의 노동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단서를 지속적으로 전해받는다. 징발당한 유대인 죄수들이 집 바깥에서 일하는 동안 집 안에서는 유대인 하녀들이 부지런히 집 안 살림을 한다. 옆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는 비명 소리가 들리는데 그들 회스 가족에게는 그 아우성이 들리지 않는 듯 무심하다. 회스 소령이 집 바깥에서 흡연하고 있으면 화면은 이어 유대인들의 시체를 태우는 것으로 추정되는 소각장의 굴뚝을 잡는다. 장교 부인들은 유대인 죄수들에게 징발한 물품을 가져와 서로 나누며, 회스의 아내 헤트비히(잔드라 휠러)는 그중 값비싼 밍크코트를 입어보고 고이 옷장에 넣어둔다. 이 극적이지 않은 일상의 루틴에 얼룩을 내는 것은 검은 개다. 개는 화면 속에서 지옥의 파수견처럼 쉬지 않고 돌아다닌다.

보는 것의 쾌락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은 영화에 두 차례 나오는 폴란드 소녀의 선행을 묘사할 때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회스 소령이 몽유병 걸린 딸을 안고 침실로 들어가 동화책을 읽어줄 때 평행처리되는 소녀의 선행은 유대인 작업장 곳곳에 몰래 먹을 것을 숨겨두는 것인데, 이 영웅적인 저항 행위가 주는 다감함과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따르는 극적 서스펜스를 무시하기 위해 화면은 열화된 듯한 흑백으로 처리된다. 심지어 처음에는 그게 무슨 장면인지, 누가 나오는 것인지, 소녀가 뭘 하는지조차 식별하기 힘들다. 이로써 화면 속의 가장된 평화와 안온함의 기저에는 불안과 공포가 자리 잡고, 어른과 아이, 주인과 하인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그것들을 의식적으로 무시하거나 받아들이고 있으며, 추후 이걸 통제하는 독일 군부 상층부를 보여줄 때 장교들 사이의 상호 적대감은 증오와 공포감의 족보를 실감하게 한다.

우리를 서서히 옥죄어오는 이 영화의 묘사 패턴은 위장된 일상의 평화와 그 기저에 있는 불안과 공포를 전시하는 것이다. 회스의 아내 헤트비히는 잠자리에 들기 전 회스에게 이탈리아 온천에 갔던 추억을 얘기하고 소한테 아코디언을 불어주던 남자를 회상하며 프랑스제 향수 냄새를 소재로 시답잖게 낄낄거리는데 그 뒤로 수용소의 아우성이 들리면서 소각장 연기가 컷된다. 부르주아 가정의 일상 루틴은 참혹함을 감추고 그들의 안락한 삶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무자비한 형태로 곳곳에 전시된다. 그들은 살육의 집행자로서 그들이 처한 현실을 취사선택해 누리려 하지만 그들 역시 수용소의 유대인 죄수들처럼 누군가의 처분에 운명이 맡겨진 체스판의 말일 뿐이다. 회스 소령이 집 안 집무실에서 지폐를 셀 때 그의 동료가 회스의 전출을 재고해줄 것을 탄원하는 편지의 내레이션이 깔리는 장면은 그가 이곳 아우슈비츠에서 권력 위계의 최정점에 있지만 동시에 국가권력 위계에선 누군가의 하수인일 뿐임을 근엄하게 드러낸다. 카누를 타고 애들과 함께 강에서 물놀이하는 회스 소령을 보여준 장면에선 정원을 손질하던 아내 헤트비히가 풀을 뽑으며 “이놈의 잡초들”이라고 불평하는 화면이 병렬되며 회스가 낚시를 하다 유대인 시체 뼛조각을 건져올리고 기겁을 한 채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돌아와 오염물을 씻어내는 상황이 이어진다. 잡초와 뼈라는 잔혹한 비유의 시각적 등가물은 하녀가 시체로 오염된 아이들의 몸을 욕조에서 박박 닦고 회스가 세면대에서 자기 몸의 재를 꼼꼼히 씻어낼 때 아무리 무시하고 외면하려 해도 그들에게서 떼어내기 힘든 죄의 때를 실감하게 한다. 아이들이 목욕을 마친 뒤 하녀는 텅 빈 욕조를 바라본다. 이 단독숏이 꼭 필요했을까. 목소리가 주어지지 않은 이 유대인들에게 단독숏을 주는 것은 사건화될 수 없는 것들의 잉여로 내러티브를 채워가는 이 영화의 개성을 드러내는 수많은 예 가운데 하나다.

인물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윤리 감각의 마비를 드러내는 지표의 목록들은 차곡차곡 채워진다. 헤트비히가 어머니에게 정원을 구경시켜줄 때 이들은 유대인에 관한 험담을 하며 정원에 핀 꽃들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저게 수용소 벽이니?” “가리려고 포도를 잔뜩 심어뒀어요.” “(저 수용소에) 에스터 질베르만도 있을지 모르겠네…. 엄마 집에서 일했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 부른다고 자랑스러워하는 헤트비히의 눈에 정원에 차려진 식탁의 음식을 넘보는 개가 들어온다. 게걸스레 흥분한 개의 움직임은 절도 있는 우아함을 가장한 회스의 아내와 어머니의 부르주아 놀이의 거울이며 정원에 핀 꽃들의 클로즈업으로 이어지는 화면은 외화면의 아기 울음소리의 맹렬한 진동과 더불어 붉은색으로 바뀐다.

헤트비히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그동안 꿈꿔왔던 삶, 모범적인 삶, 히틀러가 말한 대로 동쪽으로 가서 보금자리를 찾은 삶은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지속적으로 유대인들의 노동과 목숨을 착취하고 그들을 하인으로 부리며 그들의 재화를 강탈한 끝에 얻어진 유사 유한계급의 안락한 삶인데, ‘유사’라고 한 것은 그들의 계급적 토대는 사상누각이며 상관의 전출 명령으로 하루아침에 소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투고 아내 헤트비히는 집을 떠날 생각이 없으니 자신과 아이들은 계속 이곳에 남아 생활하겠다고 선언한다. 헤트비히는 “내가 곁에 있다고 생각해줘. 나도 그럴 테니까”라고 억지로 사랑의 정신적 결합을 다짐하고, 그들은 미묘한 자세로 함께 손을 잡고 걷는다.

그날 저녁 식탁에서 회스는 가족들에게 곧 전출을 가게 됐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이른다. 모두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러 식탁에서 일어설 때 역시 검은 개는 방문 중앙에서 카메라를 응시한다. 이날 밤의 화면들은 낮의 평화와 안락이 기만적인 것이었음을 낱낱이 밝히는 순간들이며 이 가장된 평화의 이면에 있는 지옥의 실상을 까발리는 핵심적인 것들은 소리의 파장들이다. 낮에는 일상적인 소음처럼 들렸던 것이 밤에는 유황불의 지옥을 떠올리게 하는 공포의 촉진제로 다가온다.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은 장모로 보인다. 처음 도착해서 자신의 삶의 구원의 장소로 여겨지던 곳이 사위의 전출 소식으로 어수선해진 즈음 회스의 장모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소각장의 붉은 연기를 보며 괴로워한다. 이어 두 번째로 되풀이되는 폴란드 소녀 에피소드는 회스 소령이 딸에게 헨젤과 그레텔 동화를 침대에서 읽어주는 장면과 병렬된다. 소녀의 영웅적인 행위가 전해줄 정감과 파토스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열화상 화면의 흑백 처리는 앞 장면과 동일한데 그가 귀가해 그의 어머니가 맞이하는 걸 보여줌으로써 그가 수용소 근처에 사는 폴란드 사람이라는 게 비로소 희미하게 감지된다. (소녀의 어머니가 폴란드어로 말한다.) 이어지는 장면은 더욱 금욕적이다. 화면에 악보가 슬쩍 보이고 소녀가 피아노를 치는 동안 플레어 효과로 화면을 눈부시게 하는 것은 슬픔과 희망이 교차하는 그 음악의 정취가 단단하게 파토스로 치받는 순간을 원천 차단하고 있으며 회스가 들려주는 <헨젤과 그레텔> 동화의 섬뜩한 대목, 마녀가 난로에 처박혀 구워지는 대목의 처절함과 다시 충돌한다.

그가 고개를 들어 우리를 볼 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사건이라고 부를 수 없는 단속적인 일상을 기록하며 일종의 구조적 원칙을 지킨다. 화가가 붓으로 어떤 인물과 상황을 그려냈을 때의 단속적이지만 축적된 인상의 단위들이 화면들의 나열에 기입되어 있으며 거기 축적된 것은 흐르는 삶의 감각이다. 그것은 화면 바깥에서 끊임없이 침입하는 사운드, 비극의 현장에 입회하지 못했으나 바로 그 비극의 현장에서 외면할 수 없게 흘러나와 화면 속으로 엄습하는 사운드와의 충돌을 통해 외연과 내포의 경계를 해체하고 폭발하게 만든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회스는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고, 고위 장교들 파티에서도 군집한 사람들을 가스로 죽이려면 무슨 수를 써야 할까를 고민한다. 직업적 사명에 투철한 이 ‘전문가’는 자신의 의식과 달리 자기 육체가 반응하는 구토 행위에 당황한다. 그는 화면을 바라보는데 이는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자 현재로 통하는 입구를 보는 것이기도 한다. 주인공은 일상과 비극의 경계 사이에서 애초 모르는 척 외면했지만 관객인 우리의 입장은 난처하다. 이 영화는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화면 밖과 안, 과거와 현재를 부딪치게 해 우리 자신의 윤리적 생존 여부에 관한 시험을 거듭 요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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