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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1)
2002-06-07

내년엔 당신의 영화를 보고싶다, 이곳에서

(지난주에 이어서 계속) 그러니까 영화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매일 최선을 다하면 일곱편, 그리고 시간이 잘 안 맞으면 네편의 영화를 본 다음 칸의 해변가를 따라 (요즘 내가 심취한) 마누 차오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걸어온다. 나는 김홍준 선배가 한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영화제가 있지. 칸와 안(non)-칸영화제.”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곳은 영화를 위해서, (앙드레 바쟁의 말을 빌려) 불순하게도 끼어들어간 현실을 이미지 속에서 보존하고 정회시키기 위해 싸우는 시네아스트들을 지지하면서, 작가의 새로운 명단을 매년 발표하면서, 영화감독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는 곳이다. 정말 칸에서는 영화평론가들이나 영화기자나 프로듀서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오직 창조하는 자들만이 그 위대한 만신전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당신은 칸을 절반만 본 것이다. 그 크로와제트의 뒤를 돌아가면 끝갈 데 없이 마켓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곡예를 넘는 동안 뒤에서는 장사꾼들의 셈과 흥정, 대차대조표가 펼쳐진다. 칸를 둘러싼 호텔에는 영화사들의 플래카드가 화려하게 만국기처럼 휘날린다. 그러나 그걸 보는 내 심정은 꼭 빨래들이 널려서 펄럭이는 것 같다. 칸영화제가 벌어지는 동안 가까운 곳 칸 포르노국제영화제(!)가 열린다. (함께 간 <씨네21> 박은영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무서운 언니’들이 토플리스 차림으로 해변에 누워 있고, 저녁이면 카지노를 하러 오라는 화려한 카퍼레이드가 펼쳐진다. 광장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감독과 영화를 보고 싶어서 공식상영에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을 구한다는 구호(!)를 쓴 커다란 종이를 펼쳐들고 영화애호가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그렇게 칸은 예술가들과 장사꾼들과 애호가들이 펼치는 모순의 삼위일체이다. 당신은 이곳에 오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영화를 갖고 오라. 이것은 내가 당신에게 있는 힘을 다해서 바치는 진심어린 충고이다.

추신. 이 영화여행 기행문은 항상 새벽 3시부터 5시 사이에 쓰여졌다. 왜냐하면 다음날 영화의 첫 시사는 8시30분이기 때문에 더 늦게 자면 틀림없이 졸게 된다. 그러니 이 심야에 쓰는 글들이 감상적이 되는 것을 용서하시길. 아, 지금은 (베리만의 말을 빌리면) 신이 침묵하고 악마가 거래를 여는 ‘늑대의 시간’이다.

엘리아 술레이만의 <신의 간섭>, 올해 칸의 발견

오늘 아침 <리베라시옹>을 읽었다. 매일 세계 면의 톱은 여전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프랑스에 매우 미묘한 위치를 점유한다. 그들의 개입은 물론 자유, 평등, 박애지만 프랑스가 미국과 긴장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태의 핵심이다. 프랑스는 아라파트에 돈을 대고 있고, 그것은 또다른 알제리가 될 가능성도 있다. 서울의 관심과 달리 여기의 관심은 중동이다. 매일 아침마다 듣는 중동의 히트곡들. 테크노클럽에 가면 열에 여덟은 중동에서 온 DJ들의 리믹스를 듣게 된다. 그리고 오늘 팔레스타인의 새로운 시네아스트 엘리아 술레이만의 영화 <신의 간섭>(Yadon ilaheyya, 경쟁부문)을 보았다. 이구동성. 아마도 엘리아 술레이만은 올해 칸의 발견일 것이다. 이 영화는 <실종의 연대기>(1996)에 이은 그의 ‘연대기’ 연작 두 번째 속편이다. 그래서 <신의 간섭>에는 ‘사랑과 고통의 연대기’라는 자막이 중간에 떠오른다.

팔레스타인은 두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나사렛과 라말라. 그리고 한곳에서 다른 지역에 가려면 이스라엘군의 검문소를 지나야 한다. 나사렛에 살고 있는 ES(엘리아 술레이만이 주연도 한다)는 라말라의 여자(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익명성의 영화이다)를 사랑한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려면 그 검문소를 지나야 한다. 말 그대로 견우와 직녀. ES의 아버지는 세상이 못마땅하다. 사업은 실패했고, 변경구역에 가깝게 살고 있는 그는 바로 옆집(이자 이스라엘) 안마당에 매일 아침 쓰레기봉투를 버린다.

영화의 도입부는 압바스 키이로스타미를 연상케 한다. 또는 자크 타티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최소한의 대사와 간결한 액션들, 세심한 이웃들과의 하루, 여기에 종종 멈추어 서 있는 인물들의 등을 카메라는 오랜 동안 서서 보여주기도 한다. 계엄하의 일상생활?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아버지가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자 ES는 차를 몰아 달려간다. 그는 과일을 먹으면서 달리다가 다 먹자 사과씨를 바깥에 던진다. 지나가는 차 옆에 거대한 탱크가 보인다. 전쟁과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데 그 순간 탱크가 사과씨에 폭파되어서 불바다를 만들면서 산산조각 날아가버린다. 갑자기 영화가 종잡을 수 없게 전개되고, 스타일은 종횡무진하기 시작하고, 이야기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그러면서도 엘리아 술레이만은 이 시각적인 유머 속에서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삶의 고통에 대해서 결코 한시도 잊지 않는다.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걸어가면서 보이는 오슨 웰스의 저 바로크 스타일의 카메라 이동, 거기에 사랑의 힘이 이스라엘군 초소를 단숨에 날려버린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정말 화면 앞에서 무너져내린다는 말이다. 또는 그들이 초소를 통과하기 위하여 야세르 아라파트의 얼굴이 그려진 풍선을 날려보내는 장면은 기묘하게도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쿵쾅거리는 비트들. 이제 비상계엄이 내려지고 더이상 만날 수 없게 된 두 사람의 상상. 이스라엘 특전대가 복면을 한 팔레스타인 여인의 그림 타깃을 놓고 총기사격 연습을 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중 가운데 그 그림 타깃 뒤에서 정말 팔레스타인 여인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특전부대원들이 <매트릭스>의 sfx장면을 패러디한 공중비상과 멈추어선 총알, 여기에 그 총알로 성모 마리아상처럼 다시 머리 주변에 원형을 만들어내는 대목에 이르면 웃음은 불현듯 숭고해진다. 그러고나면 자막이 떠오르고 매시브 어택의 트립 합이 신비롭게 중얼거리면서, 후렴구로 “오, 나는 당신을 그리워할 거예요”라고 애절하게 울려퍼지며 영화는 끝난다. 웬 매스브 어택? 엘리아 술레이만의 대답. “꼭 왕가위의 <타락천사> 같지 않아요?” (웃음)

엘리아 술레이만이 정말 새로운 이유는 그가 마술적 리얼리즘의 전통이라고 불리는 이미지들과 자기 땅에서 유배받은 자들의 디아스포라를 동시에 끌어안고 자기의 정체성을 물어보는 데서 온 것이다. 그들의 삶은 신의 간섭일까?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넘어볼 수 있을까? 또는 누구의 신이 옳은 것인가? 그런 질문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도 신의 섭리는 실현되고, 그 섭리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그 예정된 결정사항들을 적어놓은 수십개의 포스트잇을 벽에 붙여놓은 ES는 아버지가 죽자 그 포스트잇을 떼어버린다. 그 순간 영화는 그저 우두커니 ES의 등을 바라본다. 어쩌면 엘리아 술레이만은 불경죄를 저지르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상상력은 오직 인간의 삶이 신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영화를 통해서 기적을 행하기 때문이다. 영화적인 기적? 그렇다. 그는 금기를 무시하고, 할리우드영화와 뮤직비디오에서나 등장하는 기적의 순간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나는 영화에서 영화라는 트릭을 사용하는 것이 이렇게까지 진정성의 순간에 가까스로 이르는 것을 달리 알지 못한다. 만일 올해 칸의 질문이 정말 정체성이라면 엘리아 술레이만은 그 누구보다도 그 바닥까지 내려가본다. 또는 그 안에서 가장 멀리 비상한다.

아톰 에고이얀의 <아라라트>, 민족 정체성의 뿌리로의 여행

모두들 아톰 에고이얀의 <아라라트>(Ararat)가 비경쟁 공식부문 초대작으로 결정되었을 때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아톰 에고이얀은 새로운 영화의 화법을 만든 시네아스트이다. 그는 영화가 숏의 연결을 통해서 개념의 몽타주를 만들 수 있다면, 더 나아가 씬의 몽타주를 통해서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의 상상적 몽타주를 만들어내는 영화를 발명했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은 퍼즐을 풀어나가는 것이다. 시작하면 절반이 지나도록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평행으로 전개되고, 이제 영화의 이야기 구조에서의 원근법은 그 고정점을 찾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인물들의 상상적 가상선이 생겨나면서 비로소 우리는 상공비행하여 그 구조의 인과관계를 알게 된다. 하지만 완전히 마음놓을 수는 없다. 아톰 에고이얀은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이를테면 그의 <엑조티카>(이 영화는 퀴어영화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는 예술적인 야심이 때로 지나쳐서 그것이 영화를 망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어저스터>. 하지만 그가 항상 논쟁적인 시네아스트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톰 에고이얀은 경쟁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가 경쟁을 피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에고이얀 영화의 지지자들은 잘 알고 있겠지만, 또는 그의 영화음악을 유심하게 들어본 사람들은 눈치챘겠지만, 아톰 에고이얀은 아르메니아-캐나다인이다. 그의 뿌리는 아르메니아이며, 그의 고향은 이집트이다. 이 먼길을 돌아선 뿌리는 그의 영화의 정체성을 퍼즐로 만든다. 그 에고이얀이 이제 더이상 자기 자신을 피하지 않기로 작정한다. 그는 아무도 이야기하기를 원치 않는 역사적 사실 안으로 들어간다. 아르메니아의 디아스포라의 비극적 시작. 1915년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해 터키는 인종말살을 시도하였다. 그러니까 아라라트산에서 벌어진 이 대학살은 그뒤에 이어질 나치의 쇼아, 또는 발칸반도의 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인용되는 그 유명한 이야기) “히틀러는 유대인들의 아우슈비츠를 결정하면서 말했지. 20년이 지나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을 거야. 그게 역사라구.” 터키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아직도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이 없다. 아톰 에고이얀은 어려운 결심을 해야만 했다. “나는 고민했다. 이제는 아르메니아의 비극을 이야기기하고, 사과를 받아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도 아무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있다. 더 지난다면 정말 잊혀질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가 이 영화를 만든 이유이다. 서구는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 서구에 알리기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칸에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이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받지 못한다면, 결국 역사의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에 대한 침묵의 동의가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비경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아라라트>는 아톰 에고이얀의 영화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의외의 영화이다. 그러나 그가 영화를 만드는 그 자신의 화법을 바꾼 것은 아니다. 영화는 지금 토론토에 살고 있는 여섯명의 인물로 나뉘어서 평행하게 시작한다. 자기 어머니의 초상화를 완성하지 못하고 미루는 화가, 그의 인생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는 감독, 그 감독의 차를 운전하는 18살 청년, 그 영화에서 터키군 악당을 연기하는 배우, 아버지가 실종된 이유를 찾는 여인, 그녀 자신의 과거를 잊기 위해서 역사를 끌어안는 강사들이 자기의 방식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어디서 온 사람인가를 알지 않기 위해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질문을 피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의 대부분의 영화가 그러한 것처럼) 절반이 지날 때까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톰 에고이얀은 이 서로 다른 인물들을 다시 두개의 이야기 사이로 갈라놓는다. 그 하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동화되어가는 운전사 청년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하면서 아르메니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제작을 둘러싼 감독과 그 주변 사이의 갈등이다. 그 사이사이에 계속해서 아라라트산에서 벌어진 인종학살의 과정이 전개되면서, 그 안에서 사라진 역사의 총체적인 과정의 복원을 시도한다.

아톰 에고이얀이 에밀 쿠스투리차와 다른 점. 또는 <아라라트>가 <언더그라운드>와 다른 점. 에고이얀은 여기서 서로 다른 진술을 하는 등장인물들을 끌어들이지만 그들이 서로 모순된 말을 하여 아이러니의 효과를 끌어내기를 원치 않는다. 더더구나 그는 화면의 시적인 기분이나, 상징적인 표현이나, 알레고리한 대상이나, 스펙터클한 역사의 재현을 모두 피한다. 또는 아무도 아르메니아 학살이나 아라라트산의 학살에 대해서 직접적인 말을 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에고이얀은 서로 다른 관점을 동원하고, 서로 다른 층위의 이야기들을 만들지만, 그 모든 것을 통해서 그는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한 총체적인 강의도표를 만들 듯이 영화의 구조를 활용한다. 그래서 인물들과 이야기들은 서로 짝패를 이루면서 층층이 쌓아올려지고, 그 안에서 서로 위치를 바꾸면서 말하여지지 않은 역사,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 그 역사의 트라우마가 왜 아직도(그들 자신은 다 잊고 산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에는) 현재의 아르메니아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두려움에 떨게 하고, 무언가 망설이고, 마침내는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만드는지를 물어본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역사극인 것이다. 또는 이 영화가 아톰 에고이얀의 새로운 걸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왜 그가 퍼즐풀기에 강박관념처럼 몰두하는지를 고백하는 진정성을 끌어내는 영화이다. 형식과 내용의 일치. 이 진부한 말이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 이상하게도 아프게 되새겨진다.

<행복을 기다리며>, 낯선 나라 모리타니아에서 온 감동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모리타니아라는 나라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김홍준 선배 말에 의하면 아프리카의 수단 근경에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모리타니아에서 온 압데라마네 시사코의 두 번째 영화 <행복을 기다리며>(Heremakono, 주목할 만한 시선)은 아름답고 때로 감동적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17살이 된 압달라는 유럽으로 이민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어머니를 만나러 고향 누아디부에 간다. 그러나 그는 고향 말을 하지 못한다. 고향에 돌아갔지만, 그곳에서 그는 낯선 이방인일 뿐이다. 거기서 그는 딸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아내가 매춘을 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버림받은 이야기, 또는 중국에서 이민온 남자인 카라오케, 고아가 된 어린 소년, 마을 사람들을 차례로 만난다. 고향말로 된 노래들과 바람소리와 빛, 그리고 마지막 장면을 채우는 사막의 정경들. 아마도 압데라마네 시사코 자신의 자서전의 일부가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이 영화는 향수와 추억으로 가득 차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조심스러운 장면들과 시적인 대사들, 인물들의 마음을 담은 듯한 다큐멘터리풍의 고백들,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고향의 작은 순간들도 기억하려는 압달라의 마음이 곱게 담겨진다. 영화가 진심을 전하기를 원하면 종종 그 영화의 국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성일의 칸 10 베스트독단과 편견으로 뽑은 나의 걸작들

우선 염두에 둘 것. 이 명단에서 나는 복원판은 모두 제외시켰다(이를테면 자크 타티의 영화들. 또는 호금전의 <방랑의 결투>). 한 가지 더. 나는 칸에서 상영한 모든 작품을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쟁부문과 주목할 만한 시선, 그리고 비평가주간과 감독주간에서 46편을 보았다. 11일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이 순위에 한국영화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다. 이 목록은 순위에 따른 것이다.

1. 스파이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경쟁부문)

카프카의 세계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또는 스파이더 맨의 앙티 오이디푸스 버전.

2. 과거없는 남자(아키 카우리스마키, 경쟁부문)

레닌그라드 ‘구세군’ 밴드, 죽었다 살아난 남자에게 사랑하는 여자를 소개한다. 홈리스들의 공동체를 위한 카우리스마키적인 유토피아 동화. 그런데 자본주의가 문제다.

3. 임소요(任逍遙)(지아장커, 경쟁부문)

중국 자본주의의 손바닥 아래 19살 소년 ‘손오공’들, 온갖 재주를 넘으며 그들의 인생을 망쳐간다. 디지털로 만든 포스트 천안문세대의 악전고투.

4. 신의 간섭(엘리아 술레이만, 경쟁부문)

팔레스타인의 견우와 직녀, 사랑을 신은 막을 수 있을까? 종횡무진, 자유자재, 신기막측. 변화무쌍!

5. 고백(제키 데미르쿠비즈, 주목할 만한 시선)

한 남자가 엄마가 죽자 아내를 새로 데려온다. 그러나 아내는 불륜에 빠지고, 남자는 누명을 쓴 채 법정에 불려간다. 터키라는 우물에 돼지가 빠진 날.

6. 스위트16(켄 로치, 경쟁부문)

소년은 가족이 함께 모일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16살 생일이 되는 날 모든 것을 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켄 로치의 글래스고 삼부작의 두 번째 영화.

7 아들(장 피에르와 뤼크 다르덴, 경쟁부문)

아이을 죽인 소년이 아이의 아버지가 가르치는 학교에 온다. 복수를 할 것인가, 용서를 할 것인가. 카메라는 숨가쁘게 아버지의 뒤를 쫓고, 소년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제 숲 속에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

8. 모번 칼라(린 램지, 비평가 부문)

한 소녀가 자살한 남자친구의 시체를 사지절단해서 갖다 버리고는 장례비로 친구와 여행을 떠난다. 린 램지의 <미치광이 삐에로>?

9. 되돌이킬 수 없는 (가스파르 노에, 경쟁부문)

지금 영화가 가볼 수 있는 그 어떤 한계점의 극한. 형식에서도, 주제에서도, 표현에서도, 연출에서도. 이미지와 사운드와 속도의 사도마조히즘. 그 안에서 기어이 감동을 끌어내는 ‘막가파’ 시네아스트의 등장.

10. 내 어머니의 지방의 노래들(바흐만 고바디, 주목할 만한 시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이야기를 에밀 쿠스투리차가 만든 것 같은 요란법석을 떠는 뮤지컬. 춤과 음악과 여행. 할아버지가 두 아들을 데리고 아내를 찾아 떠나는 로드 무비.

※ 추신. 이 목록은 칸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하는 동안 내가 내 방에서 선정한 것이다. 그들이 무슨 영화를 뽑건 그건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목록은 심사결과와 아무 상관이 없다.▶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1)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2)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3)