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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사관의 시선, 시인의 심장, ‘연인’이 보여준 서사의 매혹

엄혹한 시대에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는 의외로 고난도의 서사다. 어둠을 강조하면 절망에 눌리기 쉽고, 빛이 두드러지면 판타지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황진영 작가는 언제나 이 어려운 과제에 도전해왔다. 그의 작품은 한결같이 얼어붙은 현실 속에서 봄을 찾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드라마 데뷔작 <절정>(MBC, 2011)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이육사 시인의 불굴의 신념과 시어를 따라가는 작품이었고, <제왕의 딸 수백향>(MBC, 2013)은 전쟁의 위협이 끊이지 않는 시대에 수백향의 전설을 통해 백성들의 구국에의 염원을 담아낸 이야기였다. 세 번째 작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MBC, 2017, 이하 <역적>)은 연산군의 폭정 아래 고통당하는 가장 낮은 자들의 혁명을 그렸다. 이 일관된 서사가 언제나 우리를 매혹하는 데 성공한 것은 황진영 작가의 절묘한 균형 감각 때문이다. 그는 시대의 한계를 냉정하게 직시하면서도, 이를 버텨내는 인간의 이야기에 애정을 쏟는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관의 시선과 시인의 심장을 동시에 지닌 이야기와도 같다. 이같은 서사의 특징은 최근작 <연인>(MBC)에서도 잘 드러난다. 병자호란 전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역사의 비극과 백성들의 끈질긴 생명력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관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이야기

<연인> 1회는 1659년 효종 10년 봄, 소현세자 사후에 발견된 한 사초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소현세자에 관한 ‘불충이 가득한’ 이 사초는 “씻겨 내려졌어야 할 말들이자 존재해서는 아니될 말”로 평가된다. 올해 막 지평이 된 젊은 관리 신이립(하경)은 이 사초의 진위와 거기에 기록된 의문의 사내 이장현(남궁민)의 행적을 확인하라는 명을 받는다. 신이립은 실마리를 풀기 위해 혜민서 지하감옥을 찾고, 그곳에 갇힌 량음(김윤우)은 그에게 사초의 진실을 들려준다. 그러니까 <연인>은 처음부터 이것이 공식 역사에서 탈락한 이야기의 복원이라는 점을 환기하고 출발한 셈이다.

삭제된 것은 대개 소외된 이들의 역사다. 황진영 작가는 모든 것을 기록하려는 사관의 시선으로, 역사의 지워진 페이지를 채우려 한다.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길바닥의 소문과 정보를 모으는 스파이이자 기록자의 성격을 지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령 <절정>의 이육사(김동완)는 “보고도 못 본 척할 수 없고, 알면서도 모르는 척할 수 없는” 시대의 목격자이자 이를 눈부신 시어로 기록한 사관이었다. <제왕의 딸 수백향>의 설난(서현진)은 왕들이 보지 못하는 밑바닥 삶의 전달자였고, <역적>은 “그릇된 말을 사초에 기록하는 것은 곧 반역이라는” 폭군과 설화, 소설, 벽보 등 다양한 증언으로 이제 맞서는 백성들의 전쟁을 그린다.

이같은 주제는 <연인>에서도 두드러진다. 이 작품은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사이에 두고, ‘종묘사직을 유지하기 위한’ 인조(김종태)의 ‘슬픔’과 버려진 조선인 포로들의 ‘치욕’을 대비시킨다. 12회에 선양에서 조선인 포로들의 삶을 목격한 소현세자(김무준)와 이장현의 대화가 대표적이다. “어찌 죽지 않고 살아 저런 치욕을 당하느냐”는 소현에게 이장현은 “조선의 전하는 오랑캐에게 아홉번이나 절하는 치욕을 겪고도 어찌 살아 계십니까. 왜 어떤 자의 치욕은 슬픔이고 어떤 자의 치욕은 죽어 마땅한 죄이옵니까”라고 반문한다. 굴욕의 기억을 씻고 싶은 인조에게 조선인 포로들은 지우고 싶은 역사이고, 그렇기에 그들의 끈질긴 생존은 그 자체로 사초가 된다. <연인>의 후반부에서 자주 반복되는 장면 중 하나는 조선인 포로들이 모국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리는 탈출 신이다. 포로 사냥꾼들의 위협도, 청과의 갈등을 피하려는 왕의 외면에도, 그들은 결코 탈주를 포기하지 않는다.

지워진 이들에 주목한 이야기는 병자호란을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게 한다. 병자호란은 흔히 ‘삼전도의 굴욕’과 패배의 역사로 인식된다. 하지만 <연인>은 13회 이장현의 대사를 통해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조선의 포로들이 치욕을 참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살기를 선택한 자들이옵니다. 배고픔과 매질, 추위를 이겨내며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삶을 소망하고 있나이다. 하루를 더 살아낸다면 그 하루만큼 싸움에서 승리한 당당한 전사들이 되는 것이옵니다.” 병자호란이라는 비극은 그렇게 백성들의 끈질긴 생존의 역사로 재해석된다.

시인의 심장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다

<절정>에서 이육사의 조부는 어린 손자를 두고 “눈이 밝으면 이 세상 살기가 억수로 고난스럽다”고 우려한다. 실제로 이육사는 시대의 어둠에 눈뜬 뒤 온몸으로 폭력에 맞서다 투옥당하는 삶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절망하지 않은 것은, 그가 혐오와 분노 대신 연민과 공감의 시선을 지녔기 때문이다. “나를 타오르게 하는 것은 분노가 아니었네. 그것은 슬픔이네, 지독한 슬픔.” 극 중 이육사의 말은 <역적>에서 홍길동이 비참한 현실을 목격한 뒤 내뱉는 대사와 유사하다. “화가 안 나고 맴이 슬프요. 동생 어리니의 눈물 같고…. 나는 툭하면 화가 나는 종자인디, 화는 안 나고 눈물만 납디다.” 황진영 작가의 이야기 속 사관의 시선에는 냉철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소외되거나 평범한 존재들을 향한 연민과 사랑이 깃들어 있다. <역적>의 주제가 인류애라고 이야기했던 작가는, 제목에서부터 같은 주제를 전면에 내세운 <연인>을 통해 한층 깊어진 사랑을 이야기한다. 다시 <연인>의 도입부로 돌아가보자. 사초를 통해 이장현의 행적을 물었던 드라마는 바로 다음 시퀀스에서 수많은 병사에게 둘러싸인 이장현의 모습을 보여준다. 적을 바라보는 이장현의 표정에서 엿보인 것은 이육사와 홍길동의 모습에서처럼 분노가 아닌 슬픔이었다. “들리는가, 이 소리, 꽃 소리….” 죽음을 목전에 두고 내뱉는 장현의 시적 독백은 <절정>에 흐르던 이육사의 <> <청포도> <절정>의 시어를 연상시킨다. 동토를 뚫고 나오는 봄꽃 같은 소리는 연인 유길채(안은진)와 그가 대표하는 백성들에 대한 장현의 애정을 의미한다. <연인>은 그렇게 어둠의 서사를 빛의 서사로 전환하는 데 성공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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