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이랜드>는 하이더르(알리 준조)가 유령 역할을 맡아 흰 천을 뒤집어쓴 채 조카들과 유령놀이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소 범박하지만 흰 천에서 영화관의 스크린을 떠올려볼 수 있다면, (극)영화 또한 배우들에게 개별 역할을 부여하여 작동되는 일종의 역할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이랜드> 속 인물들은 그 어떤 극의 배우들보다도 더 엄격한 사회적, 가족적, 관습적 역할극에 복무해야 하는 처지다. 문제는 그 역할극이 지극히 경직된 채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화면비가 강조하듯 그들은 억압과 속박, 구속과 굴레로 유지되는 역할극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파키스탄 아만(살만 파르자다) 집안의 차남 하이더르는 어느 날 백업 댄서 일자리를 얻는다. 미용사라는 자신의 직업에 열정과 자부심을 지닌 하이더르의 아내 뭄타즈(라스티 파루프)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취업 선언과 함께 강제로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때 뭄타즈의 움츠러든 뒷모습을 중심에 둔 카메라의 구도가 은유하듯 그가 일을 그만두게 되는 일련의 과정에는 이해나 설득, 배려나 존중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일을 한다는 보편적 가족 역할극의 규범만이 엄존할 뿐이다. 그렇게 가족들의 압박에 의해 일을 그만둔 후 뭄타즈는 계획에 없던 임신까지 하게 되는데, 뭄타즈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여성의 임신과 출산 또한 국가와 종교, 사회와 가정의 구성 요소로서 관습적이고 도식적으로 다뤄질 뿐이다. 예컨대 넷째마저 딸을 낳게 된 누치(사르와트 길라니)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패배자의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으며, 세간에 따르면 '알라의 은총'으로 남아를 갖게 된 뭄타즈는 얼핏 상대적 승자처럼 보이지만, 결국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을 건강히 낳아야 하는 일종의 도구로 전락하게 될 뿐인 것이다.
체념 위로 쌓아올린 도식적 관계
뭄타즈의 신체에 태아라는 변화가 생겨나 그를 혼란스럽게 한다면, 트랜스 여성 뮤지션 비바(알리나 칸)는 자신의 타고난 신체의 변화를 통해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자다. <조이랜드>가 사회 및 가정 내 성역할극의 병폐를 폭로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개성 넘치는 성소수자 캐릭터의 등장은 다소 손쉽거나 범상한 선택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자신의 욕구와 감정에 충실한, 그래서 기이하고 불온한 ‘별종’으로 취급되는 그가 경직된 사회상을 노정하는 영화 내에서 가장 생동감 넘치는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어느 밤, 비바의 거대한 등신대를 끌어안고 귀가하는 하이더르의 퇴근길을 담은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가장 활기 넘치는 장면으로 다가온다. 그 등신대는 하이더르 집안 사람들과 이웃들을 놀라게 만든다. 급하게 흰 천으로 등신대를 가려보려 하지만 그것이 남긴 잔상은, 비바의 존재가 파키스탄 사회에 불러일으키는 파문처럼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런 비바도 물론 위축되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남녀 칸이 분리된 지하철 안에서의 사건이다. 그곳에서 비바는 여성 전용 칸에 앉지 말라는 한 승객의 시비로 인해 곤경에 빠지게 되는데 그런 비바를 위해 여성 칸으로 들어가 둘 사이를 비집고 앉아버린 하이더르의 행동은 그에 대한 비바의 믿음과 애정을 촉발시키지만, 이후 사랑을 나누던 중 비바에게 원치 않는 역할이 요구되는 순간 두 사람의 사랑은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갈 수 없게 된다. 사랑에서도 강요된 역할극은 수용될 수 없다고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사랑에서 역할극이 수용될 수 없다면 역할극에서 사랑은 지속될 수 있을까? 이때 사랑이란 비단 에로스적 사랑만을 지시하는 것은 아닌데, 애초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하이더르와 뭄타즈는 성애가 기반이 된 관계라기보다(하이더르는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친구나 동료, 혹은 일부 공통점을 지닌 정신적 쌍둥이에 가까워 보인다. 두 사람은 그들의 사회가 정의 내리는 성역할 관념에 분명 얼마간 부합하지 않으며, 하이더르가 댄서로서 격렬하고도 자유롭게 춤추는 장면과 뭄타즈가 놀이공원 ‘조이랜드’에서 놀이기구를 타고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장면은 두 사람이 순수한 의미에서 기쁨을 느낀다는 것뿐만 아니라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과 의무를 벗어던진 순간이라는 점에서 공명한다. 부부간의 가장 내밀한 장소인 잠자리에서마저 형 살림(소할리 사메에르)의 네딸들을 돌봐야 하는 두 사람이 각각 성욕 해소를 위해 분투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실패하고 만다는 점 또한 닮아 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차라리 (뭄타즈의) 체념으로 수렴될지언정 구체적 반목이나 불화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부드러운 교감이 이뤄지는 몇몇 장면들에선 삶의 고충을 견뎌내고자 하는 모종의 연대 의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놀이공원에서 누치에게 은근히 꺼내보는 '도망가고 싶다'는 뭄타즈의 고백은 하이더르에게는 끝내 닿지 못한다는 점에서(추후 하이더르를 향한 뭄타즈의 체념의 눈빛과 더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든다.
사랑이 소멸한 자리
도망을 시도했으나 집으로 돌아온 뭄타즈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어느 밤, 하이더르의 무지와 뭄타즈의 결단 또한 깊은 충격을 안긴다. 화장실 문이 무심하게 닫히는 그 순간, 카메라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인지하듯 문 앞에서 멈춰 설 뿐이다. 뭄타즈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하이더르를 포함해 그 누구도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뭄타즈는 그렇게 도망으로부터의 도망을 통해 비로소 집을 떠나간다. 뭄타즈의 죽음은 가부장제의 폭력(하이더르 또한 그 자장에서 온전히 자유롭진 못할 것이다)에 대한 소리 없는 응답이다. 장례식 이후 “우리 모두가 뭄타즈를 죽인 거야”라는 누치의 울부짖음은 뭄타즈의 마지막 밤을 둘러싼 잔혹한 침묵과 대비되어 더욱 소란스럽게 슬프다.
그리고 영화는 어디론가 떠나가는 하이더르의 모습을 비춘다. 어느 밤, 하이더르가 뭄타즈의 집을 찾는다. 결혼을 앞두고 두 사람이 나누는 고요한 대화를 담아내는 이 일련의 플래시백은 사회와 가정에서 자신의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포기와 단념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뭄타즈의 비극을 부각한다. 그렇게 영화는 죽음을 통해 끝난 역할극이 품고 있던 어떤 사랑의 가능성이 소멸한 광경을 쓸쓸하게 바라본다. 영화의 마지막, 한번도 바다에 가본 적이 없다던 하이더르는 자신의 집을 떠나 낯선 바다에 도착한다. 비바와 춤을 연습하던 순간과 마찬가지로 옷을 벗어던진(흰 천을 뒤집어 쓴 시작 장면과 대비된다) 그는 경직되어 부러지는 대신 그저 부드럽게 부서질 뿐인 파도를 맨몸으로 맞이하며 바다로 걸어들어간다. 그가 잠시 뒤돌아본 자리엔 집을 떠나오며 챙겨온 듯한 그의 짐 가방이 놓여 있다. 이제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억압과 속박, 구속과 굴레로 얼룩진 역할극을 벗어난 자가 죽음 대신 당도하게 될 곳은 어디인가, 영화는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