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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지지고 볶으며 살아간다는 일, ‘동백꽃 필 무렵’부터 ‘더 글로리’와 ‘마스크걸’까지 배우 염혜란이 연기의 폭을 넓혀가는 법
이자연 2023-09-08

염혜란은 자꾸만 무언가를 잃는다. 정확히 말하면 염혜란이 맡아온 역할은 대부분 소중한 것을 잃어왔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등장한 그는 어린 딸 민영이를 병상에서 떠나보내고, 영화 <빛과 철>에서는 영남이 되어 사고로 의식불명이 된 남편을 2년간 보살핀다. <경이로운 소문>의 추 여사는 동료와 정의, 힘을 잃을 위기에 처하고, <더 글로리>에서 현남은 자신의 기쁨인 딸 선아를 유학길에 올리며 타지의 보호자에게 사랑을 청탁한다. 이렇듯 가파르게 오르고 내리길 반복하는 서사의 굴곡 속에서 염혜란은 과잉된 감정보다 땅에 붙는 현실성을 낚아챈다. 거칠게 마모된 피부, 굽은 등, 교양이란 말이 무색한 걸걸한 성미와 우렁찬 목소리까지. 하루아침에 아들을 잃은 <마스크걸>의 경자를 표현할 준비를 진작에 마쳤다는 듯, 염혜란은 보다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접근 방식을 택했다. <마스크걸>이 공개된 이후 온오프라인에서 그의 이름이 바쁘게 거론되는 풍경이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사실 염혜란이 처음 경자 역을 제안받았을 때, 그에게 경자는 낯설게만 느껴졌다. “<마스크걸>은 분명 흡인력 있고 개성 넘치는 이야기지만 평소 내가 선호하는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일면 자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연을 결심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그런 그의 우려를 불식시킨 건 김용훈 감독의 존재였다. 출연 제안을 받고 나서 염혜란은 김 감독의 전작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을 보았는데 “불편한 소재도 세련되게 풀 줄 아는” 감독이란 생각이 들었다. 섬세하고 세심한 연출을 통해 극을 즐길 수 있게 해줄 거라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김용훈 감독님이 ‘김경자야말로 전무후무한 캐릭터다’라는 이야기를 해주시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지금까지 젊고 건강하고 대중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 복수자가 대부분이었다면 경자는 나이 들고 체력적으로 노쇠하고 평범하다. 응원받기 어려운 인물에 가깝다. 이 새로움이 곧 경자의 강력함으로 다가왔다.” 염혜란은 경자를 빌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매력적이지 않은 인물일지언정 또 그가 불편하게 느껴질지언정 경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염혜란이 경자를 마치 아는 사람인 것처럼 말할 수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경자를 모든 연령대에 걸쳐 연기했다. “모미는 세명의 모미(이한별, 나나, 고현정)가 나눠 하는데 나는 20대부터 60대까지 모든 경자를 그려내야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경자의 삶을 따라가게 됐다.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경자의 시간이 축적되어갔다. 40여년 동안 경자에겐 많은 일이 있었다. 경자의 편협하고 강박적인 사고방식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래서 그의 기묘함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자 했다.” 동시에 염혜란은 경자가 모성애를 대변하는 인물로 드러나지 않길 바랐다. 자신의 존재 이유였던 아들을 잃고 난 뒤 경자의 처절한 복수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맞지만, 경자의 모든 감정을 오로지 모성애 하나로 귀결해버리면 인물이 너무 단편적으로 보일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관해 김용훈 감독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초로의 여성이 지닌 편협함이나 고립된 상황을 더 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본인의 생각과 다른 종교나 신념을 지닌 이들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아집이 그를 더 견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 김경자의 삶을 훑어보면 복수는 너무 큰일이다. 복수를 도와줄 조력자도 없고, 현대적 장비도 어색해한다. 어쩌면 포기하는 게 더 쉬운 일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복수의 길을 걷는 데에는 모성애 외에도 김경자만이 가진 기질과 특성이 작용했을 것이다. 자기만의 대의가 무척이나 중요한 여자다.”

염혜란이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건 그전까지 보기 힘들었던 개성 강한 여자들로 변모하면서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은탁(김고은)의 이모 지연숙으로 분할 때에는 언니가 남긴 보험금을 노리는 다소 방정맞은 얼굴을 선보였고, 영화 <걸캅스>에서는 ‘존X 마이너스 10점’이라는 유행어와 함께 큰 웃음을 남겼다. 영화 <아이>에서는 노래방에서 <상어 가족>을 자장가로 불러주는 엉뚱함을 그려냈고,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는 전남편 노규태(오정세)를 위해 드리프트를 하는, 사랑 많고 독립심 강한 자영을 보여줬다. 올해 상반기 내내 높은 화제성을 보여준 <더 글로리>에서도 현남의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이라는 명대사를 남기며 이상한 여자들의 범주를 넓히는 데 공을 세웠다. 이에 대해 염혜란은 “콘텐츠 시장에 다양성을 반영한 여성들이 더 많이 등장할수록 사회 전반이 진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반가움을 표했다. 김경자 또한 이 이상한 여자들의 풀 안에서 다양성을 반영하기 위해 심도 깊은 고민을 더했다. “원작 웹툰의 여성 팬이 워낙 많다 보니 배우들이나 제작팀 모두 촉각을 세워 작품 안에 문제가 없는지 계속해서 살폈다. 여성 서사로 완성된 작품을 감상하면서 불편한 사람이 없길 바랐다. 배우들도 대사 중에 걸리는 게 있으면 적극적으로 질문을 건넸고, 함께 조율해나갔다. 한번에 모든 게 좋아질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경자는 누구보다 아들 오남(안재홍)을 사랑했지만 그만큼 눈총도 주었다. 독립하겠다고 선언하는 아들에게 응원보다 죄책감을 먼저 뒤집어씌우고, 연락 없이 아들 집에 불쑥 찾아가기도 한다. 생일날에는 누구네 아들은 의사 며느리를 데리고 왔다더라는 이야기만 줄줄 늘어놓는다. 왜곡된 사랑과 집착, 타인을 통제하고 싶은 욕망과 모성애라는 이름의 변명. 경자는 자신에게 어떤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어둠을 좀먹으며 나이 들 뿐이다. 이러한 경자의 모습을 잘 드러내기 위해 염혜란은 어느 장면의 대사를 살짝 바꾸었다. 죽은 아들이 꿈에 나와 “엄마, 나 사실 창피해했지?”라고 말할 때, 본래는 “아니”라며 부정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염혜란은 “미안해”란 말로 장면을 만들었다. 미안해, 미안해…. 긍정도 부정도 어느 쪽에도 서지 않는 말이지만 사실 그 안에 명확한 답이 담겨 있다. “오남이를 사랑하는 경자의 마음에는 의심이 없다. 다만 ‘우리 아들 최고’라는 말에는 이면이 있었을 것이다. 경자의 말을 듣다 보면 아들을 향한 부끄러움이 조금씩 내비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도 눈치채고 있던 자신의 죄책감이 새어나오길 바랐다. 그러면 경자도 더 입체적으로 보여질 거라 생각했다. 교회 사람들 앞에서도 경자가 더 과장되게 행동하지 않나. 요즘 세상에 우리 아들 같은 사람 없다고.”

경자의 일상은 조급하다. 복수를 향한 의지로 점철된 삶에 여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좁은 보폭으로 종종거리며 나아가는 불안한 인물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경자의 모든 것이 되기 위해 지도를 펼쳤던 염혜란은 그 사람을 이해하려 애써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유연한 답을 건넸다. “굳이 이해해야 할까. (웃음) 그런 사람들이 있다. 마음이 동화되려 하면 내 예상을 비껴가는 인물들. 애정을 좀 주려 하면 또 나쁜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마스크걸>의 인물들이 다 그렇다. 그게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아무에게도 마음을 줄 수 없다는 게. (웃음) 사람들이 지지고 볶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본래 시리즈물의 묘미니 그런 걸 더 즐기면 좋겠다.”

<마스크걸>로 만난 배우 염혜란의 낯선 표정

죽은 아들의 시신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했던 경자의 반응은 마치 진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그것과 똑 닮아있다. 가누지 못하는 몸, 몇 갈래로 갈라지는 목소리, 눈물마저 말라버린 눈. 이 통곡과 오열은 경자가 왜 그렇게까지 한평생 복수에 목매야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기 때문에 <마스크걸>의 중심 장면이기도 하다. 숨이 막혀 울음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염혜란의 모먼트가 오래 기억될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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